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 연구소
사회/문화자료실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사회/문화자료실입니다.
민주노동연구소의 회원들이 자료를 서로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통곡 속에 치러진 50년만의 제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찬식 작성일00-11-30 00:00 조회895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유족들의 오열로 시작된 산내 학살 희생자 위령제
“아이고, 아이고… 어쩔거나”
“으으 으으 … 요렇게 죽였구나”
7월 8일 오전 대전시 동구 낭월동 속칭 ‘골령골’, 멀리 제주에서, 부산에서, 여수에서, 그리고 대전 근교에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유족들은 행사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입구에 전시된 당시 학살현장의 사진들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어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유족,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유족, 두 손을 합장한 채 흐르는 눈물을 방치하는 유족….
대전형무소 산내 학살 희생자 위령제는 이렇게 유족들의 오열로 시작됐다. 애써 잊고 살자고 했건만, 울음조차 내놓고 못해 가슴도 다 타서 말라버린 줄 알았건만, 그렇게 지내 온 50년 세월도 저 폐부 깊은 곳에 숨겨진 통한을 다 지워버리진 못했다.

산내 학살은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초, 대전형무소에서 수감 중이던 1800여 명의 미결수들을 산내면 골령골(지금은 대전시 동구 낭월동)으로 끌고 가 집단 총살한 사건이다. 이는 전시상황을 구실로 판결도 받지 않은 미결수들을 불법적으로 처형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국가범죄행위였다. 그리고 1800여 명의 수감자 외에 대전 근교 민간인들도 다수 끌려와 함께 집단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각종 증언을 통해 드러나면서 현재까지 최소한 3000명 이상이 당시 이곳 골령골에서 학살당해 묻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산내 학살은 당시 초등학교 나이로 이를 목격한 향토사학자 이규희 씨가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면서 10년 전에 <말>지를 통해 공개된 바 있고,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를 통해 1800여 명의 수감자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1800여 수감자 명단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전 참여자치 시민연대에서 관련 정부기관들에 정보공개를 요구했으나 이 시기 수형인 명부는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다만 작년에 발견된 제주4․3관련 수형인 명부에서 당시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300여 명의 명단은 확인되었다.

유족들에게 이날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제삿날을 찾은 날이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희생된 지 알 수 없어 그 동안에는 대부분 생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최근 잇따라 발굴된 정부와 미국의 비밀문서를 통해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대략 7월 2일에서 8일 사이의 3일 동안 처형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 양편에 도랑을 파서 파묻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골이 유실되었겠지만, 지금도 학살현장이었던 도랑 옆 밭에는 유골들이 널려 있다. 지난 번 방송사에서 포크레인을 들이댔다가 한 삽 뜨자마자 유골들이 드러나 그대로 파묻은 바 있다. 농사짓다가 나온 일부 유골들은 밭 한쪽 구석에 가마니만 덮인 채 모아져 있었다. 비록 이승과 저승으로 갈렸지만 희생된 남편 혹은 아버지와 50년만에 첫 만남을 가진 유족들은 불볕 더위로 땀과 눈물이 뒤범벅된 채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골들을 단지 안에 담아 모셔 놓고 ‘눈물의 제사’를 지냈다.
유족들의 소망은 이 널브러져 있는 유골들을 수습해서 봉분이라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진실을 밝혀야 하고, 그런 다음에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는 밭을 사들여 봉분을 세우고 위령제를 지낼 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 관련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아직껏 서로 책임을 미룰 뿐 누구 하나 나서지 않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