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수 열사의 뜻 이어받아 현장활동 강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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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영호 작성일02-11-30 00:00 조회90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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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수열사정신계승0206.hwp (150.0K) 1회 다운로드 DATE : 2018-07-03 11:4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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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7년 전, 어용의 굴레와 악랄한 현대 자본의 탄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스물 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한 양봉수 열사를 기억하십니까? 그의 못다 이룬 꿈, 민주노조-원직복직-노동자의 참세상 건설! 그 길에 언제나 함께 어깨 걸고 싸워 나가고 계신 동지 여러분들의 가슴에 양․봉․수! 이름 석자를 아로새겨 봅니다.
67년 전남 무안 출생인 양봉수 열사는 90년 10월 현대자동차 의장2부에 입사하여 소위원을 거쳐 91년 성과분배 요구 투쟁과 관련해 1차 해고되었다가, 93년 9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직복직되었습니다. 복직 후 94년 8월 의장2부 대의원에 당선된 양 동지는 작업강도 조정을 위해 같은 사업부 대의원들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단체협약에 의거해 공장별 신차 투입 관련사항은 노사협상을 통해 합의를 해야 하는 사항이었고, 결국 회사측도 “신차 투입은 대의원들과 합의한 후 실시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일방적으로 이를 파기하고 신차를 투입했습니다. 양 동지는 이러한 합의 불이행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신차를 투입한 생산라인을 잠시 중단시켰습니다. 이를 이유로 양 동지는 또다시 해고당했고, 회사측은 동지를 경비들을 동원해 정문 밖으로 내던지는 폭력을 행사하고 정문출입을 저지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라인에 중대한 안전사고가 발생하자 양 동지는 대의원으로서 모범적으로 노동자 관점에 서서 노동자는 자본의 이윤 만드는 도구가 아님을 당당히 주장하며 힘겹게 투쟁하기도 했습니다.
양 동지는 부당해고에 맞서 승용2공장 앞에 텐트를 치고 근 20여 일 간 농성투쟁을 전개했고, 김광식 동지(나중에 7대 위원장 역임)가 같이 결합하여 부당해고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심에서도 해고로 결정되자 노동조합 출입마저 저지당했습니다. 단체협약에 의하면, 해고자는 조합원으로서 자격 유지는 두말 할 필요조차 없고, 정문출입도 보장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당시 자본과 이영복 집행부는 ‘신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했고, 노사관계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업장으로 전국적으로 선전되었습니다. 당시 노동현장에는 창사 이래 최고목표랑 달성이라는 이면에 생산특근에 시달리며 최고의 산재발생이라는 비참한 노동의 현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본에 맞서 조합원을 보호해야 할 노동조합이 자본가 논리를 내세우며, ‘정당한 해고자’라는 상상을 초월한 결정을 하게 되고, 이러한 어용 집행부에 맞서 현장 민주조직들과 마찰들이 하나둘씩 발생되었습니다. 심지어 대의원 대회에서 발언권조차 제한하는 어용집행부의 비민주적인 조합운영을 틈타 자본가들은 기회라고 싶어 양봉수 동지의 정문 출입과 2공장 출입을 용역깡패 및 경비들을 동원해 저지했습니다. 정문뿐만 아니라 공장에까지 찾아가 양 동지를 끌어내 정문 밖으로 내던지며 여러 차례 무수한 구타와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95년 5월 15일, 동지는 그 날도 출입을 저지당했고, 법과 단체협약마저 무시하고 계속되는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온몸에 신나를 붇고 정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20여 명의 경비들은 이를 무시하고 집단으로 저지했습니다. 이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동지의 몸에 불이 붙게 되었고 결국 운명했습니다.
95년 5월 15일은 현자노조 공소위 발대식을 정문 앞에서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고, 당시 저는 대의원으로 참가하기 위해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저는 약 50명의 경비들이 출입을 가로막으며 양 동지를 폭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양 동지는 그들의 저지선을 뚫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가까이 오지 마라. 내 몸에 손대면 라이터에 볼을 붙이겠다”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경비들은 무지막지하게 양 동지에게 덤벼들어 결국 분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양 동지는 대구 동산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어 31일간 사투 끝에 6월 13일 끝내 운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병상에서 양봉수 열사는 아픔의 고통 속에서도 조합원들에게 “나는 3만여 조합원 동지를 사랑합니다. 하루빨리 현장으로 돌아가 동지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현장은 자연히 투쟁으로 이어졌고, 현장조직별 이념과 사상을 떠나 3명의 전직위원장(이상범, 이헌구, 윤성근)들을 지도부로 한 ‘양봉수 동지 분신 대책위’가 꾸려졌습니다. 조합원들의 자본에 대한 저주와 적개심이 책임자 처벌 및 민주집행부를 갈망하며 움츠려 있던 현장활동을 활성화하고, 흩어져 있던 제 조직들을 한 묶음으로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지의 분신은 현장의 민주화를 염원했던 조합원들의 희망을 만들어 내는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양 열사가 분신하는 날 2공장에서는 대의원회가 주축이 돼 조합원들의 분노가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 공장으로 확산되었습니다.
5월 21일 공권력 침탈로 300여 명의 동지들이 연행되었고 대책위 지도부는 수배되었으며, 현장은 정권과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당시 어용 집행부는 사측이 노사담당을 동원해 수배 동지들을 잡아들이데 일조했습니다.
사측은 대대적인 현장탄압에 들어가,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장별 징계를 단행했고 현장 민주활동가들을 해고시켰습니다.
대구동산병원에서 치료받던 양 열사의 건강과 회복을 열망하는 전국 단위노조 및 단체들의 힘겨운 지원에도 불구하고, 양 열사는 결국 운명했습니다. 자본과 정권은 공권력을 상주시켜 시신을 탈취하다시피 하여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했고, 결국 화장하여 고향인 영산강에 뼈를 뿌려야만 했습니다.
현재 양산 솥발산에는 20여 명의 열사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 권미경 열사, 현자노조 서영호․양봉수 열사 그리고 최경철 동지....
현자노조 열사회는 열사관 건립을 위해 상반기 사업 중에 장학사업, 노동문학상 제정, 고난받는 작은 음악회, 제조직 단결과 노동운동 발전을 위한 현장조직 체육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으며, 아울러 명예회복 관련 상경투쟁도 조심스럽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짊어져야만 했던 민주민족열사들의 죽음을 우리는 반드시 계승해야 합니다.
촛불이 자기를 태워 불빛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양봉수 열사 역시 자기 몸을 태워 단결을 만들어 주었고, 민주화투쟁을 이어 주었습니다.
그 갸륵한 죽음의 의미가 항상 우리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67년 전남 무안 출생인 양봉수 열사는 90년 10월 현대자동차 의장2부에 입사하여 소위원을 거쳐 91년 성과분배 요구 투쟁과 관련해 1차 해고되었다가, 93년 9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직복직되었습니다. 복직 후 94년 8월 의장2부 대의원에 당선된 양 동지는 작업강도 조정을 위해 같은 사업부 대의원들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단체협약에 의거해 공장별 신차 투입 관련사항은 노사협상을 통해 합의를 해야 하는 사항이었고, 결국 회사측도 “신차 투입은 대의원들과 합의한 후 실시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일방적으로 이를 파기하고 신차를 투입했습니다. 양 동지는 이러한 합의 불이행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신차를 투입한 생산라인을 잠시 중단시켰습니다. 이를 이유로 양 동지는 또다시 해고당했고, 회사측은 동지를 경비들을 동원해 정문 밖으로 내던지는 폭력을 행사하고 정문출입을 저지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라인에 중대한 안전사고가 발생하자 양 동지는 대의원으로서 모범적으로 노동자 관점에 서서 노동자는 자본의 이윤 만드는 도구가 아님을 당당히 주장하며 힘겹게 투쟁하기도 했습니다.
양 동지는 부당해고에 맞서 승용2공장 앞에 텐트를 치고 근 20여 일 간 농성투쟁을 전개했고, 김광식 동지(나중에 7대 위원장 역임)가 같이 결합하여 부당해고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심에서도 해고로 결정되자 노동조합 출입마저 저지당했습니다. 단체협약에 의하면, 해고자는 조합원으로서 자격 유지는 두말 할 필요조차 없고, 정문출입도 보장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당시 자본과 이영복 집행부는 ‘신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했고, 노사관계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업장으로 전국적으로 선전되었습니다. 당시 노동현장에는 창사 이래 최고목표랑 달성이라는 이면에 생산특근에 시달리며 최고의 산재발생이라는 비참한 노동의 현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본에 맞서 조합원을 보호해야 할 노동조합이 자본가 논리를 내세우며, ‘정당한 해고자’라는 상상을 초월한 결정을 하게 되고, 이러한 어용 집행부에 맞서 현장 민주조직들과 마찰들이 하나둘씩 발생되었습니다. 심지어 대의원 대회에서 발언권조차 제한하는 어용집행부의 비민주적인 조합운영을 틈타 자본가들은 기회라고 싶어 양봉수 동지의 정문 출입과 2공장 출입을 용역깡패 및 경비들을 동원해 저지했습니다. 정문뿐만 아니라 공장에까지 찾아가 양 동지를 끌어내 정문 밖으로 내던지며 여러 차례 무수한 구타와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95년 5월 15일, 동지는 그 날도 출입을 저지당했고, 법과 단체협약마저 무시하고 계속되는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온몸에 신나를 붇고 정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20여 명의 경비들은 이를 무시하고 집단으로 저지했습니다. 이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동지의 몸에 불이 붙게 되었고 결국 운명했습니다.
95년 5월 15일은 현자노조 공소위 발대식을 정문 앞에서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고, 당시 저는 대의원으로 참가하기 위해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저는 약 50명의 경비들이 출입을 가로막으며 양 동지를 폭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양 동지는 그들의 저지선을 뚫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가까이 오지 마라. 내 몸에 손대면 라이터에 볼을 붙이겠다”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경비들은 무지막지하게 양 동지에게 덤벼들어 결국 분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양 동지는 대구 동산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어 31일간 사투 끝에 6월 13일 끝내 운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병상에서 양봉수 열사는 아픔의 고통 속에서도 조합원들에게 “나는 3만여 조합원 동지를 사랑합니다. 하루빨리 현장으로 돌아가 동지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현장은 자연히 투쟁으로 이어졌고, 현장조직별 이념과 사상을 떠나 3명의 전직위원장(이상범, 이헌구, 윤성근)들을 지도부로 한 ‘양봉수 동지 분신 대책위’가 꾸려졌습니다. 조합원들의 자본에 대한 저주와 적개심이 책임자 처벌 및 민주집행부를 갈망하며 움츠려 있던 현장활동을 활성화하고, 흩어져 있던 제 조직들을 한 묶음으로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지의 분신은 현장의 민주화를 염원했던 조합원들의 희망을 만들어 내는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양 열사가 분신하는 날 2공장에서는 대의원회가 주축이 돼 조합원들의 분노가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 공장으로 확산되었습니다.
5월 21일 공권력 침탈로 300여 명의 동지들이 연행되었고 대책위 지도부는 수배되었으며, 현장은 정권과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당시 어용 집행부는 사측이 노사담당을 동원해 수배 동지들을 잡아들이데 일조했습니다.
사측은 대대적인 현장탄압에 들어가,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장별 징계를 단행했고 현장 민주활동가들을 해고시켰습니다.
대구동산병원에서 치료받던 양 열사의 건강과 회복을 열망하는 전국 단위노조 및 단체들의 힘겨운 지원에도 불구하고, 양 열사는 결국 운명했습니다. 자본과 정권은 공권력을 상주시켜 시신을 탈취하다시피 하여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했고, 결국 화장하여 고향인 영산강에 뼈를 뿌려야만 했습니다.
현재 양산 솥발산에는 20여 명의 열사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 권미경 열사, 현자노조 서영호․양봉수 열사 그리고 최경철 동지....
현자노조 열사회는 열사관 건립을 위해 상반기 사업 중에 장학사업, 노동문학상 제정, 고난받는 작은 음악회, 제조직 단결과 노동운동 발전을 위한 현장조직 체육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으며, 아울러 명예회복 관련 상경투쟁도 조심스럽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짊어져야만 했던 민주민족열사들의 죽음을 우리는 반드시 계승해야 합니다.
촛불이 자기를 태워 불빛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양봉수 열사 역시 자기 몸을 태워 단결을 만들어 주었고, 민주화투쟁을 이어 주었습니다.
그 갸륵한 죽음의 의미가 항상 우리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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