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깃발 아래 뭉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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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형 작성일01-11-30 00:00 조회719회 댓글0건본문
지난 1월 8일, 노조활동 완전보장과 임단협 쟁취를 위한 총파업투쟁의 깃발을 들고 투쟁을 전개한지도 벌써 한 달이 되어간다. 노동조합을 설립한지도 7개월이 되어간다. 우리는 작년 7월 20일,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체불임금 청산과 임금․단체협약체결을 위해 6개월 동안 교섭을 진행했지만 사측은 교섭지연, 교섭기피, 노조배제, 노조불인정으로 일관해 왔다.
이에 우리 노조는 총파업투쟁을 단행했다. 17명의 조합원들은 차가운 시멘트바닥에서 동지에 대한 애정과 사측에 대한 분노로 이제 투쟁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간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해보는 투쟁이지만 우리는 이 투쟁을 통해 이 땅의 노동자로 거듭나는 우리 자신을 보며 때론 놀라곤 한다.
노동조합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건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당당함과 동지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동조합이 우리를 이렇게 급속히 변화시킬 줄은 몰랐다. 노동조합을 통해 이 땅의 노동자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자본가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왜 영하 15도의 혹한 속에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나는 현재 노조사무국장을 맡고 있지만 노조설립 이전에는 4년차 직장인이었다. 동양기술개발공사라는 회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업종은 건설엔지니어링(설계․감리를 포함한 기술서비스)계통이고 작년에 67일간의 파업투쟁을 승리로 이끈 동명기술공단과 같은 동종업계의 회사다. 독립채산제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부서가 다르면 서로 얼굴도 모르는 그런 회사 분위기였다.
4년간 이곳에서의 생활을 뒤돌아보면 우리가 왜 노동조합의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7년 1월에 입사한 나는 4년이 지난 뒤임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다. 게다가 3-4년간 상습적으로 자행되었던 임금체불, 야근에 철야에 특근R까지 하는 노동을 해도 야근비 한번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밤새도록 일을 하고 받은 돈은 고작 6000원. 그것도 98년도부터는 아예 지급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연봉제라는 허울좋은 미명하에 해마다 임금협상이 아닌 일방적인 총액을 제시하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분위기로 노동자의 말할 권리조차 포기하게끔 사측은 분위기를 주도했었는데 그 시절 직원들의 분위기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동종업계의 임금보다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 임금마저 3-4개월 계속 체불이 되고 연장근로를 밥먹듯 해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커녕 내 육신과 정신만 망가지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늘어나는 건 카드 빚과 담배뿐이었다. 결혼한 직원들이 자주 하곤 했던 농담중의 하나가 “아기 분유 살 돈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저임금, 체불임금보다도 사내의 권위적인 분위기였으며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패배적인 의식이었다. 박영노 사장이라는 한사람의 독단과 독선적인 경영 하에서 수년간 만들어진 사내의 권위적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이사, 부장, 차장으로 전해져갔고 그 밑의 직원들은 불만이 있어도 묵묵히 일하는 기계로 전락해갔다.
이에 우리 노조는 총파업투쟁을 단행했다. 17명의 조합원들은 차가운 시멘트바닥에서 동지에 대한 애정과 사측에 대한 분노로 이제 투쟁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간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해보는 투쟁이지만 우리는 이 투쟁을 통해 이 땅의 노동자로 거듭나는 우리 자신을 보며 때론 놀라곤 한다.
노동조합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건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당당함과 동지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동조합이 우리를 이렇게 급속히 변화시킬 줄은 몰랐다. 노동조합을 통해 이 땅의 노동자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자본가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왜 영하 15도의 혹한 속에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나는 현재 노조사무국장을 맡고 있지만 노조설립 이전에는 4년차 직장인이었다. 동양기술개발공사라는 회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업종은 건설엔지니어링(설계․감리를 포함한 기술서비스)계통이고 작년에 67일간의 파업투쟁을 승리로 이끈 동명기술공단과 같은 동종업계의 회사다. 독립채산제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부서가 다르면 서로 얼굴도 모르는 그런 회사 분위기였다.
4년간 이곳에서의 생활을 뒤돌아보면 우리가 왜 노동조합의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7년 1월에 입사한 나는 4년이 지난 뒤임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다. 게다가 3-4년간 상습적으로 자행되었던 임금체불, 야근에 철야에 특근R까지 하는 노동을 해도 야근비 한번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밤새도록 일을 하고 받은 돈은 고작 6000원. 그것도 98년도부터는 아예 지급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연봉제라는 허울좋은 미명하에 해마다 임금협상이 아닌 일방적인 총액을 제시하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분위기로 노동자의 말할 권리조차 포기하게끔 사측은 분위기를 주도했었는데 그 시절 직원들의 분위기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동종업계의 임금보다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 임금마저 3-4개월 계속 체불이 되고 연장근로를 밥먹듯 해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커녕 내 육신과 정신만 망가지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늘어나는 건 카드 빚과 담배뿐이었다. 결혼한 직원들이 자주 하곤 했던 농담중의 하나가 “아기 분유 살 돈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저임금, 체불임금보다도 사내의 권위적인 분위기였으며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패배적인 의식이었다. 박영노 사장이라는 한사람의 독단과 독선적인 경영 하에서 수년간 만들어진 사내의 권위적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이사, 부장, 차장으로 전해져갔고 그 밑의 직원들은 불만이 있어도 묵묵히 일하는 기계로 전락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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