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블록의 극복과 그 한계: 한국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그람시적 접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6-12 14:14 조회344회 댓글0건첨부파일
-
분단블록의 극복과 그 한계-한국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그람시적 접근.pdf (229.5K) 3회 다운로드 DATE : 2023-06-12 14:14:49
본문
최용섭. 전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현 선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영국 워릭대 박사.
<요약>
식민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탈식민지 사회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일제 식민지 지배는 남한의 탈식민지 사회구성에 원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식민주의 유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었다. 하지만 식민주의 유산 가운데 하나, 즉 한국의 분단이 남한의 정치경제에 끼친 영향은 1960년대 이후에도 지속하거나 심지어 더 증가했다. 이 논문은 남한의 사회구성(체) 분석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접근으로서, 한반도의 분단을 충분히 고려하는 그람시적인 접근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 이 논문은 남한 특유의 사회구성(체) 분석을 전개하기 위하여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 개념을 응용한 분단 블록 개념을 도입한다. 그런 다음 나는 분단 블록에게 가장 큰 손상을 입혀 온 두 사건, 1997년의 경제위기와 1998-2007년의 남북 화해에 대해, 그 두 사건 각각을 유기적 위기와 헤게모니 프로젝트라고 묘사하면서, 상술한다. 이어서 분단 블록을 극복하려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대항-헤게모니 노력이 어째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논문 역사: Third World Quarterly, 2018년 12월 14일 접수, 2020년 6월 8일 수락.
핵심 단어: 그람시, 역사적 블록, 분단 블록(division bloc), 유기적 위기, 헤게모니 프로젝트, 대(大)공위(空位)시대(interregnum: 대권 또는 헤게모니가 장기적으로 부재한 시대)
들어가며
식민주의는 수많은 방식으로 탈식민지 사회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코리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공식적으로는 1945년 8월 15일 끝났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주의는 남한의 탈식민지 사회구성에 원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식민주의는 사회를 변혁하는 근대국가를 도입했고, 산업발전을 촉진하는 기업-정부 모델을 확립했으며, 전통적 양반계급의 특권을 철폐함으로써 새로운 사회관계를 탄생시켰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스럽게 35년 간 식민지 지배의 유산은 감소했다. 특히 약 15년 동안의 지대추구 경제를 거친 다음, 남한은 1960년대 초부터 수출지향적인 자본축적 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은 남한에 독특한 사회구성을 가져왔다. 이 사회구성은 식민지 시대의 사회구성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주의 유산 가운데 하나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남한의 정치경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그 영향을 증대시켰다. 그것은 코리아의 분단이라는 유산이다. 분단은 공산주의 북한을 낳았는데, 공산주의 북한의 존재는 남한에서 독재를 정당화하고, 노동계급을 무력화시켰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공주의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반공주의는 새롭게 발전하는 남한의 사회구성에 이데올로기적 통일을 가져다주었다.
(추상적) 분단 개념은 1970년대 초에 강만길 교수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고 이후 1990년대에 백낙청 교수에 의해 크게 발전되었다. 강 교수는 계급이 아니라 민족을 근대사의 주된 주인공으로 보았다. 그는 1945년 이후의 코리아 역사를 분단시대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실질적인 자주권을 획득하고 통일을 성취하는 것을 통해 분단시대를 종식시킬 것을 요구했다. 강 교수를 뒤이어 백 교수는 그의 분단 체제(division system) 개념 속에서 코리아의 분단을 두 개의 코리아의 정치경제에 대한 분석과 연결시켰다. 그에 의하면, 분단체제는 ‘그 자체가 일제 식민주의의 결과물’이다. 백 교수는 냉전체제의 한국적 하위체제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에 따르면 이 분단체제는 심지어 탈냉전 시대에도 민족 내부의 분단세력들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는데, 이는 이 분단세력들이 두 코리아 사이의 적대를 낳고 확산하고 공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적대가 두 개의 정부 각각에서 국내적 안정을 튼튼히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이 다시 분단체제를 재생산하고 강화했다.
백 교수는 애초에 남한 자본주의에 대한 전체론적(holistic) 이론을 만드는 데 많은 학자들을 참여하도록 이끈 전국적인 사회구성체 논쟁의 맥락에서 이 분단체제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백 교수의 작업은 하나의 독특한 담론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논의를 더 넓게 확대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그의 분단체제론이 미친 영향이 이렇게 제한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의 이론은 남한의 경제구조가 지닌 특수한 성격을 조사하지 않았다. 그는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을 한국의 특유의 특성들과 관련시킴이 없이 다소 기계적으로 한국의 경우에 적용했다. 예컨대 그는 한국은, 대만과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반주변부 나라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만은 남한과 달리 자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대규모 산업자본에 의존하지 않았었다. 둘째로, 백 교수는 남한 사회구성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남한의 사회구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거나 변화했는지 탐구하지 않았다. 예컨대 1980년대를 시점으로 남한의 사회구성은 신자유주의와 통합되었는데, 이 통합은 1997년 경제위기를 비롯한 여러 부정적 작용을 가져왔고, 또 국가 형태를 변화시켰다. 코리아 분단과 같은 식민주의의 현시대적 유산에 대한 분석은 사회구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조사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하는, 그 나라의 구체적이고 구별되는 특성들을 참조하면서 수행되어야 한다. 나는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 개념이 그러한 조사연구를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제의한다.
이 소논문은 강 교수와 백 교수에 의해 발전된 분단 개념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면서 남한 사회구성 분석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제공한다. 남한 사회구성에서 분단이 수행한 역할을 보다 효과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 개념을 원용한다. 이 접근법은 백 교수가 남한의 정치경제를 해석하기 위해 채택한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 모델을 대체할 것이다. 이 소논문에서 나는 분단체제 대신에, 코리아의 분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남한의 특유한 사회구성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전개하면서, 분단블록을 기술(묘사)한다. 이 분단블록의 극복은 새로운 역사적 블록에 의한 대체를 필요로 할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분단 블록과 관련해서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을 간단히 설명한다. 그 다음 절은 남한의 분단블록을 살펴본 후 헤게모니 집단과 주요한 대항-헤게모니 사회세력들을 식별한다. 그런 다음 나는 분단 블록에 가장 큰 손상을 입힌 두 사건, 즉 1997년의 경제위기와 1998-2007년의 남북한 간 화해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이것들의 성격을 각각 유기적 위기와 헤게모니 프로젝트로 묘사한다. 그런 다음 나는 분단블록을 극복하려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시도가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한다. 이 글은 이상의 논의가 지닌 약간의 함의에 대해 간략히 논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과 코리아의 분단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철학자들은 오로지 이러저런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람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이론을 정교화하는 데 헌신한 철학자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 블록이라는 그의 착상은 그의 혁명이론 구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이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진지전을 추구할지 기동전을 추구할지에 대한 결정은 일정한 시기의 특정한 상황에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역사적 블록은 어느 집단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또는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언제 떨쳐 일어나야 하고 어떻게 사업할 수 있는지 결정하기 위해 자신의 상황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림시의 역사적 블록은 더 이상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중심적이고 서로 연결된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는 이탈리아와 기타 산업화한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왜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현실· 현존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사상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역사적 블록이라는 개념도 철 지난 것으로 취급되었다. 둘째, 역사적 블록은 상부구조와 경제적 토대의 분석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여기에서는 ‘상부구조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며, 부조화스러운 총체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총체의 반영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관계의 총체 또는 경제구조는 자본가들에 의해 지배된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수장인 그람시는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고자 했고, 그래서 자본가들을 사라질 그 무엇으로 호명했을 때 그는 자본가 일반을 언급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본가 일반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주의라는 관념은 한 나라 또는 한 지역의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자본주의를 세밀하게 조사·연구하기에는 너무 폭이 넓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발전한다고 이해하는 대신에, 자본주의가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이 여러 형태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역사적 블록 개념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 개념은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틀을 제공할 수 있다. 역사적 블록 개념은, 나라들 사이의 사회구성의 차이를, 특정한 종류의 사회에 대한 매우 내구성 있는 역사적 선택들의 정수(精髓)라고 바라본다. 그람시의 방법은 개개 나라들의 사회구성체의 변이에 대한 설명을 수반하는데, 사회구성체 변이에 대한 설명은, 특정한 시기에 나타나는, 주어진 어느 나라의 헤게모니 집단의 핵심 성원들이 식별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분파’라는 용어는 유용한 범주이다. 그것은 계급분할 내부에 나타나며, 사회계급 바깥에 존재하거나 그것과 나란히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생산관계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며 계급들의 일부를 형성한다. 지주(자본가적)계급, 상업, 산업, 및 금융 자본 같은 자본가계급 안의 분파들은 주로 경제적 수준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및 문화적 기준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상업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동일하지 않다.
역사적 블록은 그람시적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남한의 정치경제를 조사·연구하는 데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존 그람시적 저술들이 누가 헤게모니적 집단이고 누가 대항-헤게모니적 사회세력인지 식별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한국경제가 자본 일반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 역시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김대중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헤게모니 집단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혼란스러운 분석을 낳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 역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에 의해 가혹하게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남한 경제는, 대항-헤게모니적인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보수 정치인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재벌이라는 형태의 대산업자본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헤게모니적 집단을 ‘헤게모니적 보수세력’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1960년대 초부터 의도적으로 분단블록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블록을 구축하고 유지해 왔다.
한국의 분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남한의 사회구성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첫째,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개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발생시키고 북돋우었다. 반공주의는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려서 공산주의, 사회주의 동조자 또는 심지어 노동자에 동조하는 사람까지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혹독한 비판을 받거나 심하면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민족주의, 특히 한반도의 통일을 목표로 표방하는 민족주의는 너무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어서 헤게모니적 보수세력과 다수의 대항-헤게모니적 사회세력이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이를 채택하려고 꾀했다. 둘째, 세계적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남북 코리아 간의 분단이 지속되면서, 특히 1990년대 초에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의심받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에는 국지적인 냉전이 온존되었다.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불안의 범세계적 감소를 동반한 탈냉전 분위기는 분단블록에 제한적인 반향밖에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분단블록의 구축
남한에서는 1960년대 초부터 <그림 1>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 발전국가, 반공주의 3자로 구성된 분단블록이 형성됐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그의 독재 기간 동안 피지배자들의 동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수출지향적 공업화(EOI)는 그의 헤게모니적 통치가 지속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였다. 일제로부터 독립 이후 남한에는 엄청난 정치적 격변이 있었고, 어떤 정치집단도 안정적으로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재벌을 창설하고 그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하지만 비효율적인 수입대체 공업화와 잔혹한 독재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몰락했다. 1960년의 4월 혁명이 이 몰락의 계기였다. 쿠데타로 등장한 새 집권세력은 한때 이승만 파에 속해 있었던 퇴역군인과 보수적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다시 재벌과 손을 잡았으나 이번에는 친 재벌적인 수출지향적인 공업화를 통해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데 성공했다. 이 경제개발 프로젝트는 남한경제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1960년 60달러에서 1980년 1533달러로 치솟았다. 이런 숫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저임금 노동에 기초한 수출주도 자본축적 전략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자본축적 전략이 재벌에게 경제적⸳정치적 기초를 제공했고, 기성 지배계급 창설로 이어졌다.
자본의 특정 분파의 역할은, 조절이론가들이 미국과 기타 선진국들의 정치경제를 분석하기 위해 포드주의 개념을 쓸 때 지적하듯이, 경제구조를 결정하는 생산과정을 조사하면 그 자신을 드러낸다. 프랑스 조절이론가인 리피에츠는 남한과 여타 동아시아 나라들의 정치경제를 설명하기 위해 ‘주변부 포디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논문에서는 그 대신에 ‘수출주의 포디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리피에츠의 용어는 다양성과 남한의 독특한 시간성, 공간성 및 정체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수출주의 포디즘은, 남한에서 재벌중심의 경제구조가 생기게 하는, 수출주도 자본축적 전략을 명쾌하게 나타내준다.
남한의 경제구조는 수출을 주도하는 재벌에 대한 국가의 전폭적 지원에 달려 있다. 이런 지원에는 수출업자들이 여타 업자들에 비해 더 낮은 금리를 지불하는 이중적 대출금리 구조, 생산성에 비해 훨씬 낮은 노무비 유지, 낮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농업부문의 희생 등이 포함된다. 그 결과 사회적 자원이 고밀도로 재벌들에게 집중되었다. 재벌들은 국가의 지시를 따른다는 조건부로 조세감면, 금융 장려금, 전기⸳가스·수도 비용의 할인, 원자재 수입허가, 기타 등등에 걸쳐 일련의 우대와 특혜를 받았다. 다른 한편 중소기업들은 재벌 대기업의 하청기업이 되거나 사업을 포기하거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체제는 처음 초입되던 당시에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끈 하나의 혁신이었다. 왜냐하면 대량생산 체제의 수립으로 노동력 사용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데 따라 생산성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량생산 체제는 다시, 단지 몇 가지 요인만 들더라도, 해외의 대량소비, 숙련 및 반숙련 노동자의 증가, 및 경험 없는 민간부문 행위자들에 대한 국가관료의 지원 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의 강력한 발전국가는 이 나라들의 빠르고 성공적인 공업화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남한의 국가는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자율성과 권력을 드러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래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던 지배계급인, 양반의 권력을 제거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부르주아 국가를 세웠다. 이 자본주의 국가는 시민사회에 비해 과도하게 발전했다. 식민지 국가는 ‘강력한 관료적 군사적 기구와 함께 [일상적 국가운영을 통해 토착 사회계급들을 복종시킬 수 있게 하는] 정부 메커니즘들을 갖추고 있었다.’ 남한의 국가는 관료, 사법, 경찰, 군사를 비롯한 기존의 과도-발전된 정부 기구를 흡수함으로써 이 식민지적 유산을 온존했다. 덧붙여, 재벌 자체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양육된 반면, 노동계급은 반공주의가 만연한 분위기 속에서 무력했으며 국가에 거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코리아의 분단은 독재의 수립과 보존 및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억압을 정당화했다.
국가는 그 자율성과 권력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생산과정에 개입했다. 첫째, 국가는 투자결정을 비롯한, 계획과 같은 관리임무를 수행하는 민간부문 행위자들의 미숙하고 약한 경영기술을 국가적 규모에서 보완했다. 둘째, 국가는 다양한 분야에서 재벌에게 특혜를 주었는데, 중요하게는 그들에게 연성예산제약을 주었다. 셋째, 국가는 산업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여 숙련 및 반숙련 노동자의 수를 늘임으로써 노동생산성을 향상시켰다. 그 반면에 엄하게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이념적 획일화를 강요하는 반공주의는 원래는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공산주의의 제약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고자 고안된 것이지만, 오히려 그것들에 제약을 부과했다. 반공주의의 기원은 조선총독부가 공산주의자들을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집단으로 확인한 일제 식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반공주의는 한국전쟁으로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한국전쟁은 어떠한 진보적인 정치사상이나, 심지어 온건한 흐름의 진보적 정치사상에 대해서도 그 기초를 파괴했으며, 국가가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 인권 같은 것 모두를 국가안보를 구실로 억압하도록 허용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노동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처벌했기 때문에, 노동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에 의하여 급속한 자본축적에 기여했다. 반공주의는 또한 부의 보다 공평한 분배나 국민복지 증진에 대한 일체의 요구를 질식시킴으로써, 대부분의 남한 국민들을 경제성장의 과실로부터 소외되게 했다. 따라서 반공주의는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와 발전국가 둘의 형성과 유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독특한 역사적 블록 안에서는 수출산업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수출주도 공업화(EOI) 하에서 직접적 수혜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현저한 경제성장과 노동력 수요 확대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당한 물질적 이득을 얻었다. 이것은 도시 지역에서 피지배자들의 동의 기반을 강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 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삶과 생계는 1960년대 동안 거의 변화를 겪지 않았다. 농촌 지역에서의 삶의 질 향상은 1970년대 전반에 새마을운동이 확산되면서 비로소 체감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생활환경 개선, 농촌 기반시설 건설, 농업생산 증진, 가계소득 증대, 그 밖의 혜택을 제공하고자 이 운동을 밀어부쳤다. 새마을운동은 초기단계에서는 정부 주도로 농민을 동원하는 식으로 전개되었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일반 민중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따라서 위로부터의 지도력과 아래로부터의 자기 동기부여의 복합으로 발전했다. 한병주에 따르면, 이 운동은 민중의 평등주의적 열망을 국가의 발전주의와 통합한 것이었다.
다음 <표 1>에서 보듯이, 박정희 정권 집권기간 전체는 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표에서 기술된 억압 조치들은 경찰에 의해 행사되는 평상시의 공권력을 넘어 군대가 휘두르는 비상시의 공권력에 이른다. 이런 의미에서 박정희 시대에 구축된 역사적 블록은, 지배집단의 이해관계가 우세하기는 하지만 일정한 정도까지만 그러한, 불안한 ‘불안정한 균형상태’에 처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종말에 뒤이은 분단블록은, 최장집 교수가 ‘수동혁명’의 일례라고 부른 1987년의 6.29선언과 같은, 헤게모니 집단의 끊임없고 신중한 행동에 의해 지속되었다. 이 분단블록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견뎌냈는데, 그 위기 가운데 가장 큰 것은 1990년대 후반에 일어나 정권이양으로 귀결했다. 그 정권이양은 민중의 민주주의 요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의 모순들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논문의 이하에서 상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표 1>. 박정희 시대의 억압 조치.
기간 | 조치 | 기간 | 조치 |
1961년 5월- 1962년 12월 | 비상계엄령(서울) | 1971년 12월 | 국가비상사태 선포 |
1963년 10월 | 전국 계엄령 | 1972년 10월 | 전국 비상계엄령 |
1964년 6월 | 비상계엄령(서울) | 1974년 | 긴급조치 1호 및 4호 |
1965년 8월 | 위수령(서울) | 1975–1979년 | 긴급조치 9호 |
1971년 10월 | 위수령(서울); 10개 대학교에 군대 파견 | 1979년 10월 | 비상계엄령(부산) 및 위수령(마산, 창원) |
*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는 독재정권이 가져다준 물질적 혜택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
헤게모니적 보수세력 대 대항-헤게모니적 사회세력
역사적 불록의 구축과 유지는 헤게모니 집단의 부단하고 신중한 행동의 결과물이다. 이 헤게모니 집단의 가장 주요한 두 구성요소는 보수 정치인들과 재벌이다. 전자가 경제구조와 국가형태를 를 바꾸면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후자는 수출지향 공업화에서 전자의 파트너이면서 국가정책의 핵심 수혜자였다. 이와 같이 그 둘은 정부와 기업 간의 유착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더하여 보수적 언론과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은, 반공주의를 퍼뜨리고 보수적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일을 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이 집단의 핵심 동맹자였다.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는 이 헤게모니 집단을 여러 사회 부문(부류)을 가진 자본가계급의 한 구성요소 - 말하자면 대 산업자본 - 로 구성되어 있다고 묘사할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헤게모니 집단의 핵심 구성요소들은 그들 자신의 역할과 이해관계에 따라 유능한 사회세력으로 기능함으로써 분단블록을 구축하였다. 그런 연후에 그들은 전체 구조 속에서 그들의 지위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이들의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 시기 동안 일제에 협력한 친일 배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반공주의가 보다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다. 즉 그들의 전부가 친일 협력자는 아니었지만, 그들 모두는 반공주의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반공주의는 그들의 존재이유이자 그들의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도구였다.
반대 사회세력은 이 시기 동안 박정희 독재에 맞서 투쟁했다. 주요 집단은 민족주의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북한과의 통일을 위해 허신하고 이것을 당성하기 위해 북한과의 협력을 추진했다. 반면에 노동운동가들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계급문제 해결을 추구했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자들은 두 집단으로, 즉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와 독립 민족주의자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전자는 통일과 (자유주의적)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구했다. 그러나 후자는 경제발전을 추구하기 이전에 외세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가능케 하는 통일을 이룰 것을 열렬히 주창했다. 대부분의 독립 민족주의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학생운동을 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 민족주의자의 핵심 집단은 통일과 반미를 주창하는 민족해방(NL)진영이었다. 노동운동가의 핵심 집단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하는 민중민주(PD) 진영 성원들이었다. 권력과 영향력을 둘러싼 서로간의 치열한 투쟁 시기를 거친 후 민족해방 진영이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학생운동의 주도 집단이 되었다.
<표 2>에서 묘사된 이 세 사회세력은 헤게모니 집단에 직접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적 집단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강력하게 반공주의에 반대했다. 둘째, 그들은 시민, 학생 및 노동자를 동원하는 데 있어서 어느 사회세력보다도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회세력들은 친재벌적인 수출주의 축적전략을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대안의 자본축적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 사회세력 가운데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힘이 강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몇 가지만 들면 (1) 그들의 리더가 김대중으로서 국내외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정치인이었다. (2) 독립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고 주한 미군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그 양자는 모두 남한 국민들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3) 헤게모니 집단은 활발한 노동운동이 경제성장에 해를 끼칠 거라고 믿게끔 대중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민족주의는 ‘민주에서 권위주의까지, 분단에서 통일까지, 근대에서 반근대까지 다양한 목표에 복무하는 자유주의, 인종주의, 낭만주의 같은’ 다른 이데올로기와 통합된 이데올로기로서 또는 다른 이데올로기의 보조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남한에서 헤게모니적 보수세력은 민족주의를 반공주의의 보조 이데올로기로 사용했다. 민주당의 김대중계는 김염삼계(1990년에 헤게모니적 보수세력에 합류하기 이전의)와 달리 민족주의를 적극 수용하여 자유주의와 통합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가치 사이에는 내재적인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과 장자크 루소와 같이 자유주의를 정의내린 사람들의 다수는 개인적 자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인민의 일반의지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민의 민족자결로까지 확장함으로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을 옹호했다. 남한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북한을 ‘동등하게 자결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라고 간주했으며, 북한과의 관계는 주권의 상호 존중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국가경제 관리에 있어서는,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재벌과 협력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종래의 발전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했다.
위기에 처한 분단블록
표2. 남한의 주요 대항-헤게모니적 사회세력들
Liberal nationalists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 | Independence nationalists 독립 민족주의자 | Labour activists 노동운동가 | |
Ideology 이념 | Liberal nationalism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 Juche ideology and others 주체사상 및 기타 | Marxism–Leninism 마르크스-레닌주의 |
Representing subaltern group 대표하는 하층 집단 | Workers (white collar) 노동자(사무직) | Students 학생 | Workers (blue collar) 노동자(생산직) |
Views on inter-Korean reconciliation 남북 화해에 대한 견해 | Positive 긍정적 | Positive 긍정적 | Positive 긍정적 |
Views on US forces in South Korea 주한미군에 대한 견해 | Positive (even after unification) 긍정적(통일 이후에도) | Negative 부정적 | Positive (until unification) 긍정적(통일 전까지) |
유기적 위기로서의 1997년 경제위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