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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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용희 작성일00-11-30 00:00 조회81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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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게바라평전을읽고이용희2000년.hwp (47.5K) 1회 다운로드 DATE : 2018-07-06 12: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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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혁명이다'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이 용 희
‘검은 베레모에 턱수염과 정열적인 눈빛을 가진 매력적인 외모’와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 의사의 길을 버리고 밀림으로 뛰어든 혁명 영웅!’
97년 유해가 발견되면서 쿠바와 남미,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추모 열풍을 일으켰던 체 게바라가 지금 국내에서도 20~30대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다 그의 표정에서 읽히는 강렬한 이미지가 하나의 상품이 되어서. 혁명가로서의 삶과 투쟁보다는 낭만적인 모험가나 대리만족을 주는 의인으로 무장해제 돼 버린 ‘게바라 상품’으로.
그래서 이 평전을 보기 전에 ‘체 게바라’라는 인물에 대해 그저 전설 속의 영웅, 신화적인 존재로만 여겼다. 또 쿠바혁명 하면 그 주역으로 피델 카스트로는 떠올라도 체 게바라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평전을 덮고 나니 한 인간으로서, 혁명가로서 체 게바라의 치열했던 삶과 투쟁이 주는 깊은 감명과 여운이 지워지질 않는다. 또 왜 우리 안에 그는 전설 속의, 신화적인 인물로만 갇혀져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침략이 전 세계를 휘젓는 지금, 이제 무장투쟁에 의한 혁명이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전설이라는 것! 수탈과 압제, 제국주의에 맞선 그의 게릴라 투쟁은 실패와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남미의 제3세계 국가에 전파하려 했던 혁명의 이념은 이제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유포하는 것이 아닌지?
역설적이게도 ‘체’는 기쁨․슬픔․놀람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로 정겨운 사람을 뜻하는 호격이라고 한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혁명동지들에게,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에게는 ‘나의 게바라’로 불리는 정겹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쿠바에서는 집집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민중들 속에 전설이 아닌 정신적 지주로 살아 있다고 한다. ‘성스러운 역사’로서 역사밖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체 게바라를 혁명가로 이끈 두 번의 남미순례 여행
라틴아메리카 하면 마야와 잉카문명, 탱고와 삼바춤, 종속이론, 해방신학이 교차되어 연상되는 곳이다. 특히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백인들의 정복과 수탈, 파괴. 미 제국주의의 앞마당으로 전락한 식민지. 유럽계 백인, 인디오, 메스티조,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 온 흑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뒤섞여 있는 곳.
체 게바라는 이렇게 지구상에서 가장 첨예한 모순이 중첩된 곳에서 유럽계 백인 혈통으로 소위 중산층 태생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했던 그가 의사의 길이 아닌 혁명의 가시밭길을 택하게 된 것은 두 차례에 걸친 남미순례 여행을 통해서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안데스 산맥으로 쭉 이어지는 칠레,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지를 돌며 그는 먼저 라틴아메리카의 침략과 수탈의 유적지인 마츄픽츄 등 잉카와 마야문명을 더듬으며 그 숨결을 느낀다. 또한 살아남은 인디오들의 가난하고 비참한 삶의 모습에 울분을 토한다. 특히 알코올과 콜라 맛에 길들여져 체념과 복종에 익숙해진 삶의 모습에. 또한 중산층 백인들의 혐오스런 이중성과 칠레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을 보며 마지막 태양사원으로써 자본의 힘이 노동자를 지옥으로 내몰고 있음에 분노한다. 미국인 광산 소장이 하루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가던 광산의 거대한 노동자용 공동묘지. “얼마나 묻혔나요?” “대략 1만 명” “미망인들과 자식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요?” “…”. 이런 추키카마타 광산에서 체는 자기 안에 잠재되었던 혁명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름을 느낀다. 또 산파블로 나환자촌에서는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나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직접적인 치료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환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함께 나눈다.
체는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한 민중들의 삶에 대해 ‘관조’가 아닌 몸을 던져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그 일원이 되는 것을 체득한다. 그런 그의 풍모는 이후 쿠바 혁명과정에서 농민들과 해방구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또한 당시 군부독재와 쿠데타가 판을 치던 남미에서 특히 과테말라에서 목격한 쿠데타를 통해 미 제국주의야말로 남미 최대의 적임을 각인하고 1955년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형제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쿠바혁명의 불길 속에 뛰어들게 된다. 단 쿠바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유랑 혁명가로서 자신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조건을 달고.
이렇게 두 번의 남미순례를 통해 체는 아르헨티나 사람이기보다는 라틴아메리카 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고, 라틴아메리카 정복의 역사와 당시 미 제국주의에 의한 압제와 착취, 수탈 등 반동적인 폭력에는 혁명의 힘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품게 된 것이다. 책의 행간을 통해 이런 신념의 근저에는 시몬 볼리바르, 호세 마르티와 같은 전 세대의 혁명가와 저항시인 네루다 등이 영향을 끼쳤음을 엿볼 수 있다. 또 체가 순례 기간 중 만났던 혁명가들의 모습은 당시 남미 민중들의 저항 움직임과 혁명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쿠바혁명 속으로
체는 1956년 M 7-26의 82명 중 한 일원이 되어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혁명으로 뛰어든다. 그 중 12명만이 살아 남아 쿠바의 오리엔테주의 시에라마에스트라라는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투쟁을 통해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59년 1월 1일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쿠바혁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혁명 전 쿠바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쿠바는 1492년 콜롬부스가 발견했을 때 “인간의 눈으로 본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 탄성을 질렀으리만큼 아름다운 섬이었다. 1511년 스페인의 침략에 의해 강점되어 19세기말까지 스페인 식민지였다. 1898년 미국이 ‘메인’호 폭파사건을 만들어 개입,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자 99년부터 3년간 군정을 실시한다. 1902년 독립을 하게 되지만 미국은 ‘플레트 수정안’을 들이밀어 사실상 내정간섭과 군사기지 보유권을 승인하게 하여 관타나모에 미군기지를 만들고 1906~1909년까지 총독정치를 실시하고 이후에도 친미군사독재정권을 세워 사실상 쿠바를 강점하였다.
한편 1819년부터 쿠바의 스페인 인들이 본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전원이 처형당했는데도 1855년까지 본국에 대한 폭동이 계속 벌어졌다 1868년에는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의 지도로 1차 반 스페인 독립운동(10년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계속돼 스페인에 타격을 주었고 1895년에는 쿠바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 마르티(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폄)에 의해 2차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혁명당을 만들어 스페인 총독부에 맞섰고 또한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싸웠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런 호세 마르티를 존경했으며 그의 뜻을 쫓아 무장혁명으로 외세와 파렴치한 독재자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뜻을 세웠다.
쿠바에는 이미 1925년 제3인터내셔날 쿠바지부로서 공산당이 창설되었으나 교조주의, 분파주의에 빠져 소비에트 수립 등 극좌적인 투쟁으로 농민, 농업노동자, 기층 민중과 결합하지 못했고 한 때는 소부르조아 세력과 대립하기 위해 바티스타와 손을 잡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쿠바의 학생들은 좌경적인 성향을 가졌지만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카스트로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바티스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로 재집권했을 때도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은 무장봉기의 여건이 무르익었냐 아니냐로 옥신각신하였고 그런 가운데 카스트로는 150여 명을 규합하여 7월 26일 몬카타 병영 습격(7.26 운동)을 감행, 거의 대다수가 체포, 사살, 낙오되어 실패한 바 있다.
체와 카스트로가 게릴라 투쟁의 근거지로 잡은 오리엔테주의 시에라마에스트라는 험준한 산악지대였지만 오리엔테주는 호세 마르타가 그의 친구 고메스 장군과 반스페인 독립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투쟁의 전통을 간직하고 저항의 분위기가 높은 지역이었으며, 시에라마에스트라는 주민의 대다수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고용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농업 노동자와 소농으로 농지개혁과 반제 반독재의 지향이 강했던 곳이다.
이런 지리적․역사적인 환경과 조건 속에서 체를 비롯한 12명의 게릴라들이 온 몸을 던진 분투와 치열한 혁명정신이 더해져 농민들의 지지․지원과 동참으로 해방구가 확산되고 게릴라가 수혈된 것이다. 또한 국내외에서 광범한 반바티스타 연합전선이 구축되면서 아바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시민들이 봉기하여 쿠바혁명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 혁명의 노도 속에서 체는 의사에서 게릴라 전사로, 혁명가로 자신을 세워 나갔다. 또한 게릴라 부대의 규율을 세우고 학습(문맹퇴치)과 사상교양을 통해 게릴라 전사들이 민중들 속에 모범이 되게 하고 민중들을 변화시키는 치열한 활동을 벌여낸다.
“민중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면 탁상공론을 버리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될 때까지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는 자세로 체와 게릴라 전사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농민들과 단결의 사슬이 엮어져 갔고 수많은 농민들이 바티스타군에 의해 학살되면서도 이들과 함께 한 것이 아닐까?
게릴라 전사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자로!
쿠바의 혁명이 성공한 뒤에 체는 장관과 대사, 국립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사회주의 건설의 기반을 닦기 위해 경제재건과 함께 낡은 제도와 관료주의 타파를 위해 온 몸을 던진다. 체에게 이런 자리는 권좌나 권력이 아니었다. 혁명의 새로운 임무였다. 그래서 직접 공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미국의 반혁명 지원과 경제 봉쇄에 맞서 소련, 중국, 이집트, 아프리카나 남미의 다른 나라들을 방문하여 연대의 벨트를 형성하고 경제 교류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체는 제국주의의 착취․수탈의 제거와 함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경제를 만들어 내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인간개조, 인간해방에 주목한다. 게릴라 전사에서 혁명가로서 사상적 깊이가 더해진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새로운 사회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국가의 생산과 소비를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문화․도덕적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절충적인 인간이 아닌 자본가와 다른 유형의 인간, 자신의 동료들을 착취하려는 욕구를 갖지 않는 인간을 통해 실현할 수 있음을 절감한다. 체는 새로운 인간형에 대해 ‘노동과 학문, 이 세계 모든 민중과의 부단한 연대를 통하여 정제된 인간’, ‘이 지구상 어디선가 무고한 목숨이 꺼져 갈 때 고통을 느낄 수 있으리 만치 감성을 개발하여야 하며 자유라는 깃발 아래 분연히 일어설 줄 아는 인간’이라고 했다. 인간해방의 지향으로 사상적 지평이 넓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 제국주의의 봉쇄와 군사도발 등에 맞서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체에게 소련은 미국과의 패권을 경쟁하는 또 다른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였던 소련을 향해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피부로 절실하게 느끼지 않음을 깨달았다. 고립된 쿠바에게 대소관계나 사회주의 진영과의 관계가 중요한 현실이었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보다는 반대와 방어를 위한 패권에 머물고 있음을.
그래서 체는 또 다른 혁명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체는 쿠바의 혁명 후에 더욱 더 ‘이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류를 위한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되물으며 모든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에 맞서는 전 세계에 걸친 혁명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소련에 대한 비판으로 카스트로(그는 당시의 세계정치 구도 속에서 쿠바가 생존을 위해 친소적인, 현실적인 노선을 선택)를 곤란하게 만든 것을 계기로 체는 쿠바를 떠난다. 이 세계 다른 땅에서 미약하나마 자신의 헌신을 요구하는 곳으로!
그리고 체는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에서 싸우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 의해 체포돼 처형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시몬 볼리바르의 조국인 볼리비아를 중심으로 전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다시 전선으로 뛰어든 체는 미국뿐 아니라 소련, 볼리비아 내 공산당에게서조차 배제되어 고립된 상태로.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네 자녀에게 남긴 편지는 이랬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너희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진정한 혁명가로서 체의 이렇듯 짧고 굵게 살아 온 인생의 여정을 따라 깊은 감화와 감동을 느끼며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체가 연상되었다. 제2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있는, 멕시코 치아빠스주에서 지금도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빠띠스따이다. 사빠띠스따는 우리에게 권력을 잡지 않고 세상을 바꾼다는 도전을 안겨주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 인간해방을 기치로 멕시코를 바꾸고 신자유주의적 착취와 수탈로 점철된 세계를 쇄신하기 위해 일어섰음을 선포하였다.
또 우리에게는 체 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자기 몸을 불살라 인간해방 지향의 씨를 뿌린 전태일 열사가 있고 그 뒤를 이은 많은 열사들의 정신이 잠재해 있다. 더구나 체의 게릴라 투쟁과정은 우리의 해방 전후 빨치산 투쟁의 모습과 사뭇 닮았다. 우리의 역사와 노동자․민중들의 삶 속에도 체가 지향했던 인간해방의 열망이 간직되어 있다.
이렇게 체 게바라의 인간해방 사상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전 세계적인 혁명의 염원은 전설이나 신화에 갇히지 않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투쟁하고 인간해방을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 숨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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