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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년 2월 부산 출생
1968년 서라벌 고등학교 3년 중퇴
1982년 10월 (주)민경교통에 입사
1983년 3월 노조 복지부장으로 일함
1984년 11월 30일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더 이상 기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동지의 삶>
민경교통의 택시운전기사였던 박열사가 산화하기 몇달 전인 85년 5월과 6월, 군사독재정권의 반민중적인 교통정책은 대구, 분산등지의 택시운전기사들의 대규모 파업시위를 몰고 왔다.
6년의 경력을 갖고 있던 박열사가 민경교통에 입사한 것은 83년 1월이었다. 박열사가 죽음의 결단을 내리게 된 결정적 사건은 입사한지 만 3년이 가까와 오던 85년 11월 28일에 일어났다.
회사측의 사주를 받은 배차과장 등 7명의 반 노동조합 행위자들이 조합 내의 비리를 헤친다는 명목으로 노조사무장 이태길씨를 징계위에 회부했다. 이에 대하여 대다수 60명의 조합원들이 구제 신청을 냈는데, 회사측은 잦은 무단결근과 그로 인한 회사측의 금전적 손실 등의 이유를 들어 같은 날 그를 전격적으로 해고시키고 말았다. 박열사는 다음날인 29일부터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여 안을한(조합간사), 배철호(복지부장)씨 등과 함께 철야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열사는 이 때 조합원들에게 \"조합을 지켜야 한다.\"고 비장한 각오의 부탁을 했다. 회사는 30일 오전에는 단식을 계속하는 박열사와 동료들의 요구를 \"모두 다 해고해 버리겠다. 같이 일할만한 사람이 못된다\"며 묵살했다. 박열사는 이에 격분, 온몸으로 투쟁의지를 불살랐다. 관리과 사무실의 석유난로에서 석유를 빼낸 열사는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라이터 불을 갖다 대었고 결국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8시 50분 \"내가 지금 죽으면 안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평소 불의를보면 참지 못하고 강직하면서도 동료들에게는 희생적이었던 그는 회사측에서 회유책으로 새 차를 배정했음에도 그것을 동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계속 스페어로 남아 있었다. 또한 지난 83년 8월 동료기사가 사고를 냈을 때 회사가 피해액의 40%에 해당하는 56만원을 부담시키고 일을 내보내지 않자 자신의 문제처럼 발벗고 나서 회사에 항의하다 회사측으로부터 전치2주의 상처를 입는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평소\'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도 이러한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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