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정신 되새겨, 운동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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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호 작성일00-11-30 00:00 조회83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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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신으로운동정체성정립2000년.hwp (22.0K) 0회 다운로드 DATE : 2018-07-03 11: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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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개의 영정들이 제단 위에 놓여있다. 하늘도 억울하고 분통했는지 갑자기 비를 뿌린다.
6월 10일 ‘제11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종묘공원에서 열렸다. 이 땅 권력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의 산물들이 바로 저 제단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나와 양심선언 하는 자 아무도 없구나! 이 땅 어느 정권 하나 열사들의 피를 불러오지 않은 정권은 없다. 누가 문민정부라고 했던가? 누가 국민의 정부라고 했던가? 열사와 민중들에게는 구별성이 없는 정권들이다.
영정 앞에 고개 숙여 반성하는 산자들이여!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한 노동자가 죽어 갔다. 22살의 젊은 노동자가 가슴에 부둥켜안고 산화해간 것은 바로 근로기준법 책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쓰러져 가는 평화시장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에 열사는 죽음으로 항거했다. 열사정신은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이루어냈고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인 전노협을 건설케 했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신민당 당사에 경찰병력 2천여 명이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을 무참히 짓밟고 강제연행을 자행했다. 이에 한 여성 노동자가 동맥을 끊고 목숨으로 항거했다. 김경숙 열사.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YH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한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열사정신은 곧 18년의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어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1984년 11월 30일 택시 노동자가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으로 항거했다. 박종만 열사. 36세로 부인과 두 아이를 남긴 채 택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조합 탄압 중단을 외치며 악덕기업주에게 항거했다. 민주노조를 사수하겠다는 노동자의 계급적 의지였다. 열사정신은 민경교통에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것은 물론이고 열악한 택시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민주노조의 길을 열었다.
1987년 8월 22일 거제도 대우조선소 한 노동자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죽음을 당했다. 자본과 정권의 반 노동자적 작태에 맞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87년, 이 투쟁에 바로 이석규 열사가 있었다. 대우조선의 민주노조 투쟁에 이석규 열사가 있었다.
1988년 3월 2일 유골로만 남은 한 노동자의 변사체가 창원 불모산에서 발견되었다. 정경식 열사는 대우중공업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노력하다 위원장 선거 후 실종되어 9개월만에 변사체가 되어 돌아왔다. 어용노조가 열사를 죽인 것이다. 대우재벌 악덕기업주가 열사를 죽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어머니의 투쟁이 산자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1989년 5월 4일,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동지를 탄압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한 열사가 있다. 김종수 열사. 23세의 젊은 나이에 구로공단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조탄압의 실체를 폭로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동지는 죽음으로 항거한 것이다.
1990년 5월 3일, 통일중공업 자본가의 반 노동자적 작태에 분노한 노동자가 목숨을 바쳐 민주노조 사수와 자본의 탄압을 분쇄하려 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교묘하게 파고들 때, 활동가들에게 올바른 행동을 가르쳐 주었던 이영일 열사는 마창지역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지켜냈고 운동의 방향을 잡아내고자 했다.
1991년 5월 6일, 전노협 탈퇴와 대기업 연대회의 탈퇴 종용을 거부하다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박창수 열사.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서 대우조선 파업지원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구치소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하여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 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안기부의 노조와해 공작이 끊임없이 자행되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열사는 전노협을 끝까지 사수하고자 했다. 결국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지만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중심적 구심을 만들었다.
1991년 고무공장의 여성 노동자가 살인적 노동문제에 항거하여 목숨을 던졌다. 권미경 열사. 30분 일 더하기 운동이 꽃다운 22살 여성노동자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열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차가운 땅속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에 묻어달라”고. 고무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고 동지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했다.
1995년 6월 13일 현대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분신으로 항거했다. 양봉수 열사!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대 재벌 현대 자본에 맞서 한치의 흔들림 없이 투쟁한 열사는 민주노조의 생명은 현장 활동에 있다며, “회유․협박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현장 활동가이다. 민주노조는 해고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고가 두려워 자본에 타협하지 말라”고 했다. 양봉수 열사는 현대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사수했다. 현대자동차 민주노조에는 양봉수 열사가 있다.
1995년 12월 15일, 부정과 부패권력의 썩어빠진 병무제도에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바친 조수원 열사. 방위산업을 앞세워 자본과 정권은 민주노조를 무력화 시켰다. 그러나 동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노동자의 자존심을 걸고 투쟁했다. 특례생활 3개월을 남겨두고 군대에 입대하라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정권의 태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를 거부하고 민주당 당사에서 3년을 투쟁했다. 목숨을 걸지 않고는 더 이상 해결의 길이 없었다고 열사는 판단했다. 노조활동과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끌려가야 하는 잘못된 제도의 모순이 열사를 죽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열사의 투쟁은 병무법을 개정케 했다. 열사 정신은 민주노총의 산 정신이기도 하다.
1996년 1월 13일 노조 민주화를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한국전력 노동조합 한일병원 위원장 김시자 열사. 어용노조를 앞세워 노동자들의 무참히 짓밟아 온 한국전력 자본에, 여성의 몸이지만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과 결의가 누구보다 높았던 열사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작은 파열구를 냈다. 열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정신은 한국전력 분할․해외매각 저지 투쟁과 노조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밀고 온 힘이었다.
이상의 열사 이외에도 민족민주열사 유가족 협의회에 집계되어 있는 열사는 300여 명이 넘는다.
그래서 “한국에는 진정한 혁명가는 없다. 그러나 수많은 열사가 있다. 중남미에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가 있다면 한국에는 열사가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 같다. 과연 이 땅에서 사상에 대해 자유로운 계층이 있는가? 노동자, 학생, 지식인 모두 지배체제에 반하는 사상을 가지기만 하면 구속 아니면 죽음이 따라 다녔다. 그래서 사상의 기치를 든 혁명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인간의 길을 뜨겁게 살았던 열사들이 있기에 우리 운동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전진해 온 것이 아니겠는가?
6월 10일 ‘제11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종묘공원에서 열렸다. 이 땅 권력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의 산물들이 바로 저 제단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나와 양심선언 하는 자 아무도 없구나! 이 땅 어느 정권 하나 열사들의 피를 불러오지 않은 정권은 없다. 누가 문민정부라고 했던가? 누가 국민의 정부라고 했던가? 열사와 민중들에게는 구별성이 없는 정권들이다.
영정 앞에 고개 숙여 반성하는 산자들이여!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한 노동자가 죽어 갔다. 22살의 젊은 노동자가 가슴에 부둥켜안고 산화해간 것은 바로 근로기준법 책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쓰러져 가는 평화시장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에 열사는 죽음으로 항거했다. 열사정신은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이루어냈고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인 전노협을 건설케 했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신민당 당사에 경찰병력 2천여 명이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을 무참히 짓밟고 강제연행을 자행했다. 이에 한 여성 노동자가 동맥을 끊고 목숨으로 항거했다. 김경숙 열사.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YH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한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열사정신은 곧 18년의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어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1984년 11월 30일 택시 노동자가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으로 항거했다. 박종만 열사. 36세로 부인과 두 아이를 남긴 채 택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조합 탄압 중단을 외치며 악덕기업주에게 항거했다. 민주노조를 사수하겠다는 노동자의 계급적 의지였다. 열사정신은 민경교통에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것은 물론이고 열악한 택시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민주노조의 길을 열었다.
1987년 8월 22일 거제도 대우조선소 한 노동자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죽음을 당했다. 자본과 정권의 반 노동자적 작태에 맞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87년, 이 투쟁에 바로 이석규 열사가 있었다. 대우조선의 민주노조 투쟁에 이석규 열사가 있었다.
1988년 3월 2일 유골로만 남은 한 노동자의 변사체가 창원 불모산에서 발견되었다. 정경식 열사는 대우중공업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노력하다 위원장 선거 후 실종되어 9개월만에 변사체가 되어 돌아왔다. 어용노조가 열사를 죽인 것이다. 대우재벌 악덕기업주가 열사를 죽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어머니의 투쟁이 산자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1989년 5월 4일,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동지를 탄압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한 열사가 있다. 김종수 열사. 23세의 젊은 나이에 구로공단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조탄압의 실체를 폭로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동지는 죽음으로 항거한 것이다.
1990년 5월 3일, 통일중공업 자본가의 반 노동자적 작태에 분노한 노동자가 목숨을 바쳐 민주노조 사수와 자본의 탄압을 분쇄하려 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교묘하게 파고들 때, 활동가들에게 올바른 행동을 가르쳐 주었던 이영일 열사는 마창지역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지켜냈고 운동의 방향을 잡아내고자 했다.
1991년 5월 6일, 전노협 탈퇴와 대기업 연대회의 탈퇴 종용을 거부하다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박창수 열사.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서 대우조선 파업지원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구치소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하여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 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안기부의 노조와해 공작이 끊임없이 자행되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열사는 전노협을 끝까지 사수하고자 했다. 결국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지만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중심적 구심을 만들었다.
1991년 고무공장의 여성 노동자가 살인적 노동문제에 항거하여 목숨을 던졌다. 권미경 열사. 30분 일 더하기 운동이 꽃다운 22살 여성노동자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열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차가운 땅속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에 묻어달라”고. 고무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고 동지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했다.
1995년 6월 13일 현대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분신으로 항거했다. 양봉수 열사!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대 재벌 현대 자본에 맞서 한치의 흔들림 없이 투쟁한 열사는 민주노조의 생명은 현장 활동에 있다며, “회유․협박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현장 활동가이다. 민주노조는 해고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고가 두려워 자본에 타협하지 말라”고 했다. 양봉수 열사는 현대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사수했다. 현대자동차 민주노조에는 양봉수 열사가 있다.
1995년 12월 15일, 부정과 부패권력의 썩어빠진 병무제도에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바친 조수원 열사. 방위산업을 앞세워 자본과 정권은 민주노조를 무력화 시켰다. 그러나 동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노동자의 자존심을 걸고 투쟁했다. 특례생활 3개월을 남겨두고 군대에 입대하라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정권의 태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를 거부하고 민주당 당사에서 3년을 투쟁했다. 목숨을 걸지 않고는 더 이상 해결의 길이 없었다고 열사는 판단했다. 노조활동과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끌려가야 하는 잘못된 제도의 모순이 열사를 죽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열사의 투쟁은 병무법을 개정케 했다. 열사 정신은 민주노총의 산 정신이기도 하다.
1996년 1월 13일 노조 민주화를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한국전력 노동조합 한일병원 위원장 김시자 열사. 어용노조를 앞세워 노동자들의 무참히 짓밟아 온 한국전력 자본에, 여성의 몸이지만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과 결의가 누구보다 높았던 열사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작은 파열구를 냈다. 열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정신은 한국전력 분할․해외매각 저지 투쟁과 노조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밀고 온 힘이었다.
이상의 열사 이외에도 민족민주열사 유가족 협의회에 집계되어 있는 열사는 300여 명이 넘는다.
그래서 “한국에는 진정한 혁명가는 없다. 그러나 수많은 열사가 있다. 중남미에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가 있다면 한국에는 열사가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 같다. 과연 이 땅에서 사상에 대해 자유로운 계층이 있는가? 노동자, 학생, 지식인 모두 지배체제에 반하는 사상을 가지기만 하면 구속 아니면 죽음이 따라 다녔다. 그래서 사상의 기치를 든 혁명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인간의 길을 뜨겁게 살았던 열사들이 있기에 우리 운동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전진해 온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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