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위기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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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호 작성일10-11-30 00:00 조회75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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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위기와 전망.hwp (62.5K) 0회 다운로드 DATE : 2015-05-12 15: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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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의 위기와 전망
1) 들어가며: 노동운동 위기와 위기론
ㄱ) 위기와 ‘위기론’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자본이 위기에 시달리는 것처럼 노동 또한 위기에 시달리는 것이 타고난 운명이다. 자본은 자신의 확장에 한계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무한한 확장을 추구함으로 인해 시시때때로 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자본이 확장하지 못해서 위기에 처할 때 자본에 매여 있는 노동도 생존의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인가? 한국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노동운동이 하나의 힘으로 역사무대에 다시 등장하고 나서, 노동운동은 수시로 위기에 시달려 왔다. 공안합수부가 활개를 친 89년 상반기에 그러했으며, 전노협이 건설된 이후인 90~91년 동안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때의 위기는 자본과 정권(합쳐서 총자본)의 무단적 탄압 때문이었지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복잡하지 않았다. 열정과 의지로 돌파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 때 나온 슬로건이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였다.
그러나 90~91년간 현실 사회주의 체제들이 붕괴하면서 한국 노동운동 주위에서 위기론이 거론되기 시작했을 때, 문제는 그보다 조금 복잡했다. 운동의 주체들이 위기를 의식하기에 앞서 선각자(?)들이 위기론을 퍼뜨렸다. 변혁 전망이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굳은 노동운동가들이 전투적 조합주의를 고집함으로써 노동운동을 국민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노동운동이 이념상으로 너무 변혁적이거나 실천상으로 너무 전투적이어서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노동운동 위기론’을 퍼뜨렸다. 이들은 노동운동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전노협의 전투적·변혁적 운동노선을 청산해야 하며, 온건·합리적인 노동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부르주아 정권과 그 영향권 하에 있는 언론 및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아, 나아가 제국주의 국제노동운동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관철되었다. 그리하여 노동해방 대신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노동운동이 탄생했다.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김창우, “전노협 청산과 한국 노동운동”, 후마니타스, 2007; 한국노동연구원,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2001; “전노협백서”, 도서출판 전노협 등을 보시오.
그러나 고립 탈피를 추구한 민주노총 시대에 들어와서도 노동운동의 위기는 마감되지 못했다. 96~97 노동법 개정 총파업 때까지 비교적 순조롭게 전진하는 듯 했던 노동운동은 97~98년 IMF 사태를 맞이하면서 벽에 부딪쳤다. 준비 없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를 맞았던 것이다. ‘국가부도 위기’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자본의 거센 공격 앞에 온건·합리적 노동운동은 무력했다. 정리해고제를 내주어야 했고, 이렇게 정리해고제를 내준 데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분노로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이후 집행부를 교체했으나 현대자동차, 만도기계를 비롯한 여러 사업장에서 정리해고를 막지 못했고, 구조조정을 일방적으로 당했다. 이는 위기의 징후임이 분명했다. 전투적 노조주의를 밀어내고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온건·합리적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1998년 3월에 쓴 글에서 필자는 이미 이렇게 말했다: “공황이 닥치면서 거품이 빠져나가고 있다. 우리 노동운동에는 거품이 많았던 것 같다. 거품이 빠져나갈 때 얼룩과 때도 함께 빠져나가도록 하자. ... 지금은 진정한 위기이다.” ‘지금 민주노조운동은 진정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주간 정세동향> 1998.3.30
3) 하부영, ‘현장에서 바라보는 노동운동 위기론’ 2005.5.19 참조.
4) 신광영, ‘새로운 민주주의와 새로운 노동운동: 민주화, 세계화와 노사관계 구조변화, 2005.6.16; 김동춘,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 2005.6.16; 강수돌,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민주노동과 대안> 2005년 8월호; 노중기, ‘고도성장 이후 노동운동의 전략과 과제’ <경제와 사회>, 2006년 봄호 등을 참조.
하지만 한동안 ‘위기론’은 없었다. 실천가들은 물론이고 담론을 주도하는 지식인들이나 언론들도 위기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지지했던 온건·합리적 노동운동 패러다임이 실패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이때 이미 노동운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ㄴ) 노동운동의 위기는 해묵은 것이다.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했음을 사람들이 두말없이 인정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한참이 지난 2005년에 들어서였다. 이때쯤 대기업 노조들에서 비리 문제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2005년 초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몇몇 대기업에서 터져 나온 노조간부의 직원채용 비리는 노동운동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리고 2005년 하반기 민주노총 수석 부위원장이 사용자측으로부터 조직 활동비를 받은 사건이 터져 나오면서 다시금 지도부 총사퇴로 이어졌다. 이때가 되어서야 노동운동은 위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기의 초점은 아직 노조 간부의 도덕성 문제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2005년을 경과하면서 위기는 도덕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고, 노동운동이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존재 의의가 불신받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노동운동 안팎에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87년 노동체제’가 수명을 다했으며 모델 또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무성하게 터져 나왔다.
전투적 경제주의를 버리고 사회연대전략 - 정규직의 임금에서 일부를 떼어서 비정규직에게 보태 주자는 - 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출되었는가 하면, 기업별 노조체제가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산별노조로의 조직체제 전환이 만병통치약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사회연대전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산별체제로의 전환은 모든 정파들이 지지하는 가운데 추진, 성사되었다. 그 결과 2006년을 경과하면서 민주노총의 조직체제는 대부분 산별노조 체제로, 즉 정규직 노동자로 구성된 기업별 노조들의 산업별 단일체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깊어졌다. 산별체제로의 형식상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산업별 통일교섭은 드물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실행할 수 없는 상태로 무력화되었다. ‘무늬만 산별’, ‘뻥파업’이라는 자조적인 말들이 돌아다녔다.
위기는 비례대표 의원직을 둘러싼 정파 간의 패권 경쟁에 따른 2008년 초 민주노동당의 분당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조합원대중이 지도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말에는 민주노총 지도층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져 나옴으로써 노동운동, 특히 지도층의 도덕성 붕괴가 바닥을 드러냈다.
이처럼 2010년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는 바로 IMF 사태 이후의 위기의 연장이고, 위기론은 바로 2005년 이후의 노동운동 위기론의 연장이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래 묵은 것의 지속이며 중증으로 악화된 것이다.
2) 현 위기의 성격과 원인
ㄱ) 노동운동은 지금 존망의 위기를 맞고 있다.
2010년에 다시 노동운동 위기론이 거론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직접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노동에 대한 탄압이 전방위적으로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10년 정월 초하루에 국회에서 노동관계법을 단독으로 처리하여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타임오프제와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에 대한 교섭창구 단일화를 법제화했기 때문이다.
그에 더하여 공무원 노조에 대한 불법화와 공기업 노조들에 대한 선진화를 빙자한 단협해지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선례가 되어 2010년에는 민간 기업 노조에서도 단협해지 공세가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노동운동은 이제 역할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수준을 넘어서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사태를 그다지 심각하게 보지 않는 듯하다. 위기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만성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지난 1월 15일에 있은 민주노총 ‘노동법 개정과 노동운동의 대응 토론회’에서 나온 인식과 처방들을 보면 그렇다. “근로면제 심의위원회에 반드시 참여해서 여부를 다투는 게 이익이 많다”면서 전임자임금지급 금지에 대한 대책으로 “노조도 그 동안 회사에서 해 왔던 강당 대관이나 청소업무 같은 일을 맡는 것도 고려해 노조전임자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2010.1.19
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기존의 활동 내용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기술적으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앞서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은 ‘2010년 노동정세와 노동운동 방향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공통적으로 현재의 노동운동이 공장에 갇혀 기업의 지불능력을 근거로 임금과 고용투쟁에 안주해온 결과 힘이 약화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단시간에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렵다고 내다봤다. 또 “올해 전임자 문제로 기업별 논리와 행태가 강화되는 퇴행적 양상이 불거지기 쉽다”며, “민주노조운동이 기존의 기반을 보전한다면서 한 번 더 퇴행을 반복하고 복수노조 문제로 한 번 더 반복하면 이 정권과 보수 기득권층이 원하는 대로 실리주의 기업별 노조로 온전히 퇴행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보도로 볼 때, 금속노조의 경우 민주노총보다는 위기에 대한 인식이 다소 깊은 듯하다. 하지만 금속노조 역시 존망 수준의 위기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일부의 이야기이지만, “문제는 금속노조가 완성차 교섭에서 관장력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라는 진단과 “산별노조의 교섭에서 핵심적인 원칙은 조직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교섭을 조직적으로 관장하는 통제력과 제어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참세상> 2010.1.14 ‘금속노조 노동정세 운동방향 토론회’. 강조는 필자.
는 처방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독점 대사업장 정규직 노동자의 기업별 노조와 그 연합체들은 종래의 관성에 따라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주 40시간제 쟁취를 위한 노동시간 단축 투쟁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을 떠받치고 있는 대사업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각기 기업별 단협으로 근로조건 저하 없는 주 5일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면서 주 5일제 실시를 빙자한 근로기준법 상의 근로조건 개악(월차휴가 폐지, 생리휴가 무급화,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등)에 맞서 완강하게 투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기업별 단협에서 근로조건 개악을 일정하게 방어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과연 그 당시와 같이 기업별 단협으로써 법 개악으로 치고 들어오는 근로조건 개악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전임자 축소와 사업장 단위 교섭창구 단일화에다 기업별 교섭과 기업별 노조 강요(2012년 7월 1일 이후부터 산별노조도 기업별 창구단일화에 참여해야 한다.)와 근로조건 개악 공세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그에 저항하는 투쟁에 대해 쌍용자동차 탄압에서 보였던 무단적 탄압이 가해진다면, 독점대사업장에서 과연 노조 무력화를 막아낼 수 있을까? 경제대공황이라는 정세를 이용하여 대규모 구조조정 공세를 취하면서 그런 공격이 가해져 올 때 과연 대기업에서 민주노조가 얼마나 존립할 수 있을까? 냉정히 볼 때 낙관적 전망을 불허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위기는 대사업장 기업별 노조들의 관성적인 인식과는 달리 노동운동 존망의 위기임이 분명하다. 일본의 노동조합처럼 노동조합은 있으나 노동운동은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망의 위기인 것이다.
ㄴ) 위기의 결정적 원인은 노동운동의 개량주의다.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이든 금속노조든 현 위기를 존망의 위기로 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구조적 위기임을 직시하지 않고 있다. 구조적 위기란 무슨 의미인가? 자본과 노동의 불균형한 구조적 역관계로부터 생겨난 위기이며, 따라서 이 불균형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극복되기 어려운 위기라는 의미이다.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는 경기순환적인 위기가 아니다. “단시간 내에 극복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을 두고 노력하면 U자형의 상승을 그릴 수 있는” 그런 위기가 아니다. 공계진(금속노조 정책연구원장), ‘2010년 노동정세와 노동운동 방향 토론회’. 2010.1.13. <참세상> 기사 참조
지금의 위기는 노동운동의 존망이 걸린 강도 높은 위기인 동시에, 자기변혁이 없이는 L자형으로 침체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 자명한 구조적인 위기이다.
이번 위기는 왜 왔는가? 직접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동에 대한 공격이 반(反)노동적이고 무단적으로 가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삼척동자를 빼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위기의 원인은 단지 그 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에 맞서 가열차게 투쟁하면 처방이 될 것이다.
많은 논자들이 위기의 외부적 원인으로 정권과 자본의 노동운동을 무력화하는 공작과 탄압을 들고 있다. 하지만 자본과 정권이 왜 그와 같이 공작과 탄압을 자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있다. 지난번 철도파업으로 기억하게 되었듯이 노무현 정권 하에서도 철도노조에 대해 불법파업이라며 거액의 손해배상이 청구되었다. 또 노사관계선진화 로드맵이 관철되었고, 그 결과 필수 공익요원은 파업을 할 수 없게 하여 파업이라는 무기를 무력화시켰다. 이렇게 볼 때 이번 노동운동 위기는 직접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의 공작과 탄압에서 초래된 것이 분명하지만, 위기의 외부적 조건은 그 지점에 멈추지 않는다. 탄압은 지난 15년 간의 민주화 이행 정부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왜 한결같이 민주정부임을 표방하면서도 레이건과 대처처럼 반 노동 정책을 펼쳤는가? 거기에는 197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그것을 세계 노동자·민중에게 위기를 전가시켜 극복하고자 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한 것이 아니라 그 위기를 지속시키면서 더욱 심화시켰다. 이 모순이 일차로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로 터져 나왔고, 이어서 새천년 벽두의 IT거품 붕괴로 터져 나왔으며, 마침내 2008년 가을 월가의 붕괴와 경제대공황으로 터져 나오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동안의 민주화 이행 정부들의 반노동 정책이나 지금 이명박 정권의 노동에 대한 공작과 탄압이나 모두 이러한 경제위기 및 그 극복 기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위기는 이윤율 저하 경향과 그 상쇄 경향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이윤율이 저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양극화가 심화되어 자본의 과잉(착취된 이윤이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는)과 투자와 생산의 과잉(투자하고 생산한 것이 판매되지 못하는)을 낳는 데서 비롯된다. 이 때 자본가와 부르주아 정치권력은 자본의 대리인으로서 역할하지 않을 수 없다. 과잉자본에게 꿀이 흐르는 새로운 투자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4대강 사업을 벌여야 하고, 낮은 이윤율로 인해 기존 자본이 쓰러지지 않도록 고용과 임금 및 복지의 삭감을 무자비하게 실행하여 노동 착취도를 높이게끔 지원해야 한다. 그러한 정책이 사회양극화를 더 심화시켜 투자기회를 더욱 축소시키고, 투자와 생산의 과잉을 더욱 악화시키더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현재의 노동운동의 위기는 근원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구조적 위기에 빠졌고,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반동화의 길을 걸었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 30년간의 자본주의 황금기와는 전혀 다른 정세였다.
문제는 자본의 이러한 반동적 공세 대해 노동운동이 어떻게 맞서느냐다. 자본이 반동적 공격을 가할 때 노동자의 삶의 위기와 노동운동의 위기는 숙명인가? 노동운동이란 바로 그러한 자본의 공격에 맞서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실천이다.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노동자의 삶은 벼랑 끝으로 계속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사활을 걸고 싸우려면 그에 걸맞는 원대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 위기, 노동 위기 정세일수록 노동운동은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변혁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유야 어쨌든 민주노총 시대에 들어와서 이 해방과 변혁이라는 지표를 내버렸다. 그리하여 자본이 자신의 위기를 노동에게 전가하고자 반동적으로 나갈 때 해방과 변혁을 목표로 전투적으로 싸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이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끝간 데까지 몰아가고 있는 결정적 원인이다.
3) 위기 극복의 방도
작년에 노동운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토론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3월에 민주노총이 주최한 ‘민주노총 혁신 대토론회’였다. 그 토론회를 통해 좋은 방도들이 많이 이야기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그 때 이야기되었던 것들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이전의 관성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 좋은 혁신 방도들이 왜 실천되지 못하는지부터 밝혀져야 하겠다.
ㄱ) 관료와 정파가 아닌 현장 활동가들로 새 운동주체를 형성하자!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을 보면,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는 민주노총 내 이른바 5대 정파들은 대부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과 전망 - 노동운동 이념과 목표 정립”, “사회변혁을 위한 올바른 전략전술 수립”, “이념 정립과 변혁적(사회주의) 투쟁체 건설”, “강력한 이념적 정체성 확보”, “반자본의 전망으로 연대운동 복원” 등을 이야기했다. 대체로 이념과 전망의 부재나 개량성을 혁신해야 할 우선 과제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좋은 방도들이 지난 일 년 동안 활발하게 실천되지 못했는가?
으뜸가는 이유는 노조 관료들이 민주노총의 상층부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독점대사업장 노조 관료들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정파가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정파들 위에 있다. 때로는 이들이 정파를 만들고 이끈다. 이는 마치 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에서 노동조합 관료집단인 레기엔 일파가 사회민주당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 노동조합 관료들은 때로 정파의 과당경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 대안은 변혁적 노동계급 당파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무당파적으로 단합하는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이념의 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탈(脫)이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사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독일 노총(DGB)이나 일본의 렌고(聯合) 같은 1국 1노총이다. 이런 유일 대표자 지위로 변혁지향의 전투적 대중투쟁 없이도 자본의 파트너가 되어 자본과 함께 자본의 위기를 관리하면서 조직 노동자의 이익을 일정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면 변혁적 이념, 전망, 전략을 이야기한 정파들은 왜 움직이지 않는가? 정파의 대표들이 토론장에 나와서 당위로 이야기하는 것과 정파의 실제 생각 사이에 상당한 편차가 있고, 지도부의 생각과 하부 구성원들의 생각 사이에도 상당한 편차가 있기 때문이다. 정파들은 사실 정치적 이념과 전망, 전략 노선으로 결사하기보다 노동조합 권력을 둘러싸고 결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정파에 속한 성원들도 많은 경우 노동조합 관료들이나 비슷한 출세·권력 지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노동운동의 주요 정파들 모두가 개량주의 이념에 입각한 정파들이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관료들과 개량주의 정파들은 서로 상충하기보다 상호보완적이었다. 개량주의와 관료주의는 모두 대중의 수동화를 선호한다. 그 본보기가 해결사이다. 이런 가운데 노동운동의 위기가 한계점에 이르러, 일부 정파와 그 지도부들 중의 일부가 자신의 개량주의와 분파성을 반성하고 변혁적 당파성으로 거듭나려고 해도 관료화한 정파 성원들이 따라주지 않고 있다.
요컨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노동운동은 지난 15년 동안 이념적으로 계급성과 변혁성을 조금씩 거세하는 쪽으로 움직여 왔다. 정파와 관료가 융합된 지도부와 상층간부 수준에서는 그것이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운동을 혁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은 다른 경로를 통해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관료·정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제치고 이루어져야만 혁신은 성공할 수 있다. 상층으로부터가 아니라 기층으로부터, 정파성이 아니라 초정파적인 노동자계급 당파성으로,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방향에서 접근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 주체는 회전문 돌 듯 전임자 자리를 넘보는 노동조합관료가 아니라 현장 활동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도부 구성에서는 같은 사람이 돌아가면서 하는 것은 안 된다. 소위 회전문 인사인 셈이다. ... 지금은 단위노조부터 총연맹까지 ‘지도부’는 일종의 특수한 계층이 돼 있다. 한 번 올라오면 잘 현장으로 내려가질 않는다. 그것이 부패하고 관료화되고 병든 조직의 원인이다. 안에 있는 사람은 잘 모른다. 늘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보고 듣는 세상은 그곳뿐이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다 보니 권력화되고 기득권이 된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계속 발생한다.” 이상 이수호,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대토론회‘ 참고자료 중에서.
ㄴ) 산별체제로의 조직 전환이 아니라 계급적 산별노조를 원점에서 건설하자!.
다음으로 대표적인 혁신 방도인 산별노조 건설의 문제를 살펴보자. 2005년 위기론이 무성하던 당시 어느 노동운동 이론가는 이렇게 역설했다.
“노동운동이 그 조락의 운명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여전히 산별노조로의 전환뿐이다. 설사 로드맵에 따른 법 개정을 저지하고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복수노조 도입을 다시 유예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과 같은 최악의 노동 상황을 다시 몇 년 연장하는 수세적 대응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2006년 한 해, 한국의 노동조합들을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사활을 건 심정으로 전력을 기울여 산별노조 건설에 임해야 할 것이다.” “기업별노조 체제로 복수노조 상황을 맞을 경우, 노동조합은 최악의 상황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산별노조 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하는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교섭창구 단일화는 복수노조들에게는 격렬한 내부 경쟁의 상황을 조성할 것이지만, 산별노조로 전환하게 되면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기업단위의 교섭창구 단일화는 산별노조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영일, ‘미증유 위기냐, 절호의 기회냐’, <레디앙> 2006.3.31
그러나 이런 희망적인 예상과는 달리 2010년 1월 1일 새벽에 통과된 개악 노동법은 초기업단위 산업별 노조 역시 2012년 7월 1일부터 기업단위의 교섭창구 단일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도 산별노조로의 체제 전환이 만병통치약이 아님이 드러난다. 계급 역관계의 변화 없이 몇몇 기업별 노조들을 초기업적인 조직체로 형식만 바꾼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것은 기업별 노조들의 단일한 통제체제일 뿐이다. 통제를 단일체제로 전환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을 애초부터 초기업적(예컨대 원청과 하청 기업을 가로질러), 초직종적으로(예컨대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로질러) 광범위하게 조직해야 한다. 그것이 계급적 노조로서의 산별노조이다.
기업별 노조는 기업별 교섭과 투쟁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종업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생산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임금을 노동력 가치가 아니라 기업의 지불능력에 종속시킨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계급의식을 퇴화시키고 계급적 단결을 파편화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별노조를 극복하고 산업별 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일관된 과제이고 목표였다. 사실 기업별 노조(company union)란 계급적 노동조합이 조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본이 만든 어용노조로서, 독점자본의 반(反)노조 공세가 기승을 부리던 1920년대에 미국의 대기업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것이고, 미 군정이 반(反)노조법인 자국의 태프트-하틀리법을 이 땅에 이식하여 이 기업별 노조 체제를 뿌리내리게 했다. 미 군정은 1947년 5월 이른바 ‘노동부 방침’을 시달했는데, 그 안에 미국에서 태프트-하트리 법 제정으로 처음 도입되었던 노동조합의 부당노동행위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는가 하면, 단체교섭을 전평의 산업별, 직능별 의 기업횡단적 단체교섭을 요구를 배척하고 기업단위 교섭으로 한정시키는 조항과 “체결권한: 1 직장당 1 노동단체(해당 직장에서 과반수 이상의 종업원을 대표하는 단체)”라고 하여 배타적 교섭대표제를 강제하는 조항을 두고 있었다.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한국노동운동사 3 미군정기의 노동관계와 노동운동/1945~1948(박영기·김정한)’ 참조.
반면 산업별 노조는 초기업적으로 단결한 노조로서 요구와 교섭과 투쟁이 초기업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산업별 통일교섭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단결의 형식은 산업별이지만 요구, 교섭, 투쟁이 기업별로 이루어진다면 무늬만 산별이 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산업별 통일교섭을 관철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산별노조가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지역적 또는 전국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표성을 띠기 위해 해당 산업의 노동자 전체를 대변하여 요구하고 투쟁하면서 미조직 대중의 절대다수를 조합원으로 조직해야 한다. 이런 지속적 노력으로 해당 산업의 노동자들의 대부분을 지역적 또는 전국적으로 조직화했을 때 산별노조의 지역조직 및 전국조직 건설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표성을 가질 때, 그리고 전투적 통일투쟁으로 자본가 집단을 힘으로 강제할 때 비로소 사용자들은 해당 산업의 통일교섭과 협약에 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개념 없이 기업별 노조들을 산업별로 단일한 체제로 줄세우는 것은 대사업장 노동자들의 종업원으로서의 이익을 좀 더 잘 대표하고 대변하는 장치로 전락한다. 민주노총의 금속노조는 작년에 “15만이 함께 살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금속산업에 종사하는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거나 대표할 생각이 없이 기존 조합원의 이익만 대변·대표하겠다는 말이다. 이런 노조는 정확한 의미에서 산별노조가 아니고, 오히려 강화된 기업별 노조이다. 1960~70년대의 한국노총의 산별노조가 바로 이런 형태였는데, 이런 형태에 대해 당시 학계에서는 기업별 노조와 산별 노조의 단점(종업원 의식과 관료주의)만 합친 최악의 형태라고 혹평했었다.
그렇다면 결국 산업별 노동조합은 기업별노조의 조직 전환이 아니라 원점에서 새롭게 건설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초기업적인 정체성을 가진 조합원과 초기업적인 요구와 교섭대상 및 투쟁대상을 가지고 건설되어야 한다. 현존의 기업별 노조들은 이런 산업별 노조들이 만들어지도록 돕는 산파역이나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하며 이후 새로 만들어지는 산별 노조에 의해 흡수되어야 한다. 이남신 전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의 말처럼 “산별이 안 되는 이유도 출발이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하나로 시작하지 않으면 조직 전환으로는 그 정신이 살아나지 않는다.”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대토론회’ 참고자료. 2009.3.12
ㄷ) 막연한 변혁 이념이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하자!
이처럼 초기업적, 초직종적인 산업별 노동조합이 건설되려면 대중이 협소한 종업원 의식이나 직업 의식을 넘어 노동자계급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기업간 또는 직종·직급간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단결할 수 없다.
그런데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개량을 추구하는 가운데도 어느 정도 형성될 수 있으나,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개량이란 착취와 지배가 존속하면서 완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주의를 사회운행의 지배적 원리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기주의가 사람의 가치체계에서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연대를 외쳐도 결정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 날 때 특권적인 부분이 비특권적인 부분과 분열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독점대사업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뭉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이렇듯 차이를 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하려면 궁극적으로 착취와 지배 없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 있어서나, 지금 당장에 더불어 살기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나, 이기주의를 이타주의로 대체하는 가치관과 이념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이념이 무엇인가? 민주주의인가, 민족주의인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아무리 혁명적이더라도 제 스스로 이타주의를 원리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이타주의를 원리로 한다.
미국에서 산별노조가 기업별 노조의 산업별 단일체계로 퇴화함으로써 실리주의 노동운동으로 타락하고 조직률이 현저히 저하한 데 비해 2009년 현재 사상최저로 12.3%. 2008년에는 12.4%였다.
유럽 노동운동에서 교섭의 기업별 분권화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초기업적 교섭이 이루어지고 상대적으로 높은 조직률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미국의 노동자들 속에 사회주의 이념과 가치관이 부족한 반면 유럽의 노동자대중 속에 사회주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념 혁신의 핵심은 민주노총 시대에 들어와 포기했던 사회주의 이념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지형을 바꾸어 사회주의가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광범한 대중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활동가와 대중이 사회주의를 자기의 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계급적 산별노조를 발전시킬 수 없다. 변혁적 노동운동은 더욱 그렇다. 이 야만적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대체하지 않고는 조금도 변혁할 수 없다. 나로부터 이타주의로 변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바로 과학적이고 실천적인 이타주의이다.
4) 창조가 곧 전망이다.
오래 동안 개량주의에 젖어 있던 한국의 노동운동이 과연 사회주의 이념으로 자신을 변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계급적 산별노조를 건설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힘차게 벌일 수 있을까?
노동자 대중은 순리대로 발전하면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기 마련이며, 그 계급은 순리대로 발전하면 자본관계를 폐지하는 것을 지향한다. 계급을 형성하는 데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계급으로 뭉치는 것은 2백년 간에 걸친 서구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형성된 노동자계급이 자본-임노동 관계의 폐지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사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주체로 자기변혁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지점에 대해 실천을 떠나서 갑론을박하는 것은 스콜라적인 말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체의 논의를 접고 그저 실천으로 입증하면 되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추락했다. 유로코뮤니즘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공산당이 그 직후 좌익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데서도 그 충격을 엿볼 수 있다. 그런 나라들만큼 대중 속에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이 뿌리내리지 못했던 한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크게 퇴조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완전무결한 사회주의의 모습이 아니라 결점이 많은 사회주의였음을 인정하는 한, 그리고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한, 노동자계급 속에서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21세기 정세가 요구하는 바에 맞게 그것을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움직임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금년 4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차베스 대통령의 주도 아래 제5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창립될 예정이다. 여기에 중남미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정당 및 사회주의 운동단체들과 사회주의 지향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단체들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이 이런 시대적 흐름과 함께 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충분히 함께할 수 있다. 한국 노동자·민중의 핏줄 속에는 20세기 백년 동안 변혁운동을 이어온 선배 열사들의 가열찬 인간해방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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