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따른다."는 말의 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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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현재적 의미.hwp (48.0K) 3회 다운로드 DATE : 2015-06-01 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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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을 따른다.”는 말의 음미
김승호(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1. 재해석의 필요성: 45년 사이의 노동의 주·객관적 조건의 변화
1) 객관적 조건의 측면
한국사회는 1970년이나 2015년이나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리고 외세에 종속되어 있고, 국가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한국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역시 자본주의 세계이고 제국주의 체제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이 항거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이 그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한국경제는 고도성장을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서 “자기 발로 서는” 데 거의 접근했다. 생산력을 따라잡고자 했던 일본과 세계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단계에 와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1/10에서 지금은 1/2에 도달했다. 중산층의 소비수준은 유럽에 근접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사람과 자연의 물질적 신진대사관계 면에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45년 전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과잉 정복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부족이 문제였다. 따라서 “산업화”나 “개발”은 긍정적 단어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이제 그런 것들은 과잉의 지점에 도달했다. 1차, 2차, 3차를 막론하고 산업의 저개발이 아니라 과잉개발이 문제가 되고 있고, 아파트나 자동차든 조선이나 발전설비든 공급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수요의 부족 즉 과잉생산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을 두고 말하는 것일 터이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지배·착취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민적인 지배·착취 관계도 해체되지 않고 있다. 전태일 동지가 해체시키고자 했던 그 비평화적·비인간적인 관계가 산업화와 더불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지 않고 엄연히 존속되고 있다. 자본은 여전히 노동자를 기계처럼 혹사하고 있다. 자본은 여전히 노동자를 써다 버리는 쪽박처럼 맘대로 해고하고 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노동관계법은 여전히 법조문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국가는 여전히 자본의 집행위원회로 역할하고 있다.
2) 주체적 조건의 측면
전태일 동지가 항거하던 당시에는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자주적이지 못한 노동조합이 있었고 약간의 노동쟁의도 있었지만 노동자라는 단어조차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다. 노동자는 근로자로 호명되었다. 노동계급이라는 단어는 더더욱 사용할 수 없었다. 학술논문에서도 계층이라는 말밖에 계급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운동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비하면 2015년 한국의 노동상황은 획기적으로 변했다. 황제기업인 삼성그룹을 빼고 독점재벌 대기업에는 거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다. 그런 독점재벌 대기업에서는 노동조합의 교섭력 부족이 아니라 그것의 과잉이 문제라는 비난이 자본 측으로부터 빗발치고 있다. 교사와 공무원들도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최근 수구보수 정권이 그것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지만. 이런 부분들이 결집한 ‘양대 노총’이 존재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정치총파업도 실시하고 있다. 진보적인 정당도 존재하고 있고 어떤 정당은 국회에 의석도 가지고 있다. 비록 어떤 정당은 사법부에 의해 해산 당했지만.
이런 상태는 전태일 동지가 항거하던 당시에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전태일 동지는 자기 한 목숨을 바쳐 평화시장에 노동조합이 생겨서, 근로기준법을 100%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하루 10시간 노동제라도 실현되기를 염원했다.
그렇다면 주체적 조건의 측면에서는 참으로 많이 달라졌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산업화도 되고 민주화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끼는가. 주체적 조건의 측면에서도 분명히 달라진 지점들이 있는 동시에 분명히 달라지지 않은 지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조합은 시민권을 얻었고, 교섭력을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은 정치활동까지 펼치고 있지만 여태껏 자본주의 노·자 관계는 물론이고 천민자본주의 노·자 관계조차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투쟁이 있었음에도 왜 이런 상태인가. 노·자관계가 이렇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신자유주의 공세 때문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공세가 가해지고 노동시장 개혁을 했다고 해서 독일에서 한국과 같은 노·자 관계와 노동 상황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지키기 위해서, 정리해고 되지 않기 위해서,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노동조합 활동가가 줄줄이 목숨을 바치지는 않는다. 형편이 이렇게 된 데는 신자유주의 공세라는 정세와 더불어 한국 노동계급의 계급의식과 계급조직과 계급역량이 아직도 자본주의는커녕 천민자본주의를 해체시킬 수준에도, 즉 민주변혁의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객관적 조건의 측면에서도 주체적 조건의 측면에서도 한국사회의 상황, 그 중심축을 이루는 노동 상황은 지난 45년 동안 엄청나게 많이 달라졌지만 동시에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 지점을 파고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2. 재해석의 방향: “전태일을 따른다.”는 말의 의미
1) 철저한 성찰의 자세
산업화도 되고 민주화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위와 같다면 그 산업화와 그 민주화에 대하여 분명히 다시 생각해야 할 지점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의 산업화는 천민자본주의 산업화였다. 산업화만 되면 사회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이른바 생산력주의에 속한다. 자본주의적으로 산업화되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더욱 커진다. 그러므로 노동은 삶의 전 과정에서 자본에 더욱 종속된다. 더구나 재벌과 파쇼국가가 융합한 천민자본주의 체제 하의 산업화는 천민자본 세력의 지배력을 압축적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는 경제가 개발되어 양적으로 성장하면 중산층(또는 중간층)이 커지고 이들을 기반으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는 환상이 지배했다. 이른바 “중산층에 기반한 민주주의” 이론이다. 그러나 독점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은 독립적인 중산층은 몰락시키고 종속적인 중산층만 존속시켰다. 그들은 재벌체제의 하위 동반자다. 독점재벌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도 중소자본처럼 종속적 중산층으로 포섭 되었다. 이처럼 천민자본주의 산업화로 인해 사회는 갈수록 비민주적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한국의 민주화는 형식적 민주화였다. 민주화는 의회 기능의 회복에 국한되었다. 사법부나 폭력기구는 민주화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행정부의 경우, 수장은 선거로 선출되었으나 관료기구가 통제되지 않았으므로 국가기구의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이 탈권위주의를 추구했으나 관료기구 통제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자유만 신장했다. 이런 가운데 신장된 것은 국가에 대한 민중의 민주적 결정은커녕 민주적 통제도 아니었다. 국가기구의 정당성을 높여내는 선거가 활성화 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수구보수 정권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어쨌건 선출한 정권이기 때문에 물러나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 선거에서는 대중의 정치활동 자유는 봉쇄된 가운데 금권이 판을 쳤고 결국 “차떼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재벌이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 당사자가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데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대선자금은 과연 당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가,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재벌에게서 나오는가?
셋째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은 고생을 많이 했지만 헛수고를 많이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만큼 지속적으로 가열차게 투쟁한 나라가 많지 않다. 이 지점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평가해 주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노동운동 투사들이 전태일처럼 연이어 자결을 하는가. 지배체제의 강고함 때문인가, 노동운동의 허약함 때문인가? 대한민국만큼 안팎의 지배체제가 결합되어 강고하게 국민을 틀어쥐고 있는 나라는 흔치 않다. 그러나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이 한국처럼 급격하게 변혁성과 전투성을 상실한 나라도 흔치 않다. 위에서 언급한 숙제들을 풀려면 이 지점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아니 그것을 철저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세계경제대공황의 한 가운데에 있고 사회의 성격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전환기에 있다. 그리고 이런 전환기에 길을 잘못 들면 그 후과는 오래 갈 터이기 때문이다.
2) 전태일을 제대로 따르려면.
ㄱ) 바꾸어야 할 사회 구조와 체제
전태일은 세상(사회)을 바꾸기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내놓았다. 문창호지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자 했다. 향을 피워서 덩어리를 해체시키고자 했다.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을” 세상, 서로가 용해되어 있는 상태를 희망했다.
그러면 바꾸어야 할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가.
하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노동운동 안에는 신자유주의를 막는 것이 노동운동이 할 일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아마도 IMF 사태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같은 신자유주의 축적형태라도 노자간의 계급관계가 대등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그것이 관철되는 정도가 판이하다. 그러므로 해당 사회의 사회성격을 바꾸는 과제가 신자유주의를 막는 문제보다 더 중대한 전략적 과제로 설정되어야 마땅했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천민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파시즘 등이 더 중대한 전략적 투쟁과제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개혁이나 변혁 노력은 신자유주의 반대 혹은 저지가 특권화 되는 속에 묻혀 버렸다. 신자유주의만 아니라면 천민자본주의도 국가독점자본주의도 파시즘도 자본주의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인가. 이 잘못된 특권화, 최소강령의 특권화를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둘. 광주항쟁 이후 사회운동의 고양기에 우리나라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은 민주·자주·통일이건 자주·민주·통일이건 민족적 자주와 통일의 과제를 민주주의 실현 과제와 함께 주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투쟁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그리고 민주화가 특권화 되면서 우리 노동운동 안에서 민족의 자주화와 통일은 사실상 특정 정파의 전유물로 축소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자본이 신자유주의와 함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퍼뜨린, 제국주의가 사라졌다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자본이 세계화하는 것(그것이 바로 제국주의다!)이 곧 제국주의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으며, 일국 수준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계화의 결과로 제국주의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더욱 국제주의적으로 될 것을 요구받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지금 제국주의는 세계도처에서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고, 축적위기의 돌파구로서 전쟁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 전쟁위기의 한가운데 한반도가 놓여 있다.
ㄴ) 바뀌어야 할 노동자와 인간
1990년대 초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기 이전 변혁은 민중의 삶을 구속하고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개조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주체가 각성되어야 한다, 의식화되어야 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객관적 조건의 부당성과 그것이 바꾸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대한 통찰에 초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가치의식에서의 변화보다도 현실인식에서의 변화에 초점이 있었다. 그러했으므로 광주항쟁 이후 나온 운동권 첫 문건의 제목이 “인식과 전략”이었다. 물론 ‘뇌봉’의 경우처럼 사회주의 도덕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성과 인간 활동의 변화와 발전을 변혁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접근방식을 한 마디로 구조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원인이 인간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게 있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구조개혁 또는 구조변혁이 세상을 바꾸는 열쇠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통해서 그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동구의 사람들이 자본주의 세계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수십 년 동안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시장을 폐지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공산주의 도덕을 강제했는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변하지 못했는가. 뭔가 근본적인 결함이 없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점은 철저하게 성찰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질적으로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세상, 금전대의 부피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 희망과 윤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려면 물론 사회의 구조적·체제적 성격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나 민중이 자본주의에서 형성된 욕구와 가치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 구조와 체제를 개조하거나 변혁하는 것이 가능한가. 소수의 혁명적 전위가 대중을 지도하는 것에 의해서 가능한가. 대중이 수동적으로 전위의 지도를 따르는 것으로 과연 가능한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그런 방식이 성공할 수 없음을 입증했다. 더구나 오늘날 정보는 매우 개방되어 있고 대중의 지성과 자발성도 매우 높아져 있다.
변혁은 이제 대중이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형태가 아니고는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대중이 자본주의적 욕구와 가치의식을 넘어설 때에만 변혁에 적극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현재의 상태에 대해 불만을 자극하고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단순히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데 머무는 것은 체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대중의 욕구와 가치지향이 질적으로 변화될 때에만, “인간 활동과 환경의 동시변화와 자기변화”가 이루어질 때에만 대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변혁이 추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중의 각성과 의식화는 이제 인식이 아니라 욕구와 가치지향의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인식의 변화에서는 지식인들이 앞설 수 있다. 그러나 욕구와 가치의식의 변화에서는, 예컨대 착취와 지배로 인한 피해자나 희생자들 같이, 인생의 쓴 맛을 본 사람들이 더 앞설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이 생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은 “돈보다 인간을, 이윤보다 생명을, 경쟁보다 협력을, 속도보다 방향을!” 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 각성처럼 사회의 존재 의의와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구현하는 것에, 인간의 창조력과 윤리성을 포괄한 인간성의 발전에 두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 가치, 쾌락 추구, 욕망 충족 등을 긍정하거나 절대시하는 자본주의 욕구체계와 가치체계가 철저하게 비판·극복되어야 하다. 그것은 수단과 목적의 완전한 전도이고 인간성의 완전한 부정이다. 또한 인류는 이제 그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 다른 인간이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나는 그대의 전체의 일부가 되고 그대는 나의 나가 되는 것,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인간은 타자들과 평화롭게 인간적으로 더불어 살 수 없다는 것, 중간적인 지대는 없다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자아중심주의, 자기애, 이기주의 등 계급사회의 왜곡된 인간상을 비판하고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성의 해방과 변혁은 이성적으로 교양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천 속에서 감성적으로 경험되어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도덕에 의해서는 달성될 수 없다. 그것 또한 외적 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적 욕구와 가치의식으로 대중의 인간성이 변화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시작이지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투쟁을 통해 사회구조와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의 경험은 인간적 욕구와 가치의식의 심화와 발전으로 개개인에게 귀환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은 단지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분쇄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은 얼마든지 인간해방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급사회로 되돌아갈 수 있다. 아니 십중팔구 그렇게 된다. 파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새로운 사회,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고, 그 과제는 결국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운동은 이제 계급지배·착취 구조·체제를 타파하는 노동해방을 넘어 인간성을 변혁하는 인간해방을 먼 미래의 과제로 시렁에 얹어둘 수 없다. 인간해방을 현 단계에서부터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기준으로 분명하게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기준은 제한적이지만 현 단계에서부터 실천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자본주의를 타파할 주체를 형성할 수조차 없다.
3. 나오며
이러한 인간성의 해방, 인간해방은 임금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과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과제다. (물론 제국주의, 독점재벌, 억압국가, 파시즘을 추구하는 비인간적, 반인간적 세력들은 빼놓고.) 다만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 안고 투쟁해 나갈 사회집단이 현 사회에서 최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가장 소외되어 있는 노동계급이라는 점이 특수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노동계급의 독특한 역사적 사명이 있다.
이렇게 인간해방을 현 시대의 역사적 과제로 제기한 점과,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노동계급이 특수하게 중심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동시에 인간일반이 보편적으로 이 역사적 과제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모두 아울러 파악하고 있는 점에 전태일의 탁월함이 있다. 인간해방의 실현을 먼 훗날의 일로 미루는 것은 전태일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해방의 보편성을 부정하거나 노동계급의 선도성과 주도성을 부인하는 것은 모두 전태일의 주장을 일면적으로 제한시키는 것이다.
*참고: 전태일 동지의 첫 번째 수기 끝에서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아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 비인간적 행위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추호의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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