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참신한 개념인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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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베르나르 까상 작성일98-11-30 00:00 조회73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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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의에대립하는민족개념.hwp (42.5K) 0회 다운로드 DATE : 2018-07-04 12:19:56
본문
* 이 글은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최근 IMF 정국이 닥치면서 이것에 반대하는 요구나 주장을 “배타적 민족주의”니 “국수주의”니 하면서 비난하는 목소리가 요란합니다. 마치 그렇게 비난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덜어지기나 하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민족주의고 국수주의고 아직 정확한 의미조차 개념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외국 즉 서구의 이론들과 그들 즉 초국적 자본의 주장을 직수입해서 그렇게 말하고들 있습니다. 이 글은 이러한 “대세”에 추종하지 않고 민족이라는 문제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인간해방의 지향에 비추어 올바로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입니다.
** 국민주의는 국가주의, 국수주의와 맥이 통한다. 이것들은 모두 민족에 앞서 국가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하며,(국민-국가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스탈린주의 민족이론도 이것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국가 또는 국가-구성원의 이익(전자에 강조점을 두면 국가주의이고, 후자에 강조점을 두면 국민주의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자기 민족·민중의 이해관계나 타 민족·민중의 이해관계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대내적으로는 보수적인 지배계급-이기주의이고, 대외적으로는 편협한 자국민-이기주의이다. 그리고 이처럼 매우 이기주의적이기 때문에 반인륜적인 인종주의와도 친화성을 가진다.
서구에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e)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것을 말한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국민-(이기)주의 또는 국가-(이기)주의이다. “일어나라 코리아” 같은 것이다. 그것의 극단적 형태가 대내적으로 수구적이고 대외적으로 배타적인 특성을 지니는 국수주의이다.
서구에서는 “민족주의”(nationisme)가 국민주의 및 국수주의와 심하게 혼동되고 있으며 그래서 구별없이 내셔널리즘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에서는 민족(nation)의 형성이 국민-국가(nation-state)의 출현과 밀접히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특수한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은 하나여도 국가와 국민은 남과 북으로 둘이 존재한다. 그리고 국민국가가 민족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분단으로 인해 분열이 고착화되고 있다) 그 두 개의 국민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서부터 하나의 민족이 존재해 오고 있었다.
{편집자 주}
수많은 평론가들의 말에 의하면, 민족은 이제 폐기처분될 낡은 구조물일 따름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것의 “초월”을 가속화해야 마땅한 폐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때때로 “포퓨리즘”(populisme)*으로 명명(命名)되기도 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e)이라는 무서운 것이 닥쳐온다고 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것을 초월해야 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그 대답들이란 대체로 세계화에 대한 변호로, 또는 그 세계화라는 것의 변종인 “민중 없는 유럽”--주인인 민중은 존재가 없는 반면에 유럽-중앙은행이라는 진짜 정부만을 가지고 있는--에 대한 변호로 요약된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것은 숫처녀나 숫총각처럼 참신한 개념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처럼 때묻지 않은 신선함을 간직하고 있다. 민족--그것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연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시장의 법칙’에 맞서는 ‘민중의 저항’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진정한 국제협력을 위한 토대이기도 하다.
베르나르 까상(Bernard Cassen)(<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기자)
* 포퓨리즘(populisme)이란 직역하면 민중주의 또는 인민주의이다.
그러면 피플(영어로 people, 불어로는 peuple)은 내이션(nation)과 어떻게 다른가? 프랑스에서는 내이션과 피플은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격히 구분하자면 피플이 같은 인종이나 종족에 속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비해서, 내이션은 종종 기원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피플 집단들이 언어, 종교, 문화, 제도 등을 같이 하여 하나의 큰 정치집단을 이룰 때 이를 지칭한다.
한편 이 피플--우리나라 말로 사전적(辭典的)으로 번역할 때에는 민중 또는 인민이라고 표현되는데--은 때때로 비특권 대중을 지칭하기도 하지만(이럴 때는 우리의 민중에 가깝다) 대체로는 자본가계급과 기층민중을 총망라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서구에서 ‘인민전선’ (people\'s front)이라고 하는 것이나 링컨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고 할 때의 ‘인민’은 이 후자의 의미이다. 이처럼 서구에서는 ‘인민’이라는 말은 오히려 매우 우경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인민’이라는 용어는 매우 좌경적인 용어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피플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민중 개념--‘민중’은 민족의 실체로서 민족 구성원 가운데서 비특권, 피지배적 지위에 있는 절대다수의 대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계급적 기준만을 적용해서 민중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으로 구성되는 기층민중에게만 한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중운동 내의 일부에서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무계급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를 총망라하는(물론 반동적인 독점자본 분파는 빼고) 개념도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민중’ 개념은 오히려 ‘국민’ 개념이나 서구의 ‘인민’ 개념에 가깝다. 우리의 민중 개념은 ‘국민’과 다른 것은 물론이고 ‘계급연합’의 의미만도 아니다. 즉 기층민중만도 아니고 인민(서구에서 쓰여지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우리의 민중 개념은 2차대전 이후 신식민주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중첩된 현실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에서 나아가 “구조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가 아니라, “주체-구성적으로” 대중을 인식하는 즉 실천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여성도 포함되고 장애인도 포함된다--과는 그 뜻이 상당히 다르다.
이는 서구에서 내셔널리즘(국민주의 또는 국가주의)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쓰는 민족주의라는 것의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서구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그대로 수입해서 쓰는 방법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다. 우리 운동을 실천적으로 인도할 수는 더구나 없다.
** 국민주의는 국가주의, 국수주의와 맥이 통한다. 이것들은 모두 민족에 앞서 국가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하며,(국민-국가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스탈린주의 민족이론도 이것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국가 또는 국가-구성원의 이익(전자에 강조점을 두면 국가주의이고, 후자에 강조점을 두면 국민주의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자기 민족·민중의 이해관계나 타 민족·민중의 이해관계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대내적으로는 보수적인 지배계급-이기주의이고, 대외적으로는 편협한 자국민-이기주의이다. 그리고 이처럼 매우 이기주의적이기 때문에 반인륜적인 인종주의와도 친화성을 가진다.
서구에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e)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것을 말한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국민-(이기)주의 또는 국가-(이기)주의이다. “일어나라 코리아” 같은 것이다. 그것의 극단적 형태가 대내적으로 수구적이고 대외적으로 배타적인 특성을 지니는 국수주의이다.
서구에서는 “민족주의”(nationisme)가 국민주의 및 국수주의와 심하게 혼동되고 있으며 그래서 구별없이 내셔널리즘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에서는 민족(nation)의 형성이 국민-국가(nation-state)의 출현과 밀접히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특수한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은 하나여도 국가와 국민은 남과 북으로 둘이 존재한다. 그리고 국민국가가 민족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분단으로 인해 분열이 고착화되고 있다) 그 두 개의 국민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서부터 하나의 민족이 존재해 오고 있었다.
{편집자 주}
수많은 평론가들의 말에 의하면, 민족은 이제 폐기처분될 낡은 구조물일 따름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것의 “초월”을 가속화해야 마땅한 폐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때때로 “포퓨리즘”(populisme)*으로 명명(命名)되기도 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e)이라는 무서운 것이 닥쳐온다고 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것을 초월해야 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그 대답들이란 대체로 세계화에 대한 변호로, 또는 그 세계화라는 것의 변종인 “민중 없는 유럽”--주인인 민중은 존재가 없는 반면에 유럽-중앙은행이라는 진짜 정부만을 가지고 있는--에 대한 변호로 요약된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것은 숫처녀나 숫총각처럼 참신한 개념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처럼 때묻지 않은 신선함을 간직하고 있다. 민족--그것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연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시장의 법칙’에 맞서는 ‘민중의 저항’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진정한 국제협력을 위한 토대이기도 하다.
베르나르 까상(Bernard Cassen)(<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기자)
* 포퓨리즘(populisme)이란 직역하면 민중주의 또는 인민주의이다.
그러면 피플(영어로 people, 불어로는 peuple)은 내이션(nation)과 어떻게 다른가? 프랑스에서는 내이션과 피플은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격히 구분하자면 피플이 같은 인종이나 종족에 속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비해서, 내이션은 종종 기원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피플 집단들이 언어, 종교, 문화, 제도 등을 같이 하여 하나의 큰 정치집단을 이룰 때 이를 지칭한다.
한편 이 피플--우리나라 말로 사전적(辭典的)으로 번역할 때에는 민중 또는 인민이라고 표현되는데--은 때때로 비특권 대중을 지칭하기도 하지만(이럴 때는 우리의 민중에 가깝다) 대체로는 자본가계급과 기층민중을 총망라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서구에서 ‘인민전선’ (people\'s front)이라고 하는 것이나 링컨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고 할 때의 ‘인민’은 이 후자의 의미이다. 이처럼 서구에서는 ‘인민’이라는 말은 오히려 매우 우경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인민’이라는 용어는 매우 좌경적인 용어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피플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민중 개념--‘민중’은 민족의 실체로서 민족 구성원 가운데서 비특권, 피지배적 지위에 있는 절대다수의 대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계급적 기준만을 적용해서 민중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으로 구성되는 기층민중에게만 한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중운동 내의 일부에서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무계급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를 총망라하는(물론 반동적인 독점자본 분파는 빼고) 개념도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민중’ 개념은 오히려 ‘국민’ 개념이나 서구의 ‘인민’ 개념에 가깝다. 우리의 민중 개념은 ‘국민’과 다른 것은 물론이고 ‘계급연합’의 의미만도 아니다. 즉 기층민중만도 아니고 인민(서구에서 쓰여지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우리의 민중 개념은 2차대전 이후 신식민주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중첩된 현실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에서 나아가 “구조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가 아니라, “주체-구성적으로” 대중을 인식하는 즉 실천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여성도 포함되고 장애인도 포함된다--과는 그 뜻이 상당히 다르다.
이는 서구에서 내셔널리즘(국민주의 또는 국가주의)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쓰는 민족주의라는 것의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서구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그대로 수입해서 쓰는 방법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다. 우리 운동을 실천적으로 인도할 수는 더구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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