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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회주의 실패의 교훈: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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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8-22 22:55 조회2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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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회주의 실패의 교훈: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탈

 

(1)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

 

사회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체계적이지 않고 여기저기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인간해방 사회 - 계급지배를 위시한 한 인간집단의 다른 인간집단에 대한 지배(이는 생산수단과 폭력수단의 배타적 소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일체가 사라지고(보편적 인간해방!)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체가 등장함에 따라 사회적·창조적 존재인 인간의 참다운 본성이 한껏 발현되고 실현되는(근본적 인간해방!) 사회 - 라는 그의 사회주의관은 일관되고 분명하다.1)

 

그의 이런 사회주의관은 1845년 저술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시작된다.

 

첫째,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분업2)이 지양된다.

 

“마지막으로 분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인간이 자연발생적인 사회에 머무르는 한, 다시 말해서 특수이익과 공동이익 사이에 균열이 존재함으로써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해 분배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분배되는 한, 인간 자신의 행동은 그에 대립하는 낯선(fremd) 힘으로서,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구속한다는 최초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이 분화되자 각 개인은 하나의 일정한 배타적 영역을 갖게 되고, 이 영역이 그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한 사람의 사냥꾼, 한 사람의 양치기, 한 사람의 어부 혹은 한 사람의 비평가이며, 그가 그의 생계수단을 잃지 않고자 하는 한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이에 반하여 아무도 배타적인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그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스스로를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3)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냥꾼, 어부, 양치기, 혹은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곧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밤에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 (『독일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74~75쪽)

 

둘째, 공산주의 사회의 성립에는 생산력의 발전이 전제가 된다.

 

“철학자들에게는 알기 쉽게 소외(Entfremdung)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현상은 물론 두 가지 실천적 전제 아래서만 지양될 수 있다. 그 소외를 ‘견딜 수 없는’ 힘으로, 곧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여 혁명을 일으키게 만드는 힘으로 되게 하려면 대다수 인간을 철저하게 ‘무산자’로 만들고, 아울러 그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부의 세계와 문화적 세계에 모순을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 전제는 상당히 증대되고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고도의 생산력 발전[이것은 동시에 지역적인 현존재로서의 인간 대신에, 세계사 속에서 현실적·경험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내포한다]이 없이는 결핍이 일반화할 뿐이며, 그럼으로써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도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고, 일체의 해묵은 오물이 필연적으로 다시 발생하기 때문에, 생산력의 발전은 하나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이다.”(같은 책, 76~77쪽)

 

셋째, 공산주의 사회의 성립은 세계적 교통의 보편적 발전과 세계사적 경험을 가진 보편적 개인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편적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 사이의 보편적 교통이 확립되는데, 그 때문에 한편으로는 모든 국가에서 동시적으로 ‘무산’대중이라는 현상(일반적 경쟁)을 산출해 각 국가들을 타국의 변혁에 종속시키며, 마침내 지역적으로 국한된 개인을 세계사적 보편경험을 가진 개인들로 바꾸어 놓는다. 이것 없이는 1) 공산주의는 단지 하나의 지역적 모습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2) 교통의 위력 자체도 보편적인 것으로 즉 견딜 수 없는 힘으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며, 향토적이고 미신적인 ‘허례’에 그칠 것이다. 3) 교통의 확장은 각각 지역적 공산주의를 폐지시킬 것이다. 경험적으로 공산주의는 오직 ‘일시에’ 그리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배적인 민족들의 행위로서만 가능하며, 이것은 생산력과 그와 연결된 세계적 교통의 보편적 발전을 전제로 삼는다.”

 

“그리고 한갓 노동자에 불과한 대중 - [자본으로부터 또는 제한된 욕구충족으로부터도 단절된] 대규모의 노동력이며, 또 바로 그 때문에 경쟁으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한 처지에 놓이며, 일종의 보장된 생활원천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노동 자체를 영영 상실해 버리는 - 이라 할지라도 세계시장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세계사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며, 그들의 활동은 오직 ‘세계사적’ 존재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곧 그것은 개인의 세계사적 존재, 다시 말해서 세계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개인적 존재인 것이다.”(같은 책, 77~78쪽)

 

넷째,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자기실현으로 전환되고 사적 소유는 종말을 고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전유에서는 일군의 생산도구들이 각 개인에게, 소유가 만인에게 포섭되어야 한다. 근대의 세계적 교통은 그것이 만인에게 포섭되지 않는 한 결코 개인에게 포섭되지 않는다.” “그것(전유)는 오직 단결과 혁명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단결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성격에 의해 유일하게 보편적이 될 수 있는 단결이다. 또한 이 혁명을 통해서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생산 및 교통양식의 힘과 사회구조가 타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성과 그 전유에 필요한 에너지가 발전하며,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이전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자기에게 남아 있던 모든 것을 벗어던지게 된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자기실현은 물질적 생활과 합치하는데, 이는 개인이 총체적 개인{전인/필자}으로 발전하는 것과 모든 자연발생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에 상응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노동이 자기실현으로 전환되고, 이제까지 제한되었던 교통이 개인들 사이의 교통으로 전환된다. 단결한 개인들에 의한 총체적 생산력의 전유와 함께 사적 소유는 종말을 고한다.”(같은 책, 120~121쪽)

 

다섯째,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며 동시에 공산주의적 인간이 필요하다.

 

“1. 생산제력의 발전과정상 현존의 관계들 아래서는 오직 재앙만을 낳을 뿐이고, 더 이상 생산력이 아니라 파괴력(기계와 화폐)에 지나지 않는 생산력과 교통수단이 출현하는 하나의 단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회에서 아무런 이익도 향유하지 못한 채 사회의 모든 짐을 도맡아야 하고, 사회에서 밀려나 다른 모든 계급들과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계급이 출현한다. 그런데 이 계급이 모든 사회구성원의 대다수를 형성하며, 이 계급으로부터 근본적 혁명의 필연성에 관한 의식, 곧 공산주의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3. 지금까지의 모든 혁명에서 언제나 활동양식은 건드리지 않은 채 방치되고, 단지 이 활동의 또 다른 분배만을, 곧 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새로이 전가하는 것만을 문제로 삼았다. 이에 반하여 공산주의 혁명은 지금까지의 활동 양식에 맞서서 노동(소외된 노동/필자)을 제거하고 계급 자체와 아울러 모든 계급지배를 폐지한다.  왜냐하면 이 혁명은 하나의 계급에 의해 수행되는 것인데, 그 계급은 더 이상 사회 내의 하나의 계급으로 간주되지 않고, 계급으로서 인정되지도 않으며, 이미 기존 사회 내에 있는 모든 계급, 모든 민족의 해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4. 이러한 공산주의 의식의 대량의 산출과 목적 자체의 관철을 위해서도 인간의 대폭적인 개조가 필요하며, 이것은 오직 실천적인 운동 속에서만, 즉 하나의 혁명 속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것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배계급은 타도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121~123쪽)

 

여섯째,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동체인 개인들의 연합을 통해 종래의 생산관계, 분업, 계급, 노동(Albeit), 국가를 타파한다.

 

“C. 공산주의 - 교통형태 자체의 생산. 공산주의는 종래의 모든 생산관계와 교통관계의 기초를 변혁하고, 처음으로 의식에 의거해서 모든 자연발생적인 전제를 지금까지 존재했던 인간의 창조물로 취급하며, 그것들의 자연발생적인 성질을 박탈시켜 단결한 개인들의 힘에 복속시킨다고 하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운동과 구별된다.”

 

“분업을 통한 인간적 힘(관계)의 물질적 힘(관계)으로의 전환은 그것에 대한 관념을 머리 속에서 몰아냄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개인들이 이 물질적 힘을 다시 자기 안에 포섭시켜 분업을 지양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다. 공동체가 없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은 (타인과의) 공동관계에서 비로소 그의 자질을 다방면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된다. 그리고 공동관계 속에서 비로소 인격적 자유가 가능해진다. 지금까지 있었던 공동체 대용물에서는, 곧 국가 따위에서는, 인격적 자유가 지배계급의 관계 속에서 자라난 개인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이 계급에 속하는 개인인 한에서만 존재했다. 지금까지 개인들이 결합하여 형성된 환상적(illusory) 공동체는 언제나 개인들에 대립하여 독립되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다른 한 계급에 대립하는 한 계급의 결합이었으므로, 피지배계급에 대해서는 하나의 완전한 환상적 공동체였을 뿐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질곡이기도 하였다.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 개인들은 그들의 연합(Asoziation) 속에서 그리고 연합을 통해서 함께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그들은(도망농노/필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모든 계급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해방시켰다. 또한 그들은 신분제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새로운 신분을 형성했을 뿐이며, 그 새로운 지위에 있으면서도 기존의 노동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서 그 노동양식을 이미 도달한 발전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것을 더 한층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에 반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에는 그의 고유한 생활조건, 노동, 그와 더불어 오늘날 사회의 모든 존재조건들은 그들에게 어떤 우연적인 것으로 되었고, 이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런 통제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어떤 사회적인 조직도 그들에게 그러한 통제력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각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별성과 그에게 강요된 생활조건인 노동 사이의 모순은 그 자신에게서 명백해진다. 그것은 그의 유아기 때부터 줄곧 희생을 당해 왔고, 또한 자신의 계급 내에서는 다른 계급으로 옮겨갈 수 있는 조건들에 도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망농노들은 단지 그들의 기존 생존조건을 발전시키고 이것을 주장하려고 했을 뿐이며, 그에 따라 결국 자유노동(freien Albeit)에 도달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인격으로서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기존 생존조건임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생존조건이기도 한 노동양식(Aleit)을 지양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제까지 사회를 이루어온 개인들이 그 안에서 자기에게 하나의 공적 표현을 부여해 주었던 형태, 즉 국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있음을 발견하는데, 자신의 인격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타파해야만 한다.”(같은 책, 128~129쪽, 「공산주의- 교통형태(생산관계를 뜻한다./필자) 자체의 생산」 중에서.)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획득이 불가피하다. 

 

“나아가 지배권을 노리는 모든 계급은, 프롤레타리아의 경우와 같이 그 지배가 낡은 사회형태와 지배 일반을 완전히 폐지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그 이익을 일반적인 것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 할 일이다.”(같 은 책, 75쪽)

 

마르크스는 이 책을 쓰는 중간에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를 썼는데, 3, 6, 9, 10번 테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4)

 

3번 테제: “환경의 변혁과 교육의 변혁에 대한 유물론적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혁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분 - 그 중 한 부문은 다른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 - 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활동의 변혁의 일치 혹은 자기변혁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6번 테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은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5) 이렇듯 현실적 본질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서지 못한 포이에르바하는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1. 역사적 진행으로부터 인간적 본질을 간과하고 종교적 심성 그 자체로서 고정시키며, 따라서 하나의 추상적인 - 고립된 - 인간 개체를 전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단지 ‘유’로서만, 다수의 개인들을 자연적으로 결합시켜주는, 내적이고 침묵을 지키는 보편성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9번 테제: 관조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은 개별적 개인과 부르주아 사회(bȕrgerlichen Gesellschft)에 대한 관조이다.”

 

10번 테제: “낡은 유물론의 관점은 부르주아 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관점은 인간적 사회(menschliche Gesellschaft) 또는 사회적 인간성(gesellschaftliche Menschheit)이다.” (같은 책, 37~41쪽,)

 

1848년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간 동안 산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적 생산력이 현대의 생산관계,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지배의 생존 조건인 소유관계에 격분하여 저항한 역사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점점 더 위협적으로 전체 부르주아 사회의 실존을 문제시하는 상업공황을 거론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생산력은 이런 관계들(부르주아 생산관계와 소유관계/필자)이 감당하기에 너무 강력해져 있으며, 이 관계들은 생산력에 방해가 된다.” “부르주아적 관계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부를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협소해졌다.” (『공산당 선언』, 이진우 옮김, 2020, 24~25쪽)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기계장치의 확대와 분업으로 자립성을 상실했고 따라서 매력을 상실했다.”(같은 책, 25쪽)

 

“지배를 쟁취했던 과거의 모든 계급은 자신들의 영리를 얻기 위한 조건에 전체 사회를 예속시킴으로써 이미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다지려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소유권 획득 방식 그리고 이와 함께 지금까지의 전체 소유권 획득 방식을 버림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을 획득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것으로 지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종래의 모든 사적인 안전과 사적인 보장을 파괴해야 한다.”(같은 책, 32쪽)

 

“현대 노동자들은 산업발전과 더불어 지위가 올라가는 대신에 자신의 계급이 처해 있던 조건보다 더 못한 처지로 깊이 추락하고 있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고, 사회적 빈곤은 인구와 부가 증가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은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머물 능력이 없으며 자기 계급의 생활조건을 규제법칙으로서 사회에 강요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노예에게 노예 상태로서의 실존을 보장해줄 수 없기 때문에, 또 노예에게 부양받는 대신 자신이 노예를 부양하는 상태로 노예를 전락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배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사회는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지 밑에서 살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의 삶은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같은 책, 33~34쪽)

 

“부르주아 계급의 실존과 지배에 가장 필수적인 근본 조건은 부가 사적 개인의 수중에 축적되고, 자본이 형성되어 증가하는 것이다.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자이다. 임금노동은 오로지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근거한다. 산업의 진보는  - 저항 없이 그리고 자기 의지도 없이 이 진보를 추동하는 자가 부르주아지이다 - 경쟁을 통해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대신에 연합을 통해 그들을 혁명적으로 단결시킨다. 부르주아지가 생산하고 생산품을 취득하는 토대 자체가 대규모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그들의 발밑에서 허물어졌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는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것이다.”(같은 책, 34쪽. 이상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 지배 타도>

 

“공산주의자들의 다음 목적은 나머지 모든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동일하다. 즉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만들고 부르주아지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정치권력을 정복하는 것이다.”(같은 책, 35쪽)  

 

<사적 소유 폐지>

 

“이제까지의 소유관계들을 폐지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모든 소유관계는 지속적인 역사 변동, 지속적인 역사 변화의 지배하에 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적 소유를 위해 봉건적 소유를 철폐했다.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적 부르주아의 사적 소유는 계급 대립, 다른 계급들에 대한 한 계급의 착취에 기반을 둔 생산품의 제조와 획득의 최종적인 가장 완성된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같은 책, 36쪽)

 

“너희는 우리가 사적 소유를 청산하려 한다고 경악한다. 그러나 너희의 기존 사회에서 사적 소유는 구성원의 10분의 9에게는 이미 폐지되었다. 10분의 9에게는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당신들에게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무소유를 필수 조건으로 전제하는 형태의 소유를 폐지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너희는 우리가 너희의 소유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다.”(같은 책, 39쪽)

 

<자본의 공동재산화>

 

“자본은 공동의 산물이며 오로지 많은 구성원의 공동 활동을 통해, 결국 사회전체 구성원들의 공동 활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동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은 개인적인 권력이 아니라 사회적인 권력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이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속하는 공동재산으로 변한다고 해서 개인의 재산이 사회의 재산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산의 사회적 성격이 변할 뿐이다. 그것은 계급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다.”(같은 책, 37쪽)

 

<산 노동이 죽은 노동을 지배>

 

“부르주아 사회에서 살아 있는 노동은 다만 축적된 노동을 증식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의 삶의 과정을 풍요롭게 하고 장려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본은 자립적이고 인격적인 반면, 활동하는 개인은 비자립적이고 비인격적이다. 이런 관계의 폐지를 부르주아지는 인격과 자유의 폐지라고 말한다! 이는 정당하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부르주아지 인격, 부르주아지 자립성과 부르주아지 자유의 폐지가 문제로 된다.”(같은 책, 38쪽)

 

<상행위 폐지>

 

“현재의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에서 우리는 자유를 자유로운 상업, 자유로운 판매와 구매라고 이해한다. 상행위가 없어지면, 자유로운 상행위도 없어지게 마련이다. 자유로운 상행위에 대한 상투어들은 우리의 부르주아지가 자유에 대해 떠벌리고 있는 그 밖의 모든 허풍처럼, 제한된 상행위 및 종으로 지내던 중세의 부르주아지에게만 의미를 가질 뿐, 공산주의자가 거래를 폐지하고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부르주아지 자체를 폐지하는 것 자체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같은 책, 38~39쪽)

 

<부르주아적 인격의 폐지>

 

“노동이 더 이상 자본, 화폐, 지대, 간단히 말해 독점할 수 있는 사회 권력으로 바뀔 수 없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 개인적 재산이 부르주아적 재산으로 전환될 수 없는 순간부터, 바로 그 순간부터 너희는 인격이 폐지되었다고 천명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인격을 부르주아, 즉 부르주아적 소유자 외의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격은 폐지되어야 한다.” (같은 책, 39쪽)

 

<부르주아적 교육의 폐지>

 

“부르주아지는 교육의 상실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그 교육이란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는 기계로 양성되는 것을 뜻한다.” “너희는 우리가 가정교육을 사회교육으로 대체하면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없애려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너희의 교육도 사회를 통해 규정되지 않는가? 너희의 교육 환경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또 학교를 매개로 사회가 좀 더 직접적으로 또는 좀 더 간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너희의 교육도 규정되지 않는가? 교육에 대한 사회의 작용을 공산주의자들이 창안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교육의 성격을 바꾼 것이다. 그들은 교육을 지배계급의 영향에서 떼어놓는 것이다”(같은 책, 40~42쪽)

 

<여성의 지위 향상>

 

“부르주아는 단순히 생산 도구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지양하려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게다가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공식적 부인 공유제에 우리의 부르주아들이 고결한 도덕심에서 경악하는 것보다 더 우스운 것은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부인 공유제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아무튼 현재의 생산관계를 철폐하면서 여기서 파생된 부인 공유제, 즉 공식적·비공식적인 매춘도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같은 책, 42~43쪽)

 

<프롤레타리아의 국민화>

 

“더 나아가 공산주의자들은 조국과 국적을 없애려 한다고 비난받고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우선 정치적 지배를 쟁취하고, 국민적 계급으로 올라서고, 스스로를 국민으로 정립해야 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지가 말하는 의미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자체는 아직 국민적이다.”(같은 책, 43쪽)

 

<국가간 대립의 소멸>

 

“민족들이 국가로 분리되어 적대하는 현상은 이미 부르주아지의 발전과 함께, 상업의 자유, 세계 시장과 함께 그리고 생상양식 및 그것에 상응하는 생활조건에서의 유사성과 함께 점점 소멸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배는 이런 분리와 대립을 점점 더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적어도 문명국들의 단합된 행동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선결 조건 가운데 하나다.” “한 개인에 의한 다른 개인의 착취가 폐지되는 정도에 따라 한 국가에 의한 다른 국가의 착취도 폐지될 것이다.” “국가 내부의 계급 대립이 붕괴하면서 국가들 간의 적대적 입장은 사라진다.”(같은 책, 43~44쪽)

 

<전래된 의식의 해체 >

 

“그러나 이러한 계급대립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사회의 일부가 다른 일부를 착취한다는 것은 지난 모든 세기에 공통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기의 사회적 의식이, 그 다양성과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공동의 형태 안에서, 즉 계급 대립이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완벽하게 해체되는 의식의 형태 안에서 움직였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전래된 소유관계와 가장 철저하게 단절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발전 과정에서 전래된 이념들과 가장 극단적으로 단절하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같은 책 45쪽)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우리는 앞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차츰차츰 부르주아지에게서 모든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빨리 생산력의 크기를 증대시킬 것이다.”(같은 책, 46쪽)

 

<국가의 소멸>

 

“발전 과정에서 계급 차이가 사라지고 모든 생산이 서로 연합한 개인들의 손에 집중된다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상실할 것이다. 본래적 의미에서 정치적 폭력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조직된 폭력이다.”(같은 책 47쪽)

 

<계급의 소멸>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적으로 단결한다면, 또 혁명으로 지배계급이 되며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폭력적으로 청산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대립의 존립 조건과 계급 일반을 폐지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계급으로서 자신의 지배까지 폐지할 것이다.”(같은 책 47~48쪽)

 

<연합체의 등장>

 

“자신의 계급과 계급대립을 지녔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하나의 연합체 즉 그 안에서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같은 책 48쪽. 이상 「2.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1957~58년에 집필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하 『요강』)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6)

 

“인격적 예속관계들(처음에는 완전히 자생적인)은 최초의 사회형태들인데, 여기에서는 인간의 생산성은 고립된 지점들에서 작은 범위에만 발전된다. 물적 의존에 기초한 인격적 독립은 두 번째 큰 형태인데, 여기에서는 일반적 물질대사의, 보편적 관계의, 전면적 욕구와 보편적 능력의 체계가 비로소 형성된다. 개인들이 보편적으로 발전하는 것과, 개인들의 공동체적·사회적 생산성을 이들의 사회적 능력으로 복속시키는 것에 기초를 둔 자유로운 개성이 이 세 번째 단계이다. 두 번째 형태는 세 번째 형태의 조건을 창조한다”(『요강』 1권, 김호균 옮김, 138~139쪽)

 

“다른 한편으로 교환, 교환가치 등이 원래는(시간적으로), 또는 그것들의 개념에 있어서(그것들의 적절한 형태에 있어서)는 모두의 자유와 평등의 체제인데, 그것들이 화폐, 자본 등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것을 실증하려는 사회주의자들(특히 사회주의를 프랑스 혁명에 의해 선포된 부르주아 사회 이념의 실현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교환가치 또는 보다 자세히 말하면 화폐체제는 실제로 평등과 자유의 체제라는 것, 이 체제의 가일층적 발전에 있어서 그것들에 맞서서 방해하는 것, 이 체제에 내재적인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불평등과 부자유임이 증명되는 평등과 자유의 실현이라는 점이다. 교환가치가 자본으로 발전하지 않거나,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임노동으로 발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헛될 뿐 아니라 어리석은 소망이다.”(같은 책, 244~245쪽)

 

“살아 있는 노동과 대상화된 노동의 교환, - 즉 사회적 노동의 자본과 임노동의 대립 형태로의 정립은 - 가치관계와 가치에 입각한 생산의 마지막 발전이다. 이것의 전제는 직접적 노동시간의 양, 사용된 노동의 양이 부의 생산의 규정적 요소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대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실제적 부의 창조는 노동시간 및 사용된 노동량보다도 오히려 노동시간 동안에 작동하는 이러저런 인자들(Agencien)의 힘(Macht)에 의존한다. 이 인자의 ‘강력한 효과’는 그것의 생산에 소비된 직접적 노동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오히려 과학의 일반적 상태와 기술 진보 또는 과학의 생산에의 응용에 좌우된다.” “노동은 더 이상 생산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생산과정 자체의 감시자와 규율자로 나타난다.(기계류에 적용되는 것은 인간 활동의 결합과 인간 교류의 발전에도 해당된다.) 개조된 자연대상을 자신과 대상 사이에 매개고리로 삽입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는 산업적 과정으로 변환된 자연과정을 그 자신과 무기적 자연 사이의 수단으로 삽입하고 이를 제어한다. 그는 생산과정의 주행위자로 되는 대신에 생산과정의 옆에 선 보조자로 된다. 이러한 변환 과정에서 생산과 부의 큰 주춧돌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도 아니고, 그가 노동하는 시간도 아니며, 그 자신의 일반적인 생산력의 점취, 그의 자연 이해 및 사회적 형체(social body)로서의 그의 현존에 힘입은 자연에 대한 지배 - 한 마디로 사회적 개인(social individual)의 발전이다.” “이에 따라 교환가치에 입각한 생산은 붕괴하고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과정 자체는 곤궁성과 대립성을 벗는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 따라서 잉여노동을 정립하기 위한 필요노동의 단축이 아니라 사회의 필요노동 시간의 최소한으로의 단축 일체, 그리고 여기에는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개인들의 예술적·과학적 교양 등이 조응한다.”(같은 책 2권, 380~381쪽)

 

“자본의 경향은 한편으로는 가처분 시간을 창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잉여노동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자본이 전자에 너무 성공하면 과잉생산에 시달리고, 그러면 잉여노동이 자본에 의해서 증식될 수 없기 때문에 필요노동이 중단된다. 이러한 모순이 발전할수록, 생산력의 성장은 더 이상 타인의 잉여노동의 점취에 묶여 있을 수 없고, 노동자 대중 자신이 잉여노동을 점취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노동자대중이 그렇게 하면 - 그리고 그럼으로써 가처분 시간이  대립적 실존을 가지기를 중지하면  - , 한편으로 필요노동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들을 자신의 척도로 삼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산력이 빠르게 성장해서 비록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표로 해서 이루어질지라도 모두의 가처분 시간은 증가한다. 왜냐하면 실재적인 부는 모든 개인의 발전된 생산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코 더 이상 노동시간이 아니라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이다.” (같은 책, 384쪽)

 

“덧붙여 말하자면 ... 노동은 푸리에가 원하는 것처럼 유희가 될 수는 없는데, 분배의 지양이 아니라 생산양식 자체를 고도의 형태로 지양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천명한 것은 의연히 그의 위대한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여가시간이자 보다 고차원의 활동을 위한 시간인 자유시간은 그 보유자를 당연히 다른 주체로 전환시키고, 그러면 그는 이러한 다른 주체로서 직접적 생산과정에 들어간다. 이때 이 직접적 생산과정은 형성되고 있는 인간과 관련해서 볼 때 훈련(규율: discipline)이다. 그와 동시에 두뇌 속에 사회의 축적된 지식이 존재하고 있는 형성된 인간과 관련해서 볼 때 그 과정은 실행, 실험 과학, 물질적으로 창조적이고 대상화하는 과학이다. 그 또한 훈련(규율)이다.” (같은 책, 388쪽)

 

1864년 작성한 제1인터내셔널 임시규약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에 의하여 전취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계급적 특권과 독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 및 의무와 모든 계급의 폐지를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노동수단들의, 즉 생활원천들의 독점자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 모든 형태의 노예상태의 근저에 놓여 있다;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은 따라서 모든 정치운동이 하나의 수단으로서 종속되어야 할 위대한 목적이다.”(『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한국판) 3권, 박종철 출판사, 14쪽)

 

1867년 발표한 『자본론』* 제1장 제4절 「상품의 물신성과 그 비밀⌟7)에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이렇게 썼다.8)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다양한 개인들의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réunion d'hommes libres){즉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필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적 노동의 모든 특징들이 나타나지만, 이 노동은 개인적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로빈슨이 생산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 노동의 성과이었고, 따라서 자기 자신이 사용할 물건이었다. 연합된 노동자들(travailleurs unis)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또다시 생산수단으로 쓰이기 위해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소비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모든 구성원들 사이(entre tous)에 분배되어야 한다. 이 분배방식은 그 사회의 생산조직과, 노동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개별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분배 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비례(en raision de)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노동시간은 이중의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사회 안의 노동시간의 배분은 각종(divers) 욕구와 이의 충족을 위해 행해야 할 각종(divers) 작업 사이에 정확한(exact) 비율을 조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공동노동에 대한 각자의 기여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그와 동시에 공동생산물 중 소비용으로 떼어 둔 부분 가운데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재는 척도로 기능한다.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 안에서 및 [노동에서 생겨나는] 유용대상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들이, 생산에서나 분배에서나, 단순하고 투명하다.”(『자본론』 Ⅰ권, 김수행 역, 2015, 102쪽) 

 

그리고 제15장 「기계와 대공업」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노동에 대해 이렇게 썼다.

 

“자본가는 노동에 대해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는 노동력의 가치만을 지급하므로, 자본가에 의한 기계사용의 한계는 기계의 가치와 [기계가 대체하는] 노동력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해 설정된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노동일이 분할되는 비율은 나라에 따라 다르며, 또 같은 나라에서도 시기에 따라 다르든가 같은 시기에도 생산부문에 따라 다르며, 또한 노동자의 실제임금은 때로는 자기 노동력 가치 이하로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이상으로 올라가기도 하므로, 기계의 가격과 [기계가 대체하는] 노동력의 가격 사이의 차이는 - 기계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과 기계가 대신하는 노동총량 사이의 차이에는 변동이 없다 하더라도 - 크게 변동할 수 있다. ...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기계가 부르주아 사회에서와는 전혀 다른 사용범위를 가질 것이다.” (같은 책, 530~531쪽)

 

“로버트 오언이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장제도로부터 미래 교육의 싹이 나오고 있다. 이 교육은 일정한 나이 이상의 모든 아동들에게 생산적 노동을 학업·체육과 결합시키게 될 것인데, 이것은 생산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방법일 뿐 아니라 전면적으로 발달한 인간을 키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같은 책,652쪽)  

 

"다른 한편으로 대공업은 자기의 자본주의적 형태에서는 낡은 분업을 그 고정된 특수성을 가진 채로 재생산한다.”

 

“노동의 전환성은 한편으로는 지금 불가항력적인 자연법칙으로서, 그리고 자연법칙의 맹목적 파괴작용[도처에서 저항에 부딪친다]을 동반하면서 실현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공업은 노동의 전환성[따라서 노동자가 다양한 종류의 노동에 최대로 적합하게 되는 것, 또는 노동자의 다양한 능력을 가능한 최대한도로 발전시키는 것]을 기본적 생산법칙으로 인정하라고 자기의 파국{공황/김수행}을 통해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 전환의 이런 가능성은 사회적 생산의 일반 법칙이 되어야 하며, 기존 관계들은 이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개조되어야만 한다. 자본주의적 착취의 탐욕을 항상 충족시켜주기 위해 비참한 상태에 묶어두고 있는 산업예비군이라는 괴물은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절대적으로 할 수 있는 개인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즉 부분적으로 발달한 개인[그는 오직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의 담당자일 뿐이다]은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그에게는 각종의 사회적 기능은 그가 차례차례로 행하는 각종의 활동방식에 불과하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대공업에 기반을 두고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한 이 변혁과정의 한 요소는 공업학교와 농업학교이며, 다른 요소는 ‘직업학교’[여기에서는 노동자의 자녀들이 기술공학과 각종 노동도구의 실제 사용법에 관해 약간의 수업을 받는다]이다. 자본으로부터 쟁취한 최초의 빈약한 양보인 공장법은 초등교육을 공장노동과 결합시키는 데 불과하지만, 노동자계급이 필연적으로 정권을 장악(la conquȇte inévitable du pouvoir politique par la class ouvrière)했을 때는 이론과 실천이 병행하는 기술교육이 노동자학교 안에서 마땅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이와 같은 혁명의 효소들{예: 공업학교·농업학교·직업학교·기술교육/김수행} - 이것들의 목표는 낡은 분업을 철폐하는 것이다 - 은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와 이것에 어울리는 노동자의 경제적 상태와는 전적으로 모순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정한 역사적 생산형태의 모순들이 전개되는 것은 그 생산형태가 해체되고 새로운 생산형태가 형성되는 유일한 역사적 길이다.”(같은 책,656~658쪽)

 

그리고 제32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전환과정{원시축적/필자}이 낡은 사회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충분히 분해시키자마자, 또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그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그리고 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자기 발로 서게 되자마자, [다시 말해 자본주의 현실이 지닌 힘 가운데 경제적 힘만에 의거해서 유지되는 때로부터/불어판], 노동이 더욱 더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 토지와 기타의 생산수단이 더욱더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생산수단, 즉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사적 소유자를 더욱더 수탈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자영 농민과 수공업자/필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을 통해, 자본의 집중을 통해 수행된다. 항상 하나의 자본가가 다수의 자본가를 파멸시킨다. 이 집중[즉 소수 자본가가 다수 자본가를 수탈하는 것]과 나란히,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 과학의 의식적인 기술적 이용, 토지의 체계적·통일적 이용, 노동수단이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 그에 따라 생산수단들이 절약되는 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시장의 그물망 속에 편입되는 것, 그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에 국제적 성격이 각인되는 것 등등이 점점 더 대규모로 발전한다. 이 전환과정의 모든 이익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는 끊임없이 줄어들지만, 빈곤·억압·예속·타락·착취는 더욱더 증대하며,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 그 수가 항상 증가하며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의 반항도 더불어 성장한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생산방식을 속박하게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적 성격은 마침내 생산수단과 노동의 자본주의적 겉껍질과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겉껍질은 갈라져 망가진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소수의 대자본가가 소유를 빼앗긴다/김수행}”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생기는 자본주의적 취득방식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낳는다. 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개인적 사적 소유의 첫 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부정은 생산자에게 사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 협업, 그리고 토지를 포함한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점유 - 를 바탕으로 개인적 소유를 재건한다.“ 

 

“개인들의 자기 노동에 토대를 둔 분산된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은, 이미 사실상 집단적 생산방식(mode de production collectif)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오래 걸리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인 것은 당연하다. 전자에서는 소수의 횡령자가 다수의 임민대중을 수탈하지만, 후자에서는 다수의 인민대중이 소수의 횡령자를 수탈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1045~1046쪽)

 

1875년에 작성한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9) 

 

“만일 우리가 ‘노동수익’이라는 말을 우선 노동생산물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협동조합적 노동수익이란 사회적 총생산물이다. 거기에 이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공제되어야 한다.

 

첫째: 소모된 생산수단의 보전을 위한 배상분.

 

둘째: 생산의 확대를 위한 추가분.

 

셋째: 사고, 자연재해로 인한 장애 등등에 대비한 예비 기금 혹은 보험 기금

 

‘온전한 노동수익’으로부터의 이러한 공제는 경제상의 필연이며, 그리고 그것의 크기는 수중에 있는 수단과 역량에 따라 결정되고 부분적으로는 확률계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공정성에서 나오는 방식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총생산물의 다른 부분은 소비수단으로 사용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개인에게 분할되기 이전에, 그것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다시 떼 내어진다.

 

첫째: 생산에 직접 속하지 않는 일반 관리비용.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극히 현저하게 축소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둘째: 학교나 위생 설비 등등과 같은, 수요를 공동으로 만족시키게 되어 있는 것.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현저하게 증가할 것이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셋째: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 등등을 위한 기금. 요컨대 오늘날의 이른바 공공 빈민 구제에 속하는 것.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강령이 라쌀레의 영향 아래서 편협하게 육안으로만 파악하는 “분배”에, 즉 협동조합(Genossenschft)의 개별 생산자들 사이에 분배되는 소비수단에 이르게 된다.“(『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권, 박종철 출판사, 「고타강령 초안 비판」, 374~375쪽)

 

“생산수단을 공유 재산으로 하는 것에 기초를 둔 협동조합적(Genossenschftlish) 사회의 내부에서는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들을 교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생산물에 사용된 노동이 이 생산물의 가치로, 즉 그 생산물이 보유하고 있는 어떤 물적 특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반대로 개인적 노동이 더 이상 우회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그 모호한 의미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노동수익’이라는 것은 모든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반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에 걸맞게 개별 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주는 것을 - 공제 후에 - 정확히 돌려받는다. 그가 사회에 주었던 것은 자신의 개인적 노동량이다. 예를 들면, 사회적 노동일은 개인적 노동시간 수의 합으로 이루어진다. 개별 생산자들의 개인적 노동시간은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자신이 제공한 부분, 즉 사회적 노동일에 대한 자신의 몫이다. 그는 자신이 (사회기금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공제한 후에) 이러이러한 만큼의 노동을 제공하였다는 증서를 사회로부터 받고, 이 증서를 가지고 소비수단의 사회적 저장품에서 동일한 양의 노동비용을 들인 만큼 빼내 간다. 그는 어떤 형태로 사회에 준 것과 동일한 양의 노동을 다른 형태로 되받는다. {생산자들은 사회에 주고 사회로부터 되받는데, 이것은 사회에 팔고 사회로부터 되사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사고파는 관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필자}  

 

상품교환이 같은 가치물의 교환인 한 여기서는 분명히 상품교환을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prevail). 내용과 형식은 변하는데, 그 이유는 변한 사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소비수단 이외에는 어떤 것도 개별적 소유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개인적 소비수단의 분배에 관해 말하자면, 상품-등가물의 교환에서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며, 어떤 한 형태의 주어진 양의 노동은 다른 한 형태의 동일한 양의 노동과 교환된다.10)

 

그러므로 여기서 평등한 권리는 여전히 - 원리상 - 부르주아적 권리이다. 상품교환에서는 등가물의 교환이 평균적으로만 존재하고, 개별적인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반면에 원리와 실제가 이제는 더 이상 머리채를 쥐고 싸우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 평등한 권리에는 아직도 부르주아적 제한이 들러붙어 있다.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 제공에 비례한다; 평등의 요체는, 평등한 척도인 노동으로 측정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 노동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이 척도 노릇을 하려면 연장이나 강도로 볼 때 일정한 것이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척도이기를 중지한다. 이러한 평등한 권리는 불평등한 노동에 대해서는 불평등한 권리이다. 이것은 어떠한 계급의 차이도 승인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각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암묵적으로 개인의 불평등한 소질을 승인하며, 따라서 노동자의 실행능력을 자연적 특권으로 승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권리가 다 그렇듯이 내용상 불평등의 권리이다. 그 권리의 요체는 본성상, 오직 동일한 척도의 적용에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한 개인들(만일 그들이 불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개인이 아닐 것이다)이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동일한 관점 아래 놓이는 한에서, 즉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만 파악되는 한에서이며, 예컨대 이 경우에 그들은 노동자로서만 간주되고 그들에게서 그 이상의 것은 보지 않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도외시된다. 나아가: 어떤 노동자는 결혼하였는데, 다른 노동자는 결혼하지 않았다; 어떤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보다 자식이 많다, 등등. 그러므로 동일한 노동을 실행하고 따라서 사회적 소비기금에 대해 동일한 몫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어떤 사람은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하게 된다. 등등. 이러한 모든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권리는 평등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폐단은,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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