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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경기규칙을 뒤엎고 있는 ‘실업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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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비 및 아기똥 작성일98-11-30 00:00 조회1,0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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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정세동향> 1998년 3월 9일자

 

“유럽의 경기규칙을 뒤엎고 있는 ‘실업자 운동’”

 

실업자들이 민중을 옭죄고 있는 바이스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

 

 

빈곤층에 대한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들’(minina sociaux)을 인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리오넬 죠스팽은 프랑스 사용주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사용주들은 죠스팽이 표명한, “노동단체에 대한 완전히 개방적인(특별히 연계되거나 구속되지 않는) 태도와 무(無) 지원” 정책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며 칭찬했던 것이다. 죠스팽의 이러한 기골(氣骨)은 보수적인 여론의 일 부분을 매료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이 보수적 여론은 죠스팽에 대해 불만을 가질 다른 이유들을 곧바로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예컨대, 주 35시간 노동제에 대한 법안을 정부가 제출하는 것을 놓고서 이미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죠스팽의 이러한 기골은 프랑스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골은 반면에 좌파 정권과 이 정권을 선출한 유권자들 사이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다. “실업자 운동”이, 경제적·사회적 우선순위(여러 가치나 과제들 가운데서 무엇이 보다 중요시되어야 하는가 또는 보다 선차적이라고 간주되는가 하는 의의 부여상의 서열 : 역주)에 대해서 기존의 것(경제성장이나 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 역주)과 다른 것(모든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 역주)을 지향하여 행동을 하기로 단단히 결심을 한 새로운 조직들을 속속 출현시켰기 때문이다.

 

                      까뜨린느 레비(Catherine Levy) 및 끄리스또프 아기똥(Christophe Aguiton)**

 

 

*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1998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까뜨린느 레비는 ‘과학적 연구 국제센터’(Centre inter-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 CNRS)의 기사이고, 끄리스또프 아기똥은 ‘실업에 반대하는 행동’(Agir contre le chomage : AC!)의 대변인이다.

 

 

1995년 11~12월의 “총파업 운동” 당시에 그러했듯이 1997년 12월~1998년 1월의 “실업자들의 운동”에서도 시민들은 또다시 사회적‧정치적 토론의 한복판으로 쇄도하고 있다.

 

실업에 대해 육신(肉身)과 육성(肉聲)을 주고 있는(실업의 존재 또는 실업문제를 사람들이 주목하게 만들고 있는 : 역주) 현재의 “실업자 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사물현상이 아니다. 실업자들이 실업자의 자격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또 그런 자격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시작한 것은 실업자들이 행진(행군)을 함으로써, 즉 ‘대로를 걸어가는 보행인’이 됨으로써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 그와 같이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운동이 지난 수년 동안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군중―이 군중(유연화-착취되는 노동자대중을 말한다 : 역주)은 지금 이 “실업자 운동”의 바로 뒤켠에서 재규합되고 있다―의 중요한 구성요소였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역사는 1994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그 당시에 ‘실업에 반대하는 행동’(Agir contre le chomage : AC!)이라는 운동단체가 파리 주(provine vers Paris : 파리 시와 주변의 도(道)들을 합친 행정단위. 프랑스의 수도권이다.: 역주)를 집중점으로 하는 행진(행군)을 조직했던 것이다. 그 당시 실업자들은 여러 주일 동안 도보 행진을 하며 여러 도시와 시골 마을들을 통과해 나갔다. 그리고 그곳들에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 및 운동단체 활동가들과 토의를 하고 토론을 했다. 이렇게 토의·토론한 사람들 2만 명이 바스티유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날의 시위는 베란제 가(街)를 점거하여 노상에서 숙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달이 규모가 확대되어 나가게 되었다.

 

1994년 12월 드리곤 가(街)―이 일대는 ‘주거의 권리’(Droit au logement : DAL)라는 운동단체에 의해 포위공격을 받았는데―의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은 실업자 단체들의 출동에 의해서 점거되었다. 이렇게 어느 거리 일대가 실업자들에 의해 몽땅 점거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이 거리에 투쟁단체들의 회원들, 노동조합 조합원들, 연구가들 및 교육자들로 붐비는 아틀리에(모임방)들이 곳곳에 설치되어졌다.

이곳에서 ‘집없는 사람들의 위원회’(Comite des sans-logis : CDSL)라는 운동단체의 청년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놓았다. 즉 직장도 구할 수 없고 수입이 ‘최저 착생(着生 : 외국인들이나 소외된 사람들이 생활의 뿌리를 내려 동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 역주) 소득’(revenue minimum d'insertion : RMI)에도 미치지 못할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이 정치토론에서 그 주역들이 확신할 수 있게 된 유일한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점이었다. 즉 이 토론을 통해서 참가자들은(위의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 역주) 일(노동)과 소득 사이의 관계를 전환하는 임무를 국가에게 내맡겨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1994년 12월 이래로 매년 12월은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 달, 행동하는 달이 되었다. 즉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인구의 대부분을 사로잡는 물품축적의 열병이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의 수령자들에게도 전염되어 극도에 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권리들’(Droit devant; DD)이라는 운동단체가 주동이 된 가운데 보부르그(Beaubourg) 읍 점거와 “없는 자들의 선언”(manifeste des Sans) 발표가 행해진 것은 1995년 12월, 철도 노동자들의 대파업이 벌어지던 한가운데서였다. 이 1995년 12월의 일은 획기적 사건이다. 획기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이다. 하나는 파업에서 가장 행동적인 노동조합들이 이 행사의 전체집회에 대거 참석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의사표시의 양식이 새로워졌다는 점이다. 즉 이 집회의 결과물로서 권리(시민적, 정치적 및 사회적) 관념과 더불어 그것의 부정에 대한 관념, 즉 무권리, ‘권리의 죽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개념이 중심적인 주제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작은 되었지만 ‘실업자 운동’은 당시에는 아직 맹아 단계에 불과했다. 이 운동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운동단체의 활동가들 및 이들과 가까운 몇몇 노동조합 조합원들을 재규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곧이어 임금 노동자들이 주최하는 투쟁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반향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됨으로써 본격화될 수 있었다.

사방에서 자발적으로 조직이 생겨나고 행동이 터져나왔다. ‘주거의 권리’(DAL)와 ‘집없는 사람들의 위원회’(CDSL)라는 단체에 의한 주거지 접수, ‘실업에 반대하는 행동’(AC!)이라는 단체에 의한 일자리 요구1), ‘실업자와 불안정 고용자들의 전국 운동’(MNCP), ‘일자리와 착생과 연대를 위한 연합’(Apeis), ‘무료 대중교통을 쟁취하기 위한 행동’, 공공 서비스 공급 단절을 막기 위한 ‘주요 공공 서비스 기관(프랑스 전력공사, 프랑스 가스공사 등)에 대한 임금노동자들의 출동’, 1996년 12월에 있은 알리그르 가(街)의 “매종 데 ‘앙상블’”(‘모든 사람들’의 집) 점거 등등.

 

1997년 5월에는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 점거가 있었다. 이곳은 금융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장소로 간주되고 있는 곳이다. 이 점거투쟁에는 실업자들의 단체들과, 프랑스 민주노동총동맹(CFDT)의 은행연맹과, 노동총동맹(CGT)의 금융연맹과, 전국 조세징수원 단일 노동조합(SNUI) 및 디스(Dix) 그룹2)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마침내 이 기관의 책임자들의 영접을 받아냈다.

‘주거의 권리’(DAL)와 ‘앞으로 나아가는 권리들’(DD)이라는 운동단체는 금융상의 권리들에 노동자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또 초과부채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1997년 12월 15일, 배제와 불안정에 반대하는 투쟁단체들의 활동가들이 노동조합 조합원들과 하나가 되어 <“사회적 절박”의 행동주간>을 개시했다. 이 투쟁은 루브르 탑 점거, 살르 뒤 까루셀(salle du Carrousel)에서의 토론회 조직 등으로부터 투쟁주간을 개시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또 이 투쟁주간은 “루브르로부터의 호소”를 채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참이었다. 이 호소문은 수많은 조직들이 서명을 할 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과 실업자에게 지급하는 크리스마스 수당을 인상하라고 요구할 참이었다.

 

이들 모두가 여권 없는 사람들의 투쟁에서 또다시 만났다. 이 운동 안에는 운동단체의 열성 회원과 임의 참가자가 아우러져 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실업자의 권리와 권리행사의 조건 문제에 그야말로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다.

주거권이 자명하게 권리로 인정되고 이에 따라 주택을 점거하는 행동이 사회 일반인들의 눈에 정당하게 비쳐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업에 반대하는 행진과 이와 유사한 형태의 다른 행동들도 종국에 가서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안정된 일자리와 소득을 가지는 것을 하나의 자명한 권리로서 대중화시키게 될 것이다. 즉 세 식구로 구성된 그 어떤 가구도 한 달에 3천 프랑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상공업 고용촉진 협회’(Association pour l'emploi dans l'industrie et le commerce : Assedic)의 사무소들을 점거하는 투쟁들―이 투쟁은 여러 주일째 속행되고 있는데―로 말하면, 이 점거투쟁은 바야흐로 장소 한 곳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용기가 부족하여 과감하게 데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가 고립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장소를! (이 사무소들은 고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므로 실업자나 불완전 고용 노동자들이 그곳에 점거투쟁하러 가는 것은 심리적으로 데모에 참가하는 것에 비해서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실업자들이 투쟁 속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서로가 동료·동지가 됨으로써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 역주)

 

실업자들의 행동에 힘입어 ‘생활 소득’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다. 즉 ‘최저 착생 소득’(RMI)이라는 제도가 신설되고 이 복지급여를 수취하는 사람들의 총 인원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에 할당되는 정부지출은 1982년이래 계속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사회복지 급여를 수혜하는 가구의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 합계액(급여의 종류가 여럿이므로 ‘합계액’이라고 하고 있다 : 역주)은 최고로 잡아도 평균 가처분소득의 30~40%에 불과하며, 최저로 잡을 경우 평균 가처분소득의 20~30%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복지 급여금액은 빈곤선보다도 훨씬 밑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만큼의 가구소득까지를 빈곤선으로 정의하든 상관없이 그러하다.(유럽공동체에서는 평균소득의 50%를 빈곤선으로 정하고 있으며, 프랑스 통계경제연구소에서는 중앙값(median) 소득의 50%를 빈곤선으로 정하고 있다)

 

모든 가구를 모집단으로 한 ‘평균 생활의 수준’은 지난 1982년이래 15% 이상 향상되었는데도 사회복지 수령자들이 받는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의 금액은 고작 1982년 당시의 구매력을 현상유지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수령자들의 경우에는 수령하는 급여금의 실질 구매력(명목 금액이 아니라 실질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여 환산한 복지급여 금액 : 역주)이 ‘연대의 독특한 효과’(ASS, 급여 권리가 종료된 실업자에게 급여되는 복지급여이다)라는 종류의 급여에서는 10% 가량 줄어들었다. 그리고 ‘착생 급여’(AI, 자녀로부터 떨어져 외롭게 사는 부모나 정치적 망명자에게 지급되는 급여이다. 이 급여는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에게는 지급이 폐지되었다)라는 종류의 급여에서는 수령하는 급여금의 실질구매력이 20%나 줄어들었다.

 

하지만 실업자들의 운동은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의 인상이라는 것보다, 단지 그것에 머무르는 것보다 훨씬 범위가 큰 일군의 문제들 전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실업자 운동은 재정운용의 불평등을 폭로함으로써 재정 기구를 보다 민주적으로 운용하라는 요구를 전파하는 배달부이기도 한 것이다. 즉 프랑스에서는 금융소득의 단지 15%에 대해서만 조세가 징수되고 있다. 그런데 노동소득이나 (기계)보충소득(revenue de remplacement)은 조세징수에서 회피되지 않는다.

또 ‘불안정 고용’ 및 ‘부분시간 노동’은, 그러한 칭호를 직함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극히 낮은 임금밖에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들의 임금은 왕왕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보다도 액수가 낮다. (낮은 임금 액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고용들의 비인간적인 고용형태에 대해서도 실업자들과 임금노동자들은 또한 그것에 반대하여 행동으로 나서고 있다. 기획원(Commissariat au Plan)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7백만 명이 실업자가 되어 있거나 현재 유럽의 여러 정부들의 대다수가 줄을 이어 수행하고 있는 경제정책(신자유주의)으로부터 배태된 노사관계들(사용자와 봉급생활자의 관계)이 야기한 재난의 참혹한 희생자가 되어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실업자 운동은 또 유럽연합의 각기 다른 나라 노동자·민중들을 재규합하여 하나의 총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운동에 그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다. 이 커다란 운동은 자신의 노동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들, 및 고용 불안정 문제와 임금노동에 대한 새로운 관계 구축 문제를 유럽공동체 건설의 한복판에 위치짓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모두를 재단결시키고 있다.

골라 뽑히지 않은(정규직은 골라 뽑는다 : 역주) 부분시간 고용들(과소고용이라고도 불리는데), 또는 계약 노동자들(고용기간이 단기로 계약된 노동자들 : 역주), 또는 보조 노동자들, 또는 교대 노동자들(일정한 수의 노동자들이 일정 기간씩 교대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 이른바 Job-sharing : 역주) 등등이 모두들 부분적인 실업(chomage partiel)의 형태들이다. 이것들은 또 유럽의 통계들에서 숫자로는 전혀 표시되지 않는, ‘어둠의 구역들’(Zones dombre)이기도 하다.

1993년에는(통계숫자가 발표된 것으로는 최근의 해인) 5천7백만 명의 유럽인들이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으며, 이들 빈곤층에서는 경제활동인구의 35%만이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실업, 불안정 및 배제에 반대하는” 유럽인들의 행진들은 이웃나라의 사정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그것으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유대를 부각시켜 냈다. (그 동안 각 나라에서 분산적으로 행해졌던 행진 운동의 경험을 총화해서 : 역주) 무수한 실업자 및 불안정 노동자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요구를 표시하는 양식으로서 유럽을 관통하여 동시다발적으로 행진하는 방법을 결국 채택한 것이다.

이들은 1997년 4월 도시와 농촌을 가로질러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에서, 그리스에서, 영국에서, 그 밖의 여러 곳에서! 행진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 굳게 결속하고, 거처(속사정)를 드러내고, 서로 만나 합류되게 하고, 나아가 암울한 현재가 미래에까지 그대로 연장되어 강요되려 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다짐하는 등을 이루어내는 방법이다. 이것은 또 역사라는 것이 지금도 존재한다는(신자유주의는 역사의 종언을 고했다고 주장하는데 : 역주) 것, 사람들이 세상의 운행을 수정·변경시킬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그 증거를 보여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 생활의 불안정에 저항하는 이 투쟁을 눈에 볼 수 있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 생활(인생)이 자신의 제 권리를 단호하게 주장·표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 전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대행진 운동은 1996년 7월 플로렌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단체와 노동조합의 책임자들이 그곳에서 만나 회합을 했다. 토스칸느에서 그리고 그보다 훗날에 브뤼셀에서, 활동가들은 각 나라의 운동들을 유럽 차원의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맞물리게 하고자 했다.

행진을 조직함에 있어서는 유일무이한 전범(典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행진에는 하나의 유일한 전범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각 민족의 역사에 따라 서로 특수한 모습들이 등장하고 있다. 또 유럽 각 나라의 정부들이 ‘공동으로’ 집행하고 있는 그 신자유주의 정책에 저항하는 각 나라의 운동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반영하는, 서로 다른 행진 모습들이 표현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유럽인의 행진’의 조직은 그 형식이 일률적이지 않고 매우 다종다양하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의 전국 책임자들과 투쟁단체들이 어깨를 맞대고 함께하고 있다.

이태리에서는 실업자들과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의 운동은 지방 수준에서 구성되었다. 주요하고 큰 노동조합 전국본부 가운데 두 개가 이 행진을 안내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막상 행렬이 통과하던 시점에는 이들은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3) 그렇지만 “sincobas"(이태리 노동총동맹 CGIL의 중요한 소수파를 대표하는 범부분별 노동조합들인)는 이 행진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지방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적 수준에서도 이 행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튜린에서 이들의 참여는 괄목할 만하다.

스페인에서는 지금 노동관계법에 대한 갖가지의 “개혁”들이, 두 개의 노동조합 총본부에 의해 서명되어서 집행됨으로써, 고용 불안정을 가중시키고 기업의 고용 비용을 감소시켜 주고 있다(마치 우리 나라에서 두 노총이 사용자 및 정부와 노·사·정 합의를 한 것과 같다 : 역주). 이곳에서는 이번 행진이 지역별 또는 지방별로 재규합된, 수많은 조직들과 운동단체들을 하나로 집결시켰다. 스페인에서는 행진은 1997년 4월 14일 시작되었는데 이 날은 스페인 공화국의 건국 기념일이다.

 

벨기에에서는 실업자의 80%가 노동조합 조직의 틀 안에 재규합되어 있다. 이렇게 실업자들이 노동조합에 많이 결집되어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실업자에 대한 수당 지급을 노동조합이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는 실업수당에 대한 실업자들의 자주관리 요구가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실업자들의 이 자주관리 요구는 이런 긴장과 아울러 노동조합 내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른 한편, 많은 수의 운동단체들이 “사회적 의무실”이라는 이 나라의 황폐한 현실을 터전으로 해서 우후죽순처럼 출현하고 있다. 이곳 벨기에에서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복지(장기간 실업 상태에 있는 실업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조건의 일자리이든 받아들이게 하는, 되도록이면 부분시간제 일자리와 저임금의 일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라는 위협이 점점 더 확연해지고 있다. 벨기에 정부는 바로 이 일-복지라는 개념을 기초로 하여 정부제출-입법안을 제출해 놓고 있다.

네델란드에서는, 스페인에서와 마찬가지로, 극도의 난제가 되고 있는 것이 “노동시간이 극히 부분적인” 부분시간-노동제 고용 문제와 계약 기간이 “극히 한정적인” 계약-노동제 고용 문제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통계는 엉터리이다.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친자본적인 기구가 네델란드의 실업자 통계를 바로잡아 주었다는 사실을 통해 널리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극히 공식적인 5.3%라는 수치를 진실에 보다 근접한 20.4%로 고쳐 발표했던 것이다.4)

네델란드에서는 노동조합 내부의 소수파가 실업자들의 행진을 지지하고 있는데, 이 소수파의 주장에 의하면 이 나라의 빈곤층 인구가 1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교육 및 보건에 관련된 공공 서비스마저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벨기에에서와 마찬가지로 네델란드에서도 실업자들의 행진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대가 일사불란하지 못하다. 그리고 민족정치(계급정치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 역주)에 관한 만장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합의의 틈새들로 (계급정치에 관한 : 역자) 토의·토론들이 조금씩 스며들어가고 있다. 이곳에서도 “대로를 걸어가는 보행인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이들의 출현과 함께 심각한 상태를 지니고 있지만 감추어져 왔던 사회(복지) 문제들을 겉으로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실업자들이 행진을 개시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리고 이것은 그 후에 ‘실업에 반대하는 행동’이라는 단체의 활동가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 움직임은 몇몇 소수 사람들의 귀에만 들리는 웅성거림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웅성거림은 이제 커다란 함성이 되고 있다. 이 함성은 증폭되어 있고, 조금씩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으며, 일반사람들로부터 지지 받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되나요?” 4년 전 ‘집 없는 사람들의 위원회’라는 단체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질문했었다. 인구통계조사는 매양 거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이런 사람들이 얼마인지를 아예 묻지 않는 식으로 : 역주). 그리고 국가가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소득이 없는 사람들, 집이 없는 사람들을 셈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시민적 및 사회적 권리에 접근하는 문제뿐이 아니다. 무수한 사람들의 생존 현실의 문제도 또한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왜냐하면 이들을 셈에 넣는 것이 가능하도록 이들에게 칭호(규정된 명칭)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 이 사람들에 관한 제도권 연구소들의 연구가 여러 나라들에서 실행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제도권 연구기관들은 아직 유럽연합 15개 나라들 전체에 공통되는 조사통계를 할 방안을 실질적으로 준비해 놓지 않고 있다. 그러한 한 이런 제도권 연구소들의  통계들을 가지고 실업자 및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사정을 나라별로 정확하게 비교하는 것은 의연히 어려운 일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

 

실업자들 또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지고 있을 뿐인 사람들의 여러 가지 종류의 소득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사회복지 급여 체계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는 ‘최저 사회복지 급여금’이 여덟 가지 종류나 있다. 그 각각이 제각기 특정한 종류의 급여금(예컨대 주거 보조금과 같이)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조금들은 시시때때로 떼어버려지거나 추가되고 있다(주거 보조금은 지급하되 다른 보조금은 지급하지 않는 등으로 : 역주). 단 하나의 나라에서 이렇게 기준이 여러 개나 된다. 이것은 이미 밀림과 같은 혼미스러운 상태를 연출하고 있다―기획원은 이것을 “불통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각 나라에서의 사회복지 급여의 지급 그 자체가 미로들처럼 알 수 없는 상태를 보이고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은 유럽 차원에서 사회복지 상태를 국가별로 비교해 보겠다는 생각을 쉽게 포기하게 된다. 이 사회복지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비교를 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고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형편이 이런 것이다.

 

대행진 운동의 결산서가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주파한 주파거리가 몇백 킬로미터인가 하는 것을 뛰어넘는다. 또 이 행진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몇천 명인가 하는 것도 뛰어넘는다. 행진자들은 이것들만을 행한 것이 아니다. 이 대행진 운동은 노동조합들의 전통적인 처신을 수정시켰으며, 실업자와 생활 불안정자들을 셈에 넣게 하는 일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유럽연합의 나라들에서 이 문제가 정치쟁점으로 부상되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제도권 연구소들은 지금 그들의 연구 프로그램 안에 이 문제를 꼭 포함시키게 되었다.

행진 운동은 유럽공동체의 판도 안에 흩어져 산재하는 요구들에게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그 ‘형태’를 부여해 주었다. ‘민중의 소리’(vox populi)를 표현하는 합창대인 이 행진들은 유럽 건설에 있어서 전도되어 있는 우선순위들―고용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전적으로 통화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에 대한 비판을 증폭시켰다. 이 합창 안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쟁 과정의 평가를 놓고서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불협화음을 압도하는 공통 요소가 강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사회적 필요를 표현하겠다는 열망이라는 공통 요소가!

 

 

 

실업자의 원인*

 

 

* 이 글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프레데릭 레바론(Frederic Lebaron), 그리고 제라르 모제(Gerard Mauge) 등 세 사람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르 몽드>지 1998년 1월 17일자에 발표되었고, 이들에 의해 현재 하나의 격문(petition)으로서 돌려지고 있다(유럽의 모든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돌려지고 서명되고 있다고 한다 : 역주).

 

 

‘배제된 사람들’(the excluded)―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장기적으로 혹은 영원히 노동시장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로서 알려져 온 사람들은 대체로 항상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집단행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지난 몇 년 간 소수의 활동가들이 고립된 그리고 외관상으로는 희망 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을 뿐인데, 집단행동이 마침내 매스컴과 정치적 무관심의 높은 벽을 뚫고 터져나온 것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처음에는, 일군의 매스컴 전문가들, 언론인들, 노동조합주의자들, 그리고 정치집단들은 실업자 시위들에 대해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겼고, 혐오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들은 실업자들의 이러한 시위들이 자신들의 주인의 이해관계와 ‘배제’ 및 ‘실업이라는 국가적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들만의 전적인 독점권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제동을 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러한 불쾌한 대중동원에 직면하여, 이들 직업적 조작가들, 텔레비젼 고위직을 영원히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이 대중동원에 대해 하나의 ‘고통의 조작’, 즉 매스컴에 보도되기 위해 짜맞춰진 하나의 조작이라고만 보았다. 그리고 소수의 불법행위 혹은 평화적 행동의 위법성만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실업자 운동’이 확산되었고, 일군의 조직된 실업자들이 매스컴과 정치무대로 뚫고 들어갔다. 즉 ‘실업자 운동’의 첫 번째 승리는 운동 그 자체이다(‘실업자 운동’은 국민전선{Nationl Front : 프랑스의 극우정당. 95년 대통령선거 및 97년 총선의 1차투표에서 각각 15%의 득표율을 기록해서 대약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득표율로는 프랑스 제3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 역주}에 현혹된 사람들을 국민전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실업자 운동’은 동시에 집단적 조직화의 청사진이다. 그리고 ‘실업자 운동’은 하나의 연쇄반응의 산물이면서 ‘실업자 운동’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연쇄반응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즉 고립, 의기소침, 수치심, 개인적 분개, 희생양들에 대한 복수심 등으로부터 집단 동원으로. 그리고 체념, 복종, 개별화, 침묵 등으로부터 말할 권리를 획득하는 것으로. 그리고 의기소침으로부터 반란으로, 개별 실업자로부터 실업자 집단으로, 비참함으로부터 분노로. 실제로 시위자들의 슬로건은 “비참함을 뿌린 자는 분노를 거둔다”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실업자 운동’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진실의 일부―1995년 11~12월 운동(프랑스 알랭 쥐페 총리가 공무원 연금제의 후퇴, 의료복지제도의 축소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여 공무원 및 공공부문 노조를 중심으로 95년 11월부터 12월까지 총파업 등 노동자투쟁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11월 24일 공무원 및 공공부문 노조 총파업, 28일 전국 총파업, 12월 12일 전국 총파업 등을 집중점으로 투쟁이 두달 동안 계속되었다. 성탄절 직전에 쥐페 총리가 사회보장제도 개혁안의 일부 수정을 양보안으로 제시하여 총파업이 끝났다. 한편, 대학생들도 이 시기에 학교재원 부족에 항의하여 학교시설 증축, 교원 확충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 역주)의 원인이 되었고, “티트메이어(Tietmeyer) 사상”(티트메이어는 독일중앙은행 총재이다 : 역주)의 유력한 주창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은폐하려고 한―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우선 첫째로, 실업률과 이윤율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관계이다. 두 현상―일부 사람들의 과도한 소비와 여타 나머지 사람들의 궁핍한 상태―은 양립할 뿐만 아니라―일부 사람들은 잠자면서 부유해지는 반면에 여타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종일 일하고도 더 가난해진다―두 현상은 또한 상호의존적이다. 즉 증권거래소가 기뻐하면 실업자들은 고통을 느낀다. 또 일부 사람들의 부유함은 여타 나머지 사람들의 궁핍화와 연결되어 있다.

대량실업은 실제로 고용주들에 의해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용주들은 대량실업이라는 수단으로써 임금 정체 혹은 임금 삭감을 부과하고, 작업속도를 빠르게 하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고용 불안정을 증대시키고, 유연성을 부과하고, 작업장에서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보호를 폐지하고 있다. 기업들이, 매스컴에서 화려하게 발표되는 약간의 “사회계획”(social scheme)과 함께, “감량 경영”을 할 때, 그들의 투자수익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증가한다. 미국에서 실업률이 떨어지면 월가(Wall Street)는 의기소침해진다. 프랑스에서 1997년은 파리 증권거래소의 모든 기록들이 깨뜨려진 해였다(주가가 폭등했다 : 역주).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업자 운동’은 “선한”(good) 가난과 “나쁜”(bad) 가난 간의, 그리고 “배제된 사람들”과 “실업자들” 간의, 또 실업자들과 임금노동자들 간에 면밀하게 유지되어 온 분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실업과 범죄를 기계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도시폭력”의 원천이 실업, 일반화된 사회적 불안 그리고 대량빈곤에 있다는 것을 오늘날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 쉬트라스보르그(Strasbourg : 유럽 의회가 위치하고 있는 라인강변의 도시이다. 여기서는 유럽연합을 상징하고 있다 : 역주)의 “전형적인” 신념, 즉 교도소를 다시 연다고 위협하거나, 혹은 부모로서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추정되는 문제아들의 부모들로부터 가족수당을 박탈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고용정책의 감춰진 면모이다. 젊은 실업자들은 언제 토니 블레어(영국 수상)가 제안한 것처럼 어떠한 비천한 일자리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될까?(영국의 토니 블레어 신노동당 정부는 ‘노동을 강요하는 복지’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실업자들은 저임금, 임시직, 부분시간제 등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라도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실업 급여금을 수혜하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있다 : 역주) 또 복지국가는 언제 미국식의 “안전국가”(security state : ‘안전국가’는 독일 정치학자 요하임 히르쉬에 의해 사용된 개념으로, ‘복지국가’로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사회적 조직화 양식을 표현한다. ‘안전국가’는 사회구성원을 기능적으로 조정·조절하고, 조사·감시할 뿐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물질적 생존을 보장한다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역주)로 대체될 것인가?

 

실업 급여금으로부터의 배제는 원조, 사회구호, 구호금을 받도록 운명 지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실업자나 잠재적으로 장기 실업자가 되도록 운명 지워져 있고, 또 장기실업자들은 잠재적으로 배제당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업자 운동’은 “배제된 사람들”과 “실업자들” 간의 분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즉 실업자들이 사회구호기관으로 보내지면, 그들은 실업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고 퇴짜맞아 배제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준다. 즉 임금노동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고용 불안정이 전면화한다는 것을(특히 젊은이들에게서)! “사회적 계획”의 위협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사회적 불안정”이 의도적으로 조직된다는 것을! 그리고 임금노동자들 누구고 잠재적인 실업자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강력한 방출(노동자를 실업자로)은 결코 “문제”(민중이 저항하는 문제 : 역주)를 방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업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 요인은 또한 배제된 사람들, 그리고 동일한 위협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임시직 노동자들 및 임금노동자들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업자 및 임시직 노동자들의 예비군―이 예비군의 존재는 이 예비군의 대오로부터 배제당할 잠정적인 가능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에 대해서 매우 심하게 정복된 사람들이므로 잘 복종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이에 기초하여 정책을 펴고 있는 사람들(오 사회주의!)(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고용정책을 말한다 : 역주)에 대해 이들이 거역하게 되는 순간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행동하는 이성”(Raison d"agir) 그룹에 의해 승인되었다.

 


1) 과소하게 고용하고 있는 기업체 명단을 노동조합들이 이들에게 통지해 주면, 이들 실업자들이 그곳으로 몰려가서 회사나 공장을 점거하고는 고용을 창출하라고 요구했다.

 

2) 디스(Dix) 그룹은 지난 1월 노동조합 연맹으로 전환했다. 여러 노동조합들이 이 연맹의 회원단체로 가맹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주요한 것으로는 SUD(Solidaires, Unitairies, Democratique : 연대, 통일, 민주), ‘전국 기자 노조’, ‘전국 조세징수원 단일노조’ 등이 있다.

 

3) FIOM(CGIL의 금속연맹을 제외하고서 이다. 이 연맹은 연맹 전국본부 차원에서 실업자들의 행진에 참여했다.

 

4) 도미니끄 비달(Dominique Vidal)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시오. “네덜란드, 기적인가 아니면 신기루인가?”,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1997년 7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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