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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본소득이론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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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채언 작성일10-11-30 00:00 조회8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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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기본소득이론 소고


                                                                      이채언(전남대)

 
  기본소득이론이 한때 오가는 술자리의 한담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사회당의 공식강령으로 채택되었는가 하면 교수노조의 3대 정책과제의 하나로도 되었고 또 인권운동 사랑방, 장애인 운동,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노총, 민주노동자연대, 자율주의운동 등이 기본소득운동의 주체로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담이 됐다는 얘기처럼 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다. 곽노원 교수는 이 운동이 “지금까지 진보운동이 경험하지 못한 최대다수의 진보적인 연대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까지 장담한다. 그 이유는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등의 나라만 하더라도 불과 5년 전만 해도 인구의 99%에게 생소했던 기본소득이 이제 인구의 90% 이상에게 알려지고 그들 중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제로, 그리하여 실행가능성이 높은 사회적 요구로 변화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인구의 절대다수만 지지하면 뭐든지 실현될 수 있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아무리 절대다수가 지지하더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잘못임을 밝히고 설득해야 한다. 거기에 편승해서 같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에 기생하는 무리의 일원에 불과할 것이다.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에 대해 중과세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면 우선은 모두 다 찬성할 수가 있다. 현재처럼 투기를 조장하고 불로소득을 자랑하는 풍토를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세금이라도 매겨 일반시민의 기본소득으로 돌려준다면 당연히 훨씬 낫지 않겠는가? 한나라당이 그런 안을 제시하면 일단 찬성이라도 하겠지만 소위 진보랍시고 간판을 내건 단체나 인사가 그런 주장을 하게 되면 진보운동을 코미디로 전락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연한 청년실업과 사회양극화는 바로 토지와 금융자본의 투기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다.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해 토지 및 금융자본의 투기활동에 대해 세금을 징수하면 투기활동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다.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의 발생 메커니즘을 근절하기보다는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의 일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자는 일지매 같은 생각이 과연 진보일까?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우선 그것이 과연 실현가능한 것인가부터 따져보자.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에 과세를 하면 외국금융자본들이 악화된 투자환경을 이유로 한국에서 철수할 것이다. 그리되면 금융시장은 우리나라는 국민경제의 기초가 빈약하기 때문에 대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그런 기회에 위축된 금융시장을 대대적으로 개혁해서 외국자본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길을 강구하겠지만 일지매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정부라면 자기들 원래의 기본소득 프로젝트에서 후퇴하여 기본소득의 수준을 대폭 낮추거나 기본소득의 대상을 극빈층에 한정시킬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세금 대신 다른 방식으로 금융자본의 수익을 보장해주거나 다른 명목으로 수익을 보조해줄 것이다. 한편으로는 서민대중을 위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경제를 골병들게 만드는 제2의, 제3의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한 셈이 될 것이다.
  환경세나 생태관련조세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정도로 높은 세금을 매긴다면 기업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환경훼손을 감행할 것이고 높아진 환경세를 제품가격을 올려 충당할 것이다. 당연히 국제경쟁력이 하락할 것이고 그 때문에 고용도 더 축소될 것이다. 조세수입이 줄어들면 세율을 올리거나 원래의 프로젝트를 후퇴시켜야 할 것이다. 주조차익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조차익으로 교육기반, 의료기반, 산업기반을 확충하는데 사용하면 고용증대에 기여하겠지만 당장의 소비를 위해 국민 각자가 기본소득으로 나누어가지면 생산보다 소비가 더 빨리 늘어나고 그에 따라 수입품의 소비만 늘어날 것이다.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일자리인가, 아니면 소비할 돈인가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의 인기로만 먹고사는 정치인이라면 실제의 실현가능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혀 실현 불가능하더라도 대중이 환호하고 좋아할만한 정책이라면 얼마든지 달콤한 구호로 대중을 기만하고 선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와 사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진보정당이나 진보인사라면 그러한 달콤한 구호보다는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한 걸음이라도 역사를 앞당기는 약속을 내걸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환경은 현 세대의 주민만 주인이 아니다. 다음 세대와 또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후손들 모두가 주인이다. 현 세대는 짧은 동안의 관리권만 위임받았을 뿐이다. 기본소득으로 주민들을 매수하여 현 세대의 환경훼손을 눈감게 만든다면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협잡이다.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부유세정책을 간판으로 내걸었을 때 만인의 웃음거리로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철학이 없고 가치판단을 내맡긴 천박한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섣부른 인기정책으로 대중의 정책적 사고를 선점하여 다른 진보적 생각이 파고들 여지를 미리 없앤다. 인기에만 연연한 섣부른 정책이 제시되면 정작 필요한 다른 정책에 신경 쓸 여유를 못 갖게 된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여러 번 귀중한 순간이 낭비된 전례가 있었다. 1979년의 10.26 해방공간에서 한가하게도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운동을 최우선으로 내걸어 그 당시의 군부세력 내부의 수구세력과 개혁세력 간의 암투는 정작 놓치고 있었다. 학원민주화 운동도 그 당시에 물론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지만 전체 맥락에서는 타이밍도 맞지 않았고 다른 시급한 의제를 도외시한 때문에 오히려 우리역사를 수십 년 후퇴시킨 반역이었다. 6공 초기에도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라는 밑으로부터의 시대적 요구를 소위 진보를 자처한 사람들은 기껏 민중당 같은 제도권 정당을 만들어 진보운동을 의회주의 운동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진보단체들을 선거운동에다 매몰시켰다.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이론을 가장 먼저 발기한 곽노완교수도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는 주목하고 있다. 그의 글,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을 읽어 보면 자기의 기본소득이론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사회의 절대다수가 지지할 만한 가장 변혁적 과제라고 강조한다.

(1) 21세기 대안 경제모델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가처분총소득의 50% 수준) + 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사회연대소득/코뮌주의적 기본소득: 가처분총소득의 50% 수준)”을 통한 능력에 따른 노동의 촉진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이는 현재의 “노동소득(가처분소득의 40%)+불로소득 및 투기소득(가처분소득의 60%)”라는 경제원리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유인을 담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성과를 낳을 수 있다.
(2) 장애인, 노숙자, 청소년, 실업자, 비정규직, 가정주부, 노년빈곤층, 징병된 군인 같은 사람들은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사람들로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착취당하고 수탈당한 것을 다시 환수하자는 데 적극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대안사회를 향한 변혁운동에서 즉각 혁명적일 수 있다. 이들은 다만 조직되어 있지 않다.
(3) 정규직 임금노동자는 착취당하고 수탈당한 것을 다시 환수하자는 데 적극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대안사회를 위한 변혁운동에 있어서 즉각 혁명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인구의 1/3에 불과하고 조직률도 10%수준에 머물지만 그 조직된 역량을 십분 활용하여 빼앗기는 사람들 전부를 위한 변혁운동으로 발전시킬 수만 있으면 그동안 고립되고 왜소화되어 온 진보운동의 연대를 비약적으로 확대시키는 촉매제로 될 것이다.
  그의 대안사회모델인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가처분총소득의 50% 수준) + 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사회연대소득/코뮌주의적 기본소득: 가처분총소득의 50% 수준)”부터 살펴보자. 확대재생산에 투자될 자금은 한 푼도 남기지 말고 가처분소득 전부를 국민 각자의 소비에로만 돌리자는 발상부터 나는 대안사회의 모델이 매우 퇴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문제는 도외시하고 분배문제에만 집착하는 것부터 기이하다. 분배구조는 생산구조와 소유구조의 산물인데 다른 것은 그대로 두고 분배구조만 바꾼다면 그게 어떻게 대안사회가 되는가?

  전체 가처분소득 가운데 기본소득 50%와 노동소득 50%만 인정하고 있으므로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100% 과세한다는 얘기가 된다. 착취와 수탈을 환수한다면서 세금으로 100% 환수하자는 얘기인데 그것으로 그는 수탈이 폐지된다고 주장한다. 수탈을 없앤다는 것은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발생근거를 제도적으로 폐지하는 것이라야 할 텐데 세금부과로 그것을 폐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의 수준이 과도하지만 않다면 과세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가 말하는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가 대안사회에서 이루어지려면, 같은 시장경제라 하더라도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이 근절되어 노동소득만 존재해야 할 것이다. 같은 노동소득이라도 지출된 노동량에 비례하여야, 즉 가치법칙이 왜곡되지 않는 시장경제를 이루어야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다. 불로소득이 근절되는 시장경제에서는 투기소득이나 금융소득만 근절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부산물인 청년실업자, 노숙자, 무주택빈곤층까지도 다 근절되어 모두가 취업한 근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는 구태여 기본소득이 운위될 필요조차 없다. 독일, 남아프리카, 브라질에서 기본소득을 운위하는 것은 토지자본과 금융자본의 활동을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곽 교수가 주장하는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와는 거리가 멀다.
 
둘째로 곽 교수는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장애인, 노숙자, 청소년, 가정주부, 노년빈곤층들이 기본소득 문제에 대해서는 즉각 혁명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자리는 요구하지 않고 거지처럼 기본소득만 요구하는 것이 즉각 혁명적이라면 도대체 혁명이란 개념을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투기소득에 세금을 부과한다고 그걸 변혁적이라고 보았으니 기본소득도 당연히 그에게는 혁명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이 혁명에 대해 그런 싸구려 철학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진보주의자들의 혁명은 사회혁명을 가리키는데 사회적 혁명에는 반드시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이 전제되어 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처럼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새로운 형의 인간이 부지기수로 나타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지식인도 신채호선생 같은 분이 부지기수로 나와서 사회, 경제, 문화, 과학기술을 논하는 모든 글 하나하나에 그들의 혼이 실리고,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도 허준선생 같은 분이 부지기수로 나와서 환자를 자기 몸처럼 소중하게 돌보아주는 것ㅇ리 상식처럼 통하는 바로 그런 상태가 혁명과정에서는 반드시 나타난다. 그런 순간이 우리 역사에서도 여러 번 있었다. 동학혁명 당시 곰나루에서, 1945년 8월의 한반도에서, 1960년 4월의 남한에서,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혁명의 바이러스가 당시의 모든 사람에게 감염되어 내 것 네 것도 구별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의 가족으로 어울려 모든 사람들이 성인처럼 거룩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 뒤에 반동이 이어지고 혁명이 배반당하면서 혁명의 바이러스만 전멸 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그 이전보다 더 이기적인 아귀로 돌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느 누구만 즉각 혁명적일 수 없다. 어느 사람이든 경우에 따라 극히 이기적일 수도 있고 극히 헌신적이고 이타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즉각 혁명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건 경험의 미숙 때문인가, 철학의 미숙 때문인가?
  셋째, 곽 교수는 정규직 임금노동자는 ‘착취당하고 수탈당한 것을 다시 환수하자는’ 데 대하여 적극적 이해관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곽 교수가 말하는 ‘착취당하고 수탈당한 것을 환수하자는’ 것은 말 그대로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의 원천을 근절하자는 것이 아니라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에 대해 과세만 하자는 것이다. 그런 왜곡된 의미의 환수에 대해서는 물론 정규직 임금노동자들이 적극적 이해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곽 교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노동자나 실업자, 노숙자들의 염원인 기본소득운동을 자기들의 운동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빼앗기는 사람들 전부를 위한 변혁운동으로 발전”되어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도하게 될 광범한 민중적 연대가 달성될 것이라고 곽 교수는 주장한다.
  여기에서도 곽 교수의 협잡기질을 찾아볼 수 있다. 조직되지 못한 실업자, 노숙자, 청소년, 가정주부, 노약자들에 대해서는 즉각 혁명적일 수 있다고 해놓고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광범한 혁명적 민중연대의 지도적 위치에 설 수 있다고 꼬드긴다. 그러나 광범한 민중적 연대만 만들어지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빼앗기는 사람들 전부를 위한 변혁운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수십만 수백만의 대중을 광장에 운집해서 깃발만 휘날리면 그게 변혁운동은 아니다. 그런 짓은 이미 여러 번 해봤지만 변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우리가 직접 뽑을 수 있게 됐어도 아무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듯이, 불로소득이나 투기소득에 세금이나 물리고 대중들에게 몇 푼어치 기본소득을 제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변혁이 될 수는 없다. 절대다수의 대중을 동원해서 투기소득자와 불로소득자를 에워싸 세금이란 이름으로 금품을 갈취한 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갖는다면 그게 어찌 변혁인가? 홍길동이나 일지매의 도적질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예전보다 투기소득이나 불로소득을 얻기가 곤란해질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다시 기회를 잡으면 언제라도 그것을 원상복귀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원상복귀를 막으려면 홍길동이나 일지매가 늘 죽지 않고 살아서 활약을 계속해야 하듯 수십만 수백만의 군중들이 언제라도 광장에 재운집하여 감세철회나 기본소득의 증액을 요구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세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착취당하고 수탈당한 것을 환수할 수도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답하려면 착취와 수탈부터 먼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수탈이란 타인의 소유물 혹은 공동소유물을 자기의 사적 소유물로 이전시키는 것을 뜻하고 착취는 타인을 이용하기만 하고 소유권까지 이전하지는 않는다. 몇 푼의 돈으로 사람을 고용해서 그 사람의 노동력을 자기의 목적에 일정 기간 이용하는 것이다. 자기가 남에게 이용당하기보다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고용되어 이용당하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립하는데 필요한 자연력 혹은 자연자원 또는 (생산)수단에의 접근이 그들에게는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클로저 운동 당시 공유지로부터 축출당한 농민들처럼 그러한 조건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이 오늘날 대다수 근로자들이고, 그런 고용의 기회에서조차 배제된 사람이 실업자, 가정주부, 노숙자들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착취보다 수탈문제이다. 수탈만 해결되면 취업한 근로자들 자립하여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탈을 막으려면 그 주된 수탈수단이 오늘날은 금융과 부동산이기 때문에 우선 이들부터 시장경제에서 격리시켜 불능화해야 한다. 시장경제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이 제1원칙이다. 그런데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은 이런 시장경제의 제1원칙에 위배된다. 공적 자산인 토지와 사회적 자산인 금융이 개인에게 사유화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이 생겨난다. 그런데도 금융자본이 시장경제를 오히려 더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바로 이 모순을 우리의 주 무기로 삼아야 한다.
  시장경제에서 사유권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직접 노동하여 생산한 물건은 바로 그 사람의 소유물이라는 원칙 때문이다. 그런데 토지는 어느 누구의 노동생산물도 아니다. 불법적으로 누군가가 선점하여 그것을 타인에게 판매하면서 상품으로서 사유화된 것이다. 사실 그것을 구매한 사람은 장물애비나 마찬가지이지만 장물구매도 오래 전에 했으면 그것이 합법적 취득물로 되듯이, 수백 년 전부터 상품으로 거래된 토지를 오늘 갑자기 장물로 취급해서 불법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금융은 다르다. 처음에는 전당포 같은 사적 활동에서 시작되었지만 발권기능, 신용창조기능, 신용배분, 보험기능, 신탁기능은 모두 사회적 산물이고 사회적 활동이다. 금융이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듯이 금융은 고도로 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다. 금융은 사회적 자산이기 때문에 그 관리권을 사회가 회수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가 직접 금융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토지도 통제가 가능해진다.
  물론 이것으로 계급모순이 일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첫 출발은 반드시 여기서 이루어져야 한다. 시장경제 원칙을 관철시키려면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원천부터 봉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가산업을 부흥시키고 무주택서민들이나 비정규직의 양산을 막는 첩경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외국 금융자본은 한국에는 더 이상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원천을 봉쇄하여 시장경제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시적으로 뼈아픈 고통을 불가피하게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면 일시적으로 기본소득을 향유할 수는 있으나 오랫동안 향유할 수는 없다. 달콤한 약속으로 순간적인 선거에서는 대중을 기만하는 데 성공할런지 몰라도 계속적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곽 교수는 조직된 노동자의 이해관계와 비정규직이나 실업빈곤층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기본소득이론을 중심으로 두 그룹의 이해관계를 비교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내부에서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원천을 근절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그룹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리 없다. 왜 똑같은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구태여 내부분열과 상충된 이해관계를 조장하는 길을 택하려 할까? 그러면서 광범한 연대를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을 접고 대승적 관점에서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물론 혁명적 인간형은 사익을 무시하고 헌신하지만 아무리 혁명적 인간이라도 문제를 본질적으로는 해결하는 바 없이 무작정 양보만 하고 헌신만 할 수는 않는다. 처음에는 한두 번 속아 양보도 하고 헌신도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소위 진보좌파들의 주장이 허황되고 낭만적 미망에 불과하며 문제의 본질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그래서 지난 20년간 한국의 진보운동은 계속 쇠퇴의 길을 밟아 왔다. 내가 아는 어느 후배는 아직도 대학졸업도 하지 않은 채 그동안 계속 진보운동에만 몸담아 오면서 거기서 청춘을 보냈는데 그래도 다른 사람 누구는 명망이라도 얻었지만 그는 그들을 뒤에서 보조하는 일만 하느라 나이만 들고 학위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회적 절름발이로 전락해버렸다. 이게 다 누구 탓인가? 얕은 지식으로 진보운동을 그릇되게 이끌어 온 그의 선배의 잘못이 아닌가? 물론 혁명이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체계적으로 연령과 성별, 소질과 적성에 따라 분업을 담당하며 연령이 지날수록 전문기술과 교양과 지식을 쌓도록 했어야 했는데 맨 날 똑같은 동원훈련만 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었으니 이는 혁명적 에너지를 오히려 소진시키는 일이었다.
  내가 이해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원천을 없앤다는 점에서 시장경제 원칙에 더 적합하다. 또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기획한다는 점에서는 가치법칙의 왜곡을 막는다. 혹자는 사회주의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기본으로 하므로 시장경제원리와 모순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맑스의 사회적 소유는 사적 소유와 대립하는 개념이지 개인적 소유까지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 소유와 사적 소유의 차이는 배타적 처분권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거기에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가 들어 있다. 적어도 개인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에서는 당연히 시장경제 원리도 작용할 수밖에 없다. 불로소득이나 투기소득은 없지만 개인소득이 존재하며 생산수단의 개인적 소유도 용인된다. 소규모 자영업에 의한 독립소생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치법칙이 관철되고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이 근절된 그런 시장경제는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근로자, (2) 근로조건에서 제외된 비경제활동인구(아동, 청소년, 노약자, 가정주부, 병약자) (3) 경제활동인구이긴 하지만 근로를 않는 기생계급(군인, 행정관료, 토지소유자, 화폐대부자)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기생계급이 경제적 특권을 누렸지만 이제 이들은 시장경제로부터 격리되어 배제되기 때문에 근로계급이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곽 교수는 이것이 불만이다. 왜 특권을 주느냐는 것이다.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에 대해 과세만 하고 그 조세수입으로 근로자와 일자리를 갖지 못한 차하위의 계층에게 기본소득을 나누어줄 관료들의 권리를 박탈한 것이 그에게는 불만인 모양이다.
  곽 교수는 「고타강령비판」에서 맑스가 언급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성과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로부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로의 발전에 비추어 가며 자신의 기본소득이론을 설명한다. 맑스가 제시한 사회주의원리는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만 지향하기 때문에 바로 이 점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까지도 실현하려는 기본소득이론이나 서유럽 사민주의이론보다 못하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곽 교수는 기생계급의 경제적 특권과 그들의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을 인정하더라도, 사회복지와 필요에 따른 분배를 수용한다는 이유에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모델보다 더 낫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서유럽 사민주의는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기생계급이 누리는 경제적 특권까지 존중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지향하는 사회주의모델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본다. 그는 마르크스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만 인정했기 때문에 노약자나 아동, 청소년, 가정주부들이 누려야 할 ‘필요에 따른 분배’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다고 해서 아동, 청소년, 노약자, 가정주부, 병약자에 대한 분배를 반대하고 무시했다고 과연 해석해도 되는가, 정말 의문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필요에 따른 분배’를 지향하기 때문에 인간세상이 도달하기 어려운 유토피아적 기획이라고 곽 교수는 비판한다. 노동의 성과와 상관없이 필요에만 따라 분배받는다면 노동유인이 사회 전체적으로 크게 감퇴하여 경제적 성과도 크게 감퇴할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그런 국면에서는 자본주의에서보다 더 작아진 파이 중에서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사람들이 더욱 많은 것을 빼앗기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경제에서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나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로서의 공산주의로 연결되기보다는, 각자의 이기주의가 조장되고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비판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맑스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개념보다는 자신의 기본소득이론이 더 낫다는 것이 본다. 그의 기본소득이론은 ‘필요에 따른 분배’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똑같은 비중으로 강조하지만 맑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그 중의 하나만 각각 강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필요에 따른 분배’에 대한 그의 자의적 해석이 깔려 있다. 그는 ‘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정도로 분배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 멋대로 해석했다. 그런 자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한, 맑스가 언급한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순조로운 이행”은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원리와 공산주의원리 사이에는 넘기 힘든 간극이 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이러했다. 즉, 분배가 노동성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가처분 소득이 거의 전부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만큼 노동자들이 새로운 경제적 특권층으로 부상한 것인데, 그런 특권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여 필요에 따른 분배원리를 성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이처럼 엉터리로 설명하고 이 설명을 우리나라 노동운동 단체들이 받아들인다니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성과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와는 구별된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법칙은 금융에 의한 산업의 지배가 완성시키고, 금융의 축적과 집중이 최고도에 달하도록 만든다. 늘 경제위기가 금융에서 비롯되면서부터 공적 관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고 문제해결이 늘 공적 관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금융의 본질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진전되어 나가면서 금융활동이 본질에 있어서 공적 사회적 영역임이 이제는 누구에게나 인식된다. 개별 금융자산은 개인소유이지만 그것을 관리하고 그것을 토대로 승수배의 새로운 신용을 창출하여, 그 새로 창출된 신용을 사회 각 부문에 배분하면서 사적 수익의 극대화를 원칙으로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이익과 필요에 따라 배분하도록 하려면, 금융을 민간에 맡길 것이 아니라 공적 기구가 맡아 공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사회가 관리하고 감독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점에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금융에 의한 산업의 지배가 이미 확립된 토대 위에, 금융의 공적 관리가 확립되면 전체 산업에 대한 관리에서까지도 모든 산업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적 이익에 이바지하도록 재편성하거나 통제할 수가 있다. 이 단계부터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의 진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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