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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호 작성일14-11-30 00:00 조회1,3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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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제28사단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을 접하며


김승호(전태일을다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사건과 사고가 많은 대한민국이지만 요즘 같은 경우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많은 사건 사고 가운데 세월호 참사 다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 윤 일병 타살 사건이다. 객관적으로 이 사건의 사회·정치적 중요성이 그 정도로 높다는 것은 아니고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그렇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김해 여중생들의 여고생 집단 폭행과 고문·성매매 강요·살해·시신 훼손·콘크리트 암매장 사건이 훨씬 더 엽기적이고, 충격적이며, 사회적 관심을 요하는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 이유로 윤 일병 사망 사건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

필자는 1971년 10월 15일 이른바 \'위수령 사건\'으로 그해 11월 군에 강제 징집돼 보병 제28사단에서 복무하고 1974년에 제대했다. 71년 11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하고, 12월 하순께 의정부에 있는 3군 보충대를 거쳐, 크리스마스 직전 보병 제28사단 81보병연대에 자대 배치되었다. 제28사단은 파주, 양주, 연천 일대의 중서부 전선을 담당하는 부대로서, 최전방 철책선(GOP)에서 6개월 근무한 후 그 직후방 전선(FEBA)에서 1년 근무하는 식으로 장소를 교대해 가며 철책선 경계근무 및 전선 경계근무를 했다. 강제 징집된 우리는 각 사단별로 10여 명씩 분산 배치되고 각 보병연대에 3~4 명씩 분산 배치된 후 각 대대별로 한 명씩 배치되었고, 각 대대에서는 우리를 모 중대, 모 소대, 화기분대의 경기관총 탄약병으로 배치했다. 말단 소총소대에서도 가장 고생하는 보직이었다. 부대훈련에 나가면 개인화기인 M1소총과 배낭에 더하여, LMG30 경기관총, 기관총 위장망, 기관총 탄약을 다른 한 명의 탄약병과 함께 짊어지고 행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고된 훈련보다 더 힘든 것은 기합이라는 이름의, 구타와 요즘 언론에서 ‘가혹행위’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부르고 있는 인격말살행위였다. 엎드려뻗치고 몽둥이질(이른바 ‘빳다’)은 기본이고, 침상에 대가리 박기, 양손 깍지 끼고 \'엎드려뻗쳐\', 수통이나 항고 뚜껑에 \'대가리 박기\', M1소총 노리쇠 뭉치로 엉덩이 내리치기 등이 다반사로 자행되었다. 매일 밤 기합을 받았으므로 \"기합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직접 구타당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동료들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며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래서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이 생겼다. 구타뿐이 아니었다. 졸병은 스스로를 인격이 없는 개(犬)로 비하하도록 강요받았다.(28사단 포병연대에서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윤 일병을 기어 다니게 하고 ‘멍멍’ 짖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핥으라고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구타와 인격말살을 견디지 못한 졸병들은 그런 굴욕의 현장을 피하기 위해, 또는 빨리 ‘5대 장성’인 병장 계급장을 달고서 굴욕에서 해방(?)되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 월남전에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야만의 소굴 같은 병영생활에서 인격적으로 망가지지 않기 위해 필자는 군 생활 초기에 몇 가지 결심을 했다. 그 결심 가운데는 졸병을 구타하지 않는 것, 졸병에게 욕설하지 않는 것, 그리고 졸병들에게 반말하지 않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런 것들을 결심 사항으로 삼고 버티어야 겨우 인격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당시의 병영문화는 비인간적·반인륜적이고 반문명적·야만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위에서 까라면 아래는 무조건 깐다\"는 일본 제국 군대식 병영 문화(?) 그대로였다.
박정희 파쇼는 일제 군대의 그런 야만적 병영문화를 지속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업, 학교, 병원, 공직사회 등 사회전반에 일반화시킨 야만적 군사파쇼였다. 박정희는 1972년에 일본 명치유신을 흉내 내 ‘10월 유신’을 한다면서, 10월 17일 초헌법적으로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이를 전환점으로 군대 밖 ‘사회’를 군대의 확대판으로 만들어서 인간존엄성 압살과 절대적 상명하복의 군사문화가 지배하게 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노동계급에게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완전 무권리 상태를 강요했다.

바로 그때 그런 야만적 군사파쇼 체제의 국가와 사회를 민주화시키기 위한 사회`정치운동이 거세게 타올랐다.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에 떨쳐나섰다. 1974년 초 백기완 선생이 개헌청원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1호 위반죄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고문당했다. 이런 반유신 투쟁은 1974년 4월 대학생들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연이어 초법적 긴급조치를 발동했고, 1975년 장준하 선생을 암살했다. 그 시기에 필자는 만기 제대하여 충무로의 자그마한 사무실에 있던 백범사상연구소에서 백기완 선생님을 뵈었고, 백 선생님의 소개로 고 계훈제 선생님과 고 문익환 목사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 여러 훌륭한 분들의 투쟁과, 특히 귀중한 목숨을 제단에 바친 민주열사들의 희생을 자양분으로 해서 이 땅이 민주화됐다. 아니,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산업화도 되고 민주화도 됐다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보병 제28사단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을 접하면서 그 동안의 그 같은 평가를 재검토하고 지난 40여 년간의 민주화운동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볼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다.
도대체 무엇이 민주화됐단 말인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전자 계열<삼성전자 서비스>에서는 지금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고 연이어 자살에 내몰리고 있는데 무슨 사회 민주화인가? 장래가 구만리 같은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구타와 인격말살에 시달리며 자살에 내몰리고 타살당하고 있는데 무슨 민주 국가인가? (군대 내 사망자 중 절반 이상이 자살이다! 작년엔 그 비율이 67.5%다! 안전사고 사망을 포함한 전체 사망자는 줄어드는데 자살자는 늘고 있다!) 또 정치와 경제는 과연 “백성이 주인 되는” 방향에서 민주화되어 왔는가?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 이후 전개된 우리의 민주화운동 40년은 민주화운동권이, 중산층을 ‘대표’하고 서민대중을 ‘동원’하여, 군사파쇼 통치체제를 의회주의 정치체제로 개혁하고, 수구보수 정파 대신 자유민주 정파가 집권하면 된다는 식의 자유민주적 민주화운동에 제한되어 왔다.(현행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만 인정하고 있다! 거기에는 진정한 민주주의, 민중의 민주주의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운운하는 현재의 민주주의 수호 운동은 그 자유민주 헌법을 지키자는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했으므로 민주화운동은 노동자·농민·서민 등 수 천만 피지배·착취 민중이 주인·주체가 되어 사회 시스템과 국가 시스템 전체를 자주적·진보적으로 변혁하는 쪽으로 과감하게 투쟁하지 못해 왔다. 아니, 민주화 투쟁을 그처럼 변혁이 아닌 개혁의 테두리 안으로 가두어 왔다. 그 결과 군사독재가 자본독재로 무늬만 바뀌었을 뿐,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의 독재와 착취는 지속되고 있다. 군사독재보다 더 야만적이고 더 비열해진 지배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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