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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없는 방 - 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삼성 백혈병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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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희 작성일12-11-30 00:00 조회7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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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없는 방]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삼성 백혈병의 진실)(10)

김성희 지음, 출판사 보리, 2012.04.21

 

  

 

  

 

‘삼성 공화국’이 침묵하는 백혈병 노동자들의 비밀!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와 인권 틀을 아울러 소개하는 「평화 발자국」 제10권 『먼지 없는 방』. 이 작품은 열아홉 살에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남편을 백혈병으로 잃은 정애정 씨의 이야기를 만화로 되살려 우리 사회의 비극을 밝혀내고 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삼성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정애정은 그곳에서 남편 황민웅을 만난다. 하지만 신혼의 행복을 맛 볼 틈도 없이 남편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다. 남편을 잃고 홀로 두 자식을 키워가던 정애정은 남편의 죽음이 반도체 공장의 근무 환경 때문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때부터 정애정은 남편이 죽은 진짜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용기를 내고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에 걸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 반도체 공장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현장 근로자들에 대한 이해와 연대를 구한다.

 

  

 저자 김성희

저서 (총 4권)대학신문사에 만평을 그린 것을 계기로 만화를 시작했다. 작가들의 독립적인 만화 발표장을 모색하기 위해 만화지 '살북Salbook'을 창간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인터넷 신문 '컬처뉴스'에 '김성희의 페이지'를 연재하였고, '황해문화', '계간 판타스틱'에 단편 발표,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뚝딱뚝딱 인권 짓기'를 연재하였다. 책으로는 만화집 '내가 살던 용산'(공저)이 있으며, MBC 희망특강 파랑새를 책으로 엮은 '꿈꾸라'에 삽화를 그렸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전문사)에서 공부하며, 만화를 만들고 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며, 사랑하기 위해 살아간다.

 

  
 

 

목차

 

먼지 없는 방
부록_반도체산업 바로 보기
작가의 말
전자산업 직업병 현황
반도체 공정 용어

 


 
이어서 [매일노동뉴스]에 소개된 정애정씨 인터뷰 기사와 [한겨레]에 소개된 김성희 씨 기사를 옮겨 싣습니다.

 


1. [삼성 백혈병 피해자 가족 정애정씨] 두 아이 엄마, 삼성에 맞서 투사로 거듭나다

 




매일노동뉴스, 2012.7.29, 한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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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순간이 응급상황이었다." 남편의 암 투병시절 얘기를 전하던 정애정씨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정기훈 기자

 

 

지난해 7월 장대비가 내리던 밤,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공단 이사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였던 이들이 농성장에서 쫓겨난 것에 항의를 하는 소리였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의 산업재해를 인정한 그해 6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에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겠다고 밝히자 분노한 유족과 피해자들이 공단으로 몰려간 것이다. 정애정(34·사진)씨는 공단 앞마당에 주저앉아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정씨는 공단 직원들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쫓겨난 이들을 비웃는 것을 보고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정씨는 스물아홉살 젊디젊은 시절,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 황민웅씨를 급성 림프구성백혈병으로 떠나보냈다. 올해 여덟살이 된 둘째를 뱃속에 둔 채 9개월 동안 남편을 간병했다. 너무 힘들어 매일 눈물을 흘렸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부른 배를 안고 그렇게 힘들게 돌봤지만 남편은 골수이식 수술을 보름 남기고 숨을 거뒀다. 2005년 7월23일이었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2살이던 큰아이는 똘똘해 보이는 안경잡이 초등 3년생이 됐고, 뱃속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로 자랐다. 그 사이 엄마 정씨는 투사가 됐다. 지난 27일 <매일노동뉴스>가 정애정씨를 경기도 시흥시 그의 집에서 만났다.

정씨는 삼성전자에서 11년을 일했다. 7년을 일한 남편 황씨보다 빨리 입사했다. 군산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꿈의 공장’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삼성을 목표를 삼았다. 열아홉 살에 만난 세상은 온통 새것이었다. 정씨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도, 걱정도 있는 반면에 진짜 독립하는 것 같은, 어른스러운 것 같은 느낌이 겹쳤다”며 “설레었다”고 말했다. 노트에 날짜를 적어 가며 카운트다운하듯이 떠날 날짜를 셌다.

그런데 입사하기 전 삼성과 이후 삼성은 달랐다. 라인에 투입되고 나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배울 것, 익힐 것이 넘쳤다. 영어로 표기된 반도체용어는 의학용어처럼 어려웠다. 공구 하나, 작업매뉴얼까지 영어였다. 몰라도 아는 척하는 일이 많았다. 사수 언니한테 혼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당시는 작업자들이 신입사원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구를 돌볼 겨를이 있을 리 만무했다.

“95년에 입사했는데 생산물량이 가장 많을 때였어요. 디램을 만들기만 하면 팔렸죠. 사수도 바쁘고 나도 눈치 안 보려면 내 몫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작업절차를 익히느라 호기심이나 다른 의문점은 언감생심 물어볼 수나 있었겠어요?”

입사한 지 3년 만에 닥친 외환위기는 회사를 더욱 삭막하게 만들어 버렸다. 교대근무가 상의 없이 수시로 바뀌었다. 4조3교대 근무는 4조2교대가 됐다가 다시 3조3교대로 변경됐다.

“야간근무가 진짜 힘들 거든요. 보통 6일 일하고 이틀 쉬어야 하는데, 맞교대를 할 때는 야간근무를 열흘 하고 하루 쉽니다. 다음날 아침근무 들어가는데 그러면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출근하게 돼요. 처음에는 몇 개월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1년을 했어요. 원래 협상을 하는 줄은 전혀 몰랐죠. 시간외 근무도 특근도 하라고 하면 하는 겁니다. 일개 사원이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노조도 산재도 몰랐다. 남편이 백혈병으로 쓰러졌는데도, 정씨는 단 한 번도 업무 때문에 병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편과 결혼해 3년을 살았고, 죽은 뒤 5년을 싸운 그의 얘기는 이렇다.

- 기흥공장에서 백혈병이 많이 발생했다. 그런 조짐이 있었나.


“애기아빠가 그렇게 되기 전에는 몰랐다. 누가 아파서 병원을 가는지, 산재를 내는지 몰랐다. 산재라는 용어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생리불순이라든지 하혈, 코피 흘리는 것을 늘 봐 왔다. 그걸 환경이나 직업병으로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혈을 해도 창피하다고만 생각했다. 남자 선배들 보면 부끄러우니까. 가리고 없애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런 게 조짐인데. 지금 생각하면 생리가 불순하고 열나고 식은땀 나서 힘들다며 나간 애들은 그나마 다행인 거다.”

- 반도체 공장에서 쓰는 화학약품이 100종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사원들은 ‘클린(clean) 용액’을 자주 쓴다. 냄새도 비슷하고 휘발성에 벤젠성분이 있는 것 같다. 성분을 분석하고 나서 청소하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싸우면서 알았는데 우리가 쓴 것이 100% 원액이거나 비슷한 농도였다. 공정을 구분하기 위해 조립식 패널로 칸막이가 쳐져 있다. 그런데 청소를 하려고 나무를 닦으면 색이 변하면서 하얗게 일어났다. 한 달에 한 번을 ‘클린의 날’로 정해 청소를 했는데 파티클(미세먼지) 인다고 나중에는 중단했다. 용액은 작업자들이 수시로 가져다 쓴다. 열쇠도 없고 관리자도 없다. 벤젠성분이 들어갔다는 감광액도 여사원들이 가져다가 액을 체인지했다. 서비스 에어리어에 약품을 넣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가져다 넣으면 된다. 여사원들이 항아리 같이 생긴 용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한다. 빛에 노출되면 안 되니까. 겉은 검은 항암제처럼 갈색으로 돼 있다.”

최근 정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만화책 <먼지 없는 방>이 출간됐다. <먼지 없는 방>은 반도체 공장을 뜻한다. 반도체는 미세먼지에 취약하다. 때문에 먼지나 분진을 없애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먼지가 난다며 ‘똑딱이 볼펜’ 사용을 금지할 정도다. 공장 안에는 특수한 배기시스템이 가동된다. 작업자들은 공정 곳곳을 청소한다. 청소에 쓰는 용액은 반도체 공정에서 쓰는 화학물질의 극히 일부분이다.

- 남편이 아플 당시에는 산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때는 산재 직업병 생각을 못했다. 여유도 없었다. 아프다고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해서 갔더니 백혈병이라고 해서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나도 휴직처리하고 병원비 구하러 다녀야 했다. 주위에서 알려 주지도 않았다. 죽고 나서는 서류정리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서류를 정리하고 나니 휴직날짜 끝나서 바로 복직했다. 그런데 교대근무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교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1년 과정이었다. 교대근무를 하며 하루 3~4시간 자면서 일했다. 오로지 애들하고 어떻게 살지 그 생각만 했다. 애들을 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잠을 못자 힘들었지 내 처지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그때는 애기아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출장을 갔다고 생각했다. 해외출장 2년 갔다고 생각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엄마 노릇을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살았다.”

- 남편의 병이 직업병일 수 있다는 것을 언제 알았나.


“고 황유미씨의 아버님이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이 2007년 말이다. 어느 날 애기아빠 동료한테서 전화가 왔다. 일하다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소문이 회사에 돈다며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보라고 했다. 얼토당토않게 느꼈다. 전화를 짧게 하고 끊었는데 며칠 동안 잠이 안 왔다. 알아보고 다산인권센터에 연락해 활동가들을 만났다. 내가 황상기씨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분들도 반도체 현장을 몰랐다. 내가 2시간 넘게 얘기를 했다. 한동안 내가 해 줄 얘기가 더 많았다. 얘기하다 보니 생각이 정리됐다. 인터뷰도 하고 이러면서 천천히 생각이 정리됐다. 10년 동안 일하면서 겪은 일이 우연이 아니구나, 애기아빠도 일하다 병을 얻을 수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 남편은 어떤 라인에서 일했나.


“5라인과 1라인에서 일했다. 나와 애기아빠는 5라인에서 만났다. 5라인에 있다가 얼마 안 돼 1라인으로 갔다. 셋업(set-up) 멤버였다. 정상가동할 수 있게 라인을 정비하는 일을 했다. 화학약품을 다루는 설비이다 보니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회사는 셋업 기간을 한 달로 잡는데, 작업자들의 말은 달랐다.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데만 몇 개월이 걸렸다. 이 일을 1년6개월 정도했다. 5라인에서도 애기아빠가 했던 공정은 신설라인이었다. 설비가 불안정하니까 정상가동이 안 됐다. 애기아빠 같은 엔지니어들은 설비를 열고 화학약품 근처까지 가서 고쳐야 한다. 사측은 설비 엔지니어 작업을 고상하게 얘기한다. 삼성은 처음에 근로복지공단에 의견서를 접수할 때만 해도 엔지니어들이 6시간은 라인에서 일하고 2시간은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 2월 고용노동부에서 설비엔지니어든 뭐든 공간에 상관없이 라인 안은 다 위험하다고 발표했다. 삼성이 곤란해진 것이다. 공정도 분리를 못하고, 작업도 분리를 못하겠고 하니까 라인에서 쫓아냈다. 추가진술서를 낸 것을 보면 8시간 내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모니터에 설비에러 표시가 되면 간헐적으로 라인에 투입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 5년 동안 삼성에 대항해 싸운 셈인데.


“이런 방향으로 싸운 사람도, 방어하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존 틀에 짜 맞추려고 했다. ‘기준이 없다, 제도가 없다’ 이런 식으로만 얘기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고, 반도체 산업과 백혈병을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례적인 일을 많이 했다. 개인별 역학조사도 했다. 1박2일 항의농성을 하고 역학조사 결과를 받았는데 5장짜리였다. 그런데 삼성에서 받은 애기아빠 신상만 실려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도체 역학조사라는 게 뻔했다. 통계라는 게 숫자놀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집단을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수치가 달라지는데 역학조사에서는 정상적인 매뉴얼로 작업했을 때를 가정한 뒤 결론을 내렸다.”

- 당신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한이다. 한을 풀고 싶다.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요새는 삼성의 부조리를 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학대하는 것, 우습게 아는 것, 돈으로 이 나라 망가뜨리고 있는 것, 정권까지 휘어잡는 것, 환경까지 파괴하는 것은 부조리다.”

- 국회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어떻게 전망하나.


“산재 인정이 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되면 좋고 안 되도 어쩔 수 없다. 산재 인정은 절차상의 것이다. 대법원에서 졌다고 애기아빠가 직업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직업병이라고 하지 않나. 애기아빠가 직업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리려고 법정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재 인정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과는 있다. 삼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바로 보려는 사람들의 시선이 생겼다. 그러니까 국회가 나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론도 관심을 갖고 있다. 노동자들도 많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성에버랜드 외에도 다른 계열사에서 힘을 많이 받고 있다. 백혈병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삼성이 보기보다 완벽한 성벽이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우리의 권리를 세우려면 노조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느낀다. 조만간 어떤 성과가 있을 것이다.”

정씨는 최근 큰아이에게서 놀라운 질문을 들었다. “아빠가 삼성에서 일하다 죽었어요? 백혈병이 뭐예요? 왜 삼성에서 그렇게 많이 죽어요?” 구체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정씨는 한 번도 남편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노조가 없어서 그래”하고 답하니 돌아오는 질문이 가관이다. “노조를 왜 못 만들게 해요? 이명박 대통령은 가만히 있어요?” 그는 아이의 상식적인 질문에 당황했다고 한다. 19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삼성백혈병 문제를 다룰 소위 구성을 놓고 여야가 논의를 벌이고 있다. 국회가 아이의 상식적인 질문에 답할 때가 된 듯하다.

 

  

 

2. "나만 망할지도 몰라 두달이나 고민했어요"

 

한겨레, 2012.8.17,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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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는 어른이면서도 아이이고, 아이면서도 어른일 수 있어요.”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씨는 어릴 적 자신의 기억을 반추했다.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는 노력이 없으면 “유치하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삼성 백혈병’ 그린 김성희 만화가

 

<먼지 없는 방>은 참 묘한 만화입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민웅씨 사건이 중심에 놓여 있지만, 이야기의 화자는 황씨가 아니라 그의 아내 정애정씨입니다. 군산여상 3학년 때 삼성 반도체 공장에 취업해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결국 그곳에서 남편을 잃은 애정씨의 눈으로 반도체 산업이 청정산업이 아니라 실은 화학물질로 가득 찬 위험 산업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작가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사람’ 애정씨만을 향합니다. 작가 김성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백오십여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이기에,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로 가까이 생각해 주길 소망하며 이 책을 만들었다.”

 

 

 ‘한 사람’을 가족처럼 소중히 여기는 작가의 시선에 이끌려 김성희의 전작 <몹쓸 년>도 찾아 읽었습니다. <몹쓸 년>은 박재동 화백의 추천사처럼 “기승전결도 굳이 없이 삼십대 미혼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을 마치 싱크대 앞 도마 위에 저녁거리 고등어를 툭 반 토막 내어놓은 것처럼 그냥 보여준” 만화였습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성희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싱싱한 ‘날것’의 느낌이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구구한 설명 없이 그저 감정의 선을 따라서 툭툭 던지는 이야기도 은근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설득력 있으면 모두 공감’
자신감으로 ‘먼지없는 방’ 작업
작가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남편 잃은
애정씨 오직 한 사람만 향해

 

 

 

 

 

“만화 실을 지면도 없어
‘투잡’ 뛰며 무명으로 10년
아웃사이더 한번 해보세요
어느 순간 확 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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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만화가

 

  

 

 

옥탑방에서 낮엔 만화, 저녁엔 조카 봐주기

 

 

 

-오늘은 무슨 일을 하다가 오셨어요?

 

 

“동생이 석 달 전 둘째를 낳아서 육아휴직을 하고 모유 수유를 하고 있어요. 세살 된 첫째 아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매일 저녁 7시 이후에는 제가 조카를 봐요. 오늘은 어린이집이 방학이라서 오전에 조카를 데리고 옥수역의 물분수대를 구경했어요. 분수를 보면 애가 ‘물이 자란다’고 엄청 좋아하거든요.”

 

  

 

 

 

-동생네와 함께 살고 있군요?

 

 

“1층에는 부모님이, 2층에는 동생네가 살고, 저는 옥탑방에 살아요. 금호동 산비탈에 있는 조그만 집이라 1층이 곧 반지하인 구조죠. 얼마 전까지는 애니메이션 센터, 정독도서관, 한예종 작업실, 보리출판사 등에서 작업을 했는데, 요즘은 옥탑방에서 주로 일해요. 에어컨이 없어서 좀 더워요.”

 

 

 

 

 

-낮에 일하고 밤에 조카를 보면 언제 쉬세요?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찜질방을 가죠. 잠을 혼자 자고 싶어서. 같은 집에 있으면 동생에게 미안해서 쉴 수가 없어요. 차라리 찜질방이 편한.(웃음) 육아 때문에 친구들과는 놀 수가 없어요.”

 

 

 

-삼성 문제를 다루자는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보리출판사의 윤구병 선생님이 2년 전에 저하고 김수박 작가를 불러 삼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하셨어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온 때였죠. 저희에게 알아서 취재해 보라고 하셨어요. 저희는 삼성 백혈병이 가장 심각하면서 보통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얘기라고 말씀드렸고요.”

 

 

 

-정애정씨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저는 처음부터 애정씨에게 마음이 갔어요. 애정씨는 제 동생과 같은 나이예요. 동생처럼 애정씨도 집안의 막내이고, 두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저는 세상의 막내 동생은 어떤 어려움도 겪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요. 동생을 둔 언니·오빠들만 공감할 수 있는, 비논리적인 감정이죠.”

 

  

 

 

 

-<사람 냄새>의 김수박 작가는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주인공으로 삼았죠. 두 작가가 모두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이유가 있나요? 

 

 

“언론사에서 다 취재해 놓은 것,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내부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가 만화를 그릴 수는 없잖아요. 저희가 직접 취재해서 그려야 하는데, 삼성이 배타적이어서 탐사 보도가 어려웠어요. 결국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아야 했고, 김수박씨는 아이를 가진 입장이라 아버지인 황상기씨에게, 저는 동생 같은 정애정씨에게 마음이 갔던 거죠.”

 

  

 

 

 

-아예 김용철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삼았으면 어땠을까요? 

 

 

“저희는 삼성의 상류층 이야기가 아니라 삼성의 구조에 눌린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삼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도 그들의 목소리로 전하고 싶었죠.”

 

  

 

 

 

-<먼지 없는 방>에는 반도체 공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지루해하는 독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복잡하고 위험한 반도체 공정에 대해서는 애정씨도 처음 입사해서 30분 정도 배운 게 전부예요. 자기가 다루는 설비만 해도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전체 공정은 곧 잊어버렸죠. 남편이 죽고 소송을 하면서 비로소 클린룸이 유해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돼요. 저는 독자들도 애정씨와 똑같은 경험을 하기를 원했어요. 처음에는 어려워서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애정씨의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앞부분을 다시 찾아서 읽었다는 독자들도 많아요. 여고 3학년 때 취업한 19살 친구들이 복잡한 공정을 배우며 ‘이걸 다 읽으라는 거야?’ 하고 느꼈을 버거움을 독자들도 똑같이 느끼는 거죠.”

 

  

 

 

 

-거대 기업에 맞서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나요? 

 

 

“윤구병 선생님은 살 만큼 살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시던데, 저희는 아직 한창 나이잖아요. 생각 좀 해 보겠다고 하고 두 달을 고민했어요. 삼성 얘기를 그렸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나만 망하고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설득력 있게만 그려낸다면 고립되지는 않을 거다, 있는 그대로만 보여줘도 다들 공감할 거다, 이런 자신감을 확인하는 데 두 달이 걸린 거죠.”

 

 

 

 

 

-책이 나오고 삼성의 반응은?

 

 

“절대 삼성은 반응 없고요.(웃음) 광고에서만 어려움을 겪었죠. 진보매체도 광고를 안 실어줬거든요.”

 

 

   

 

 

‘몹쓸년’의 생활, 막노동 아빠의 소원

 

 

 

1975년생 김성희는 <몹쓸 년>의 주인공처럼 인문계 고교에서 취업반으로 옮기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엄마에게 혼나고 청소년 쉼터로 가출한 경험이 있습니다. 제빵 기술을 배운 뒤 고교 3학년 때는 샤니에 취업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열심히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건만 공장의 아저씨들은 그를 “그저 그런 공순이”로만 취급했습니다.

 

 

6개월 만에 첫 휴가를 받고 집에 누워 있다가 “좀 놀아야겠다, 놀 수 있는 곳은 대학밖에 없겠다 싶어” 대학에 진학했고, “어려서부터 소리 나는 대로 글을 쓰는 습관 때문에 넘쳐나던 오자를 줄여보고자” 대학신문사 기자가 되었습니다. 대학신문에서는 엉뚱하게도 만평을 맡았는데 선배들에게 매일 혼나면서 생전 처음 “만평만 아니라면, 좋아하는 만화에 10년쯤 노력을 기울여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화에 입문해 무명으로 10년 이상을 지내는 동안에는 늘 “투잡 이상을 뛰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계간지 정기구독자 확보, 전단지 붙이기, 호빵 공장, 아이스크림 공장, 식당, 커피숍 등에서 웬만한 ‘알바’는 모두 경험했습니다. 2년간의 특수학급 보조원 생활이 가장 긴 직업이었는데, “수준이 똑같아서 애들과 잘 놀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두 달 정도 일해서 돈이 모이면 만화를 그리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보고 “만화 그만두고 시집가면 안 되겠니?”라고 묻곤 하셨습니다.

 

 

“아빠는 늘 ‘의자에 앉는 직업을 가지라’고 하셨어요. 평생 막노동을 하셨고 지금은 영풍문고에서 청소를 하세요. 제 책도 영풍문고에서 직접 사서 엄마와 함께 보셨어요. 오빠는 경찰, 저는 만화가, 동생은 공무원이니 다들 의자에 앉는 직업이기는 하죠.(웃음) 엄마는 피터팬의 웬디 같은 여자예요. 남을 돌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러나 돌봄을 받지는 못한, 그래서 조금 악에 받쳐 있는 분이죠. 오빠나 동생네 애들도 모두 엄마가 키우셨거든요. (잠깐 울먹) 엄마는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우리를 각자 자기 가치관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어요. 엄마가 그런 식으로 투자해서 내가 엄마랑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됐으니, 엄마랑 싸우더라도 내 고집을 관철하는 게 효도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만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왕따를 당했어요. 어느 날 여자애들 7~8명이 뒷산으로 저를 부르더니 ‘이제부터 널 때리겠다’고 하더군요. ‘왜 때리는데?’ 물으니 자기들끼리 뒤에 가서 회의를 하고는 ‘넌 말이 없어서’라고 대답했어요. 걔네들한테 맞고 나니까 갑자기 세상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 후로 말도 많아졌어요. 그러나 말을 않던 애가 말을 많이 한다는 건, 그저 말 잘하는 애를 흉내 내는 거예요. 말을 뱉어도 관계나 상황에 맞지를 않으니 더 왕따가 되죠. 그때 저를 왕따 시킨 애들이 교회 친구들이라, 교회 안 가려고 찾은 게 만화방이었어요.”

 

  

 

 

 

 -왕따 경험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오랜 시간을 거쳐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말을 적절히 하는 법을 터득했어요. 저를 때렸던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도 그때쯤이에요. 저쪽 끝에서 그 친구가 걸어오는데 서서히 긴장감이 쌓이다가 서로를 외면하지는 못하고…. 그런데 그 친구가 나를 때린 걸 기억하는 눈빛으로 살짝 웃으면서 지나갔어요. 폭력의 대상이었던 나를 기억하고 겸연쩍어하면서 미안해하는 눈빛. 그게 참 따뜻했어요. 그때 감정이 많이 풀렸어요.”

 

 

<몹쓸 년>은 자전적 만화이지만 시간적 순서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감정의 결을 따라서 이야기가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생략되어 때로는 불친절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각 장을 덮을 때면 묘하게도 작가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는 가족관계와, “이대로 팔려갈 수는 없다”는 30대 여성의 흔들리는 일상이, 만화에 자주 내리는 비처럼 독자의 마음을 적십니다.

 

 

“저는 기억의 감정을 풀어낸 순서대로 작업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왕따 사건을 20년 동안 반복적으로 저 자신에게 납득시켜온 것과 같은 작업이죠.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내가 아파했던 부분, 쉽게 넘어가지 않는 부분만 기억에 남아요. 그렇게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 고리로 연결되어 서사가 되는 거예요. 그보다 완벽한 서사가 없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김 작가의 만화를 읽다 보면 “꼭 누구마냥 확 꺼지네. 가스 냄새만 퍼뜨리고”처럼 뜬금없이 툭 한마디를 던질 때가 많습니다. 독자보다는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데요. 

 

 

“제 만화의 독자는 딱 한 명이에요. 한 명의 독자에게 말을 걸고 제 감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편지와 같아요. 늘 그렇게 작업해 왔어요. 그게 책으로 나오면 독자가 확장될 뿐이죠. 물론 그렇게 감정을 나누는 대상이 확 사라지기도 해요. 믿었던 사랑이 확 꺼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꺼지는 게 사랑의 속성이더라도, 계속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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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총장 가슴 불붙인 텐트시위의 주역

 

 

 

 

 

-요즘 넘쳐나는 멘토들은 흔히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라”고 하잖아요. 만화가야말로 그런 선택일 수 있는데,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지 않나요? 

 

 

“만화를 시작하고 2년쯤 지나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서 만화의 진짜 맛을 알게 됐어요. 걔한테 감정을 말해주려고 그림을 그리는 게 행복하고 좋았죠. 멘토들 얘기는 살짝 어이가 없어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처음부터 아는 애가 어디 있어요? 경험해 봐야 뭘 좋아하는지 알죠. 어떤 직업이라도 그걸 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기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저는 한 달에 15만원으로도 살고 100만원으로도 살아요. 자기 직업의 특징을 알고 선택한 이상 투정 부리는 건 유치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삶이 너무 불안정하지 않도록 의료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은 확보해 줬으면 좋겠어요.”

 

 

 

 

 

-만화가로 10년 이상 일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전문사 과정에 입학했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은 지역주민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친구들 열쇠를 빌려서 한예종 도서관을 작업실로 삼았어요.(웃음) 그런데 고지식한 도서관 아저씨가 계속 쫓아내셨어요. 실어줄 지면도 찾기 어려운 아웃사이더인데 그렇게 쫓겨나다 보니 우울해지더군요. 그래도 그 줄다리기하면서 1년 반을 다녔어요. 아웃사이더 한번 해보세요. 어느 순간 확 돌아요. 당당히 도서관을 이용할 테다!(웃음) 원서를 넣고 합격한 뒤에는 ‘아저씨 때문에 대학원 들어갔다’고 커피도 뽑아드렸죠.”

 

 

2009년 한예종에서는 황지우 총장이 사표를 쓰고 시간강사 위촉까지 취소되자 학생 한 명이 황 교수의 강의를 듣고 싶다며 일인 텐트 농성을 시작했고, 동조하는 텐트가 하나둘 늘어 나중에는 작은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박재동 화백에 따르면, 그 한 명의 학생이 바로 김성희였다고 합니다.

 

 

“<내가 살던 용산>을 작업하던 때였는데 제가 듣고 싶었던 선생님들 수업이 다 없어지는 거예요. 첫 학기 때는 학부생들이 맞서 싸웠지만, 두번째 학기가 되자 과제 등에 쫓겨 동력이 확 떨어졌죠. 화도 나고, 마감에는 쫓기고, 결국 1인용 텐트를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거기 살면서 작업을 했어요. 비상대책위원회나 다른 과 애들이 바닥을 깔고 전등도 연결해줬는데, 한잔하고 놀다가 재미있었는지 하나씩 텐트가 늘더군요. 오자가 많은 대자보를 제가 붙이니, 다른 애들도 따라서 대자보를 붙이고, 인터넷에는 매일 일기를 썼죠. 나중에 황지우 선생님을 뵈니 ‘나의 가슴에 불을 붙여줬다’고 하시는데,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웃음)”

 

 

 

-여전히 결혼에 대한 압박이 많죠? 

 

 

“동생이나 친구들을 보면 사회적 생존방식으로 결혼만큼 합리적인 게 없어요. 그러나 감정의 생존방식으로는 결혼이 결론이 아닐 수 있겠더라고요. 감정이란 불안할 때 움직이기 마련인데, 결혼은 안정적이니까 부딪힘이 없어 운동성이 떨어지기 쉽죠. (책상에 얼굴을 묻으면서) 저는 이렇게 자꾸 관찰자로만 살아요.(웃음)”

 

 

 

김성희는 “날것은 요리된 것보다 빨리 썩고, 썩었을 때 더 냄새가 난다. 그걸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날것처럼 살아있으면서도 날것의 위험성을 아는 관찰자였습니다. 어린 시절 말 때문에 왕따가 되었던 김성희는 오랜 세월 아주 천천히 자신만의 언어세계를 구축하면서 말 대신 그림으로 내면을 표현하는 만화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넘어 이제는 애정씨 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그려냅니다. 남보다 늦게 배운 말, 여전히 오자가 많은 글, 감정의 결을 따라가는 그림으로 침묵하는 세상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외면하는 거대 담론에 피로를 느껴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시대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오직 ‘한 사람’에게 주목하는 김성희의 방식이 어쩌면 그 닫힌 문을 여는 새로운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관측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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