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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수


이름

박창수

출생 및 사망연도

1958-07-28 ~ 1991-05-06

주요내용

 

 

1958년 7월 28일 부산 영주동에서 출생
1979년 2월 부산 기계공고 졸업
1979년 3월- 1980년 7월 (주)진양기계 근무
1980년 9월- 1981년 5월 영진설비 근무
1981년 5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 조선노동자의 삶을 시작하다.
한 여름이면 5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작업탱크 안에서 얼굴에 허옇게 소금꽃이 피고 겨울에는 영하 10도를 넘는 추위 속에서도 추락의 위험으로 옷조차 제대로 껴입지 못하는 참담한 노동을 겪으며 인간다운 노동자의 삶을 고민하다

1987년 노조활동을 시작하다.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한맺힌 절규가 전국을 뒤흔들던 7월, 마침내 이 땅 천만 노동자가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그도 가다. 이후 3년간 회계감사로 재직하며 자본과 정권과의 고난한 투쟁에서 언제나 든든한 선봉장으로 서다.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으로 당선되다. 노조를 새로 건설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을 성공리에 이끌며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이후 진정한 민주노조의 상을 세우고자 노력하다.

1990년 9월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부의장으로 선출되다. 위원장 당선 이후 계속된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을 뿌리치고 30만 부산노동자와 1천만 전국 노동자의 연대투쟁을 이끄는 지도자로 민주노조운동의 대오를 강화하기 위해 실천하다.

1991년 2월 11일 대우조선 파업지원을 연대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논의했다는 이유로 제3자개입 금지법 위반협의로 구속,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다.

1991년 5월 4일 구치소내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으로 옮겨지다.

1991년 5월 6일 새벽 4시 45분경 안양병원마당에서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다.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살인으로 추정되다. 끔직이도 사랑하던 부인 박기선씨(당시 30세)와 용찬(6세), 예란(4세)의 남매를 남긴 채 못다한 노동해방의 열망을 안고 그렇게 절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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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보기

 

옥중편지와 글.hwp (16 kB)
추모글-김진숙.hwp (27.5 kB)
편지-가족.hwp (18.5 kB)
편지-조합원.hwp (22.5 kB)
조합원 추모사.hwp (15.5 kB)
부인 호소문.hwp (25.5 kB)
대시민 연설문(부인).hwp (22 kB)
박창수투쟁경과보고(노동운동).hwp (24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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