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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동반자살한 세모녀 노동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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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호 작성일14-11-30 00:00 조회9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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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노동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김승호의 노동세상 스물 두 번째 글 입니다.



동반자살한 세 모녀 노동자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달 말 서울 대치동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가 동반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모녀는 월세 50만원과 공과금을 합쳐 70만원이 들어 있는 흰 편지봉투의 겉면에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힌 메모를 남겼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은 수천억 원의 공금(기업의 돈이든 국가의 돈이든)을 가로채는 중죄를 범하고도 국가와 경제를 위해 일하다 생긴 실수라며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다니는 이 ‘파렴치’의 시대에, 그분들은 살기 힘들어서 세상을 포기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예의를 지키고자 했다. 그래서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있다. 나 또한 뭇사람들의 그런 감정을 공유하면서 그분들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그리고 생각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사회지도층들이 한탕해서 떼돈을 벌자며 ‘대박’을 외치고 있는 시대에 어느 노동자 가족은 삶을 포기했다. 보도를 통해 그들의 성실하고 착한 모습을 확인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회적 문제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안전망에 “구멍이 나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 어려운 사정이 사전에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안전망이 아예 부재해서, 복지정책이 없거나 철회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쪽 사람들이 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원인에 대한 과학적 진단은 건너뛰면서, 정부 또는 정권의 탓으로 돌리는 결론을 정해 놓고, 그 이유와 처방을 말하고 있다.


모녀의 죽음이 사회에 책임이 있는 문제라면, 도대체 이 사회의 본성이나 법칙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만약 그 어머니가 얼음길에 미끄러져서 팔을 다치지 않고 일하던 놀이공원 식당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그 가족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때때로 편의점에 나가 알바 일을 하던 30대의 딸이 안정된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세 모녀는 이 땅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삶을 포기했다. 이런 현실, 즉 일을 하고자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는 노동자의 현실은 과연 자본주의 사회의 본성과 무관한 우연적 일인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본은 직접적 생산자들을 끊임없이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무산자(無産者)로 만들고 임금노동자계급에 편입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고용하던 노동자의 일부를 부단히 노동에서 유리(遊離)시킨다. 노령·고령, 장애·질병, 불경기, 구조개혁 등 갖은 이유를 붙여서. 이렇게 해서 항상 자본이 당장에 필요로 하는 양보다 많은 수의 노동자를 예비해 둔다. 그렇게 해야만 이후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때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임금과 노동조건을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는 수준 이하로 억제할 수 있다. 이렇게 자본을 위해 예비된 사람들을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산업예비군 또는 상대적(자본이 사용하는 데 필요한 규모에 비해서) 과잉인구라고 이름 붙였다. 산업예비군 또는 상대적 과잉인구 중에서 조만간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고용되는 유동적인 형태의 과잉인구가 있는가 하면, 경기가 좋아져도 쉽게 고용되지 못하는 정체적 형태도 있다.




후자는 취업이 매우 불규칙한 노동자집단, 이른바 불안정 노동자다. 그들의 특징은 최대한도의 노동시간과 최소한도의 임금이다. 오늘날 알바가 이런 형태의 전형일 것이다. 모녀는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알바 형태의 일을 하면서 정체적 과잉인구로서 ‘쓰다 버린 쪽박’(<전태일 평전>)으로 생계를 꾸려 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은 이런 지위에서조차 밀려났다. 어머니가 팔을 다치면서 상대적 과잉인구의 최하층인 구호빈민으로 전락한 것이다. 구호빈민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노령자, 산업의 희생자들인 장애자, 병자, 과부’ 등이다.




“구호빈민의 생산은 상대적 과잉인구의 생산에 포함돼 있으며, 전자의 필연성은 후자의 필연성에 포함돼 있다.”

“노동계급의 빈곤층과 산업예비군이 크면 클수록 공적구호의 대상이 되는 극빈자도 더욱 많아진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법칙이다.”

“빈민구호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생산적 비용에 속한다. 그러나 자본은 그 비용부담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의 어깨로부터 노동자계급과 소부르주아지의 어깨로 전가한다.”(이상 <자본론>)




이 과학적 비판처럼 자본은 대개 구호빈민의 구제를 가난하지만 인정 있는 일가친척이나 친지들에게 전가한다. 그런데 이 세 모녀의 경우에서 보듯이, 가난한 친척과 이웃의 구제를 받는 구호빈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 갈 독립심과 자긍심을 가진 노동자로서는 감수하기가 쉽지 않다. 이때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가 자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정부나 정치권력 이전에 자본 그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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