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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의 정명 찾기와 여성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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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삼웅 작성일15-11-30 00:00 조회1,3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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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의 정명찾기와 여성독립운동



김삼웅(전독립기념관장)



정명(正名) 찾지 못한 역사용어



우리는 선열들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왜적의 총칼에 맞서 싸웠던 31혁명의 정명(正名)도 찾지 못한 채 다시 그날을 맞고, 100주년을 3년 앞두고 있다. 한민족은 1910829일 국치로부터 1945815일 해방까지 만 3411개월 보름 동안 국권을 잃고 왜적의 식민지가 되었다. 따라서 올해는 일제 강점기보다 꼭 두 배의 세월이 지났다.


선열들이 잔학한 일제와 싸우면서 내세운 목표는 자주독립통일민주국가수립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외국군에게 넘겨진 전시작전지휘권도 회수하지 못하고, 분단도 해결하지 못한 비자주 분단 상태로 31혁명 96주년을 맞게 되었다.


또한 국치를 가져온 매국노와 민족반역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득세하고,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국가 역사기관의 책임자가 되는 통절한 시대에 살게 되었다. 먼 훗날 사가들이 이런 해방 70의 우리들을 어떻게 평가할 지 부끄럽고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이 아니라도 모든 사물이나 사건에는 거기에 부합되는 이름(명칭)이 따른다. ()과 실()이 상부할 때만이 정명의 가치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국경일인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개천절에는 명칭에서 그 의미가 확연하게 주어진다. 헌법을 제정 공포한 날, 빛을 찾는 날, 한글을 창제한 날, 나라를 처음으로 연 날이다. 각종 국가기념일도 모두 명칭에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31은 가치중립적인 숫자로 나열되고 있는가.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당당한 혁명의 자리에 서야할 19193~4월 한민족의 위대한 혁명적 거사를 숫자로 평가절하하고, 아이들과 외국인이 쓰리 컴마 원 스포츠라고 번역해야 하는가.


선열들에 대한 모독이고 역사에 대한 가치전도가 아닌가. 31혁명보다 8년 전인 중국의 신해혁명과 2년 전의 러시아혁명과 비교할 때 우리는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용어에서 정명을 찾지 못하고 있는가.


먼저 ‘31이 아니라 ‘31혁명이어야 하는 이유부터 따져본다. 혁명(Revolution)이란 용어는 라틴어에서 기원하는데 마차 바퀴를 완전히 한 바퀴 돌린다는 뜻이다. 바퀴 내의 개혁이나 변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31혁명의 기본가치를 분석하면, 첫째는 자주독립은 선언하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거부하였다. 둘째는 4천 년 동안 유지되어온 봉건왕조 체제를 거부하면서 존왕주의 복벽운동이 아닌 민주공화주의를 주창하였다. 한성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상해임시정부 등에서 한결같이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셋째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성이 역사현장에 주체적으로 등장하고, 지역ㆍ신분ㆍ세대ㆍ종교를 초월하여 전개된 범민족적인 항쟁이었다. 세계 혁명사에서 남녀노소라는 말이 실제적으로 등장한 것은 31혁명이 최초였다. 넷째는 국민의식이 전근대적 신민의식(臣民意識)에서 근대적 시민의식(市民意識)으로 전환되었다.


미국 역사학자 포리맨이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으로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말했다.


이 말 대로 31혁명은 개화기 이래 전개된 동학혁명, 갑오개혁, 만민공동회, 의병전쟁, 의열투쟁 등 모든 민족운동이 31혁명으로 유입되고, 이후의 무장투쟁, 임시정부, 조선의용대, 광복군 등 모든 독립전쟁의 발원지가 되었다.


특히 31혁명과 함께 발아된 민주공화주의는 독립운동 과정의 방법론에서 일부 사회주의혁명 노선이 없지 않았으나 절대 다수의 독립운동가와 단체ㆍ정당에서 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국체와 정체로 승계되었다. 그리고 여성들이 독립투쟁과 근대국가 건설의 한 축으로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언론 혁명’, 일본언론 폭동보도


 


31혁명이 31운동이란 용어로 격하당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일본정부와 일본 언론은 조선의 거족적인 31혁명을 폭동, 소우, 난동, 망동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무력을 동원하여 무차별적으로 학살진압하였다. 일제는 패망할 때까지 이런 관제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편 중국의 지식인들과 언론보도는 보다 정확하였다. 191936일치 북경에서 발행된〈진보(晨報)〉는 고려 혁명운동이란 제하에 상세한 보도를 하고, 39일치 상해의『민국일보』는 조선의 혁명운동을 제목으로 뽑아 보도하였다. 이 신문은「조선혁명과 외몽고의 소란」이라는 논단에서 구라파 전쟁이 끝난 뒤 민족자결주의 물결은 아시아에도 흘러와 조선혁명을 일으켰다”, “조선혁명은 자발적인 혁명이다”, “무릇 자발적인 혁명이라면 그 민족은 건국 능력과 독립정신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자유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자치를 위하여 희생할 정신을 갖추고 있다. 이번 조선혁명은 이런 정신을 갖추고 있기에 우리는 탄복한다고 썼다.


북경대 교수 진독수는『매주평론(每週評論)1919323일치에서 31혁명을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을 개척하였다라고 논평하고,『민국일보』는 중국 혼춘에서 전개된 한인들의 만세시위에 관한 42일치 보도에서 혼춘 한인의 혁명운동이란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이 외에도 오랫 동안 중국 신문 잡지들은 대부분 조선혁명운동이라 표기하였다. 몇 사례를 찾아본다.



조선의 혁명은 민족민주혁명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31혁명운동은 바로 이런 성질을 띤 혁명운동의 시작이다. 이 혁명은 동년에 중국에서 발생한 54운동과 서로 호응한다. -(『신화일보』, 194031일치)



이번 운동은 극히 잔혹한 탄압과 파괴를 받았지만 그 혁명역사의 의의는 아주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민족혁명과 민주주의운동의 서막이며 조선민족해방의 선도이다. - (앞과 같음)



중경에 있는 중한문화협회 비서장 사도덕(司徒德)40년 동안 아시아에서 세 차례 대혁명이 폭발하였다. 한 차례는 1911년 중국혁명이고, 다른 한 차례는 1917년 소련 10월 혁명이며 또 한 차례는 한국혁명이다. 한국혁명은 보다 늦었지만 그의 환경과 임무의 간고성은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 혁명보다 못지 않았다. - (『중앙일보』, 194331일치)



31혁명을 처음으로 운동이라 표기한 것은 일본『동경조일(東京朝日)』신문 191934일치에서 보인다. 이 신문은 경성 특파원발로 보도한「한인의 운동」이란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일본의 모든 신문은 불온격문 배포”, “군중 대한문에 모여”, “작일도 역시 소란”, “선동자는 천도교 교조라 칭하는 일파”, “조선 소우의 수괴 손병희 포박돼다”, “발검한 헌병과 군대로 진압”, “선인은 전혀 흑막의 선동”, “조선 각지의 폭동”, “조선에 넘치는 학생 소동 중대”, “여학생과 소녀대도 시위운동 개시등 폭동ㆍ소우ㆍ소동 등으로 보도하였다.


그나마『동경조일』이 운동이라 표기한 것이 이후 한국의 언론과 식자들이 혁명이나 항쟁등을 쓰지 못하고,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무심코 쓰게 되고 일반화되지 않았는가 싶다.



독립운동 진영의 혁명용어사용



31혁명 기간 국내에는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밖에 언론기관이 없었다. 이 신문은 일제의 관제용어인 ‘31폭동’, ‘31소우등으로 일관하였다. 31혁명의 산물로 태어난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약헌(헌법)의 제정 과정에서 일부의 복벽주의를 폐기하고 국민주권에 근거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대한민국임시헌장선포문」에서 한성에서 의()를 일으킨지 30여 일에…라 하여 혁명이란 용어를 쓰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운동이라 표기하지 않았다. 이후에 나타난 각종 선언문ㆍ선포문 등에서는 ‘31독립선언’, ‘대한민국 원년’, ‘31만세’, ‘31시위등으로 표기하였다.


1922년 상해의 31청년구락부는「31혁명」이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발간하고, 김규식ㆍ김원봉은 1935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으며, 1938년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관지『조선민족전선』창간호에는 ‘31대혁명이란 구절이 있고, 조선의용대 기관지『조선의용대통신』은 ‘31대혁명이라 표기했다. 조선의용대를 지휘한 김원봉은 19409월의 한 연설에서 “31혁명운동이 폭발했다고 언급하였다.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31혁명이라 불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31 만세’ 22주년 기념대회에서 “31대혁명운동이라 쓰고, 같은 해 조소앙이 기초한「건국강령」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인이며…라 하여 혁명으로 표기하였다. 임시정부는「건국강령」제정 이후 공식 호칭으로 ‘31혁명또는 ‘31대혁명이라 썼다.


임시정부는 특히 1944년 제정한「대한민국임시헌장」의 서문에서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복에 노력하야 삼일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야 정치ㆍ경제ㆍ문화ㆍ기타 일절 제도에 자유ㆍ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라 하여 헌장 제정에서 ‘31대혁명이라 명시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헌법을 제정할 때 헌법기초위원회는 전문위원 유진오가 마련한 초안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초안은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31혁명을 분명히 명시하고, 30명의 헌법기초위원들도 모두 여기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한민당 계열 일부 의원들이 혁명이란 용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국회는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하기로 결정하고, 백관수ㆍ김준연ㆍ최국현ㆍ윤치영ㆍ이종린으로 5인 소위를 구성하였다. 친일파 출신 이종린 등이 주도한 소위에서는 ‘31혁명기미 31운동으로 전문의 수정안을 마련하고, 국회본회의에 상정하였다.


 


제헌국회의 실세이던 이승만이 본회의 사회를 보면서 혁명이라면 우리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에 와 있는 것을 뒤짚어 놓은 것은 혁명이라는게 그릇된 말인데 항쟁이라는 말은 좋으나 거기다 좀더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이라고 그러면 어떱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나는 항쟁이라는 것도 괜찮고 딴 것도 괜찮지만 혁명이라는 두 글자는 고치는 게 대단히 좋은 말이에요라고 우기고, 일본제국대학 출신 이주형 의원의 찬성 발언만을 허용, 반대발언을 막은 다음 투표에 부쳤다.


투표결과 재석의원 157인 중 가 91, 16으로 통과됨으로써 위대한 31혁명은 31운동이란 용어로 비칭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도 재미 망명기인 1942년 워싱턴의 자유한인대회 등의 연설에서 ‘31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한민당과 친일경력자들에 업히게 되면서 ‘31혁명‘31운동으로 격하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이로써 31혁명의 박제화에는 친일세력과 역사의식이 박약한 이승만의 농간이 사려 있음을 찾게된다.


다시 개헌론이 제기되는 이 때에 ‘31혁명의 정명을 헌법전문에서 살려야 하고, 이를 위해 민주ㆍ민족세력이 이제부터라도 ‘31혁명용어 바로 쓰기 운동을 전개했으면 싶다.



3 1혁명에 참여한 여성들



‘31혁명이란 용어가 정명인 데에는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확인된다. 31혁명 당시 피검자 19525명 중 학생과 교원이 2,355명이고 그중 여교사ㆍ여학생이 218명이었다. 1919년 당시 여자들의 취학율이 남자들의 100분의 1도 안 된데 비하면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3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될 때 경기여고보생 최은희 등 수십 명의 여성들이 선언식에 참석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지나 서대문방면으로 행진하면서 본교생 32명이 검거되었다. 당일 1.000여 명의 여학생이 YMCA 등과 연계하여 만세시위에 나섰다. 33일에는 개성 호수돈 여학생들이 시위 행진을 하다 전원 구속되었으며 회령에서는 남녀학생 5천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경기여고보생 이선경은 수원에서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여 시위하다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이화학당 고등과 1년 유관순은 목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1혁명 중 여성들의 항일투쟁으로 가장 현저했던 것은 정신여학교 교원 김마리아, 동경유학생 황에스더,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정숙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들 수 있다. 100여 명의 회원을 포섭하여 전국 13도에 조직망을 설치하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사건은 여성독립운동과 더불어 여권신장운동의 신기원이 된다.


31혁명에 참여한 여성 중에는 소위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만이 아니었다. 800명에 이르는 화류계 여성들이 애국기생이 되어 시위에 참여하거나 화류계에 출입하는 조선청년들을 의식화시켰다는 기록이 총독부 치안책임자의〈조선독립운동비화〉에 나와 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시골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는 어김없이 여성들이 참여하고, 붙잡힌 여성 중에는 갖은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철산에서는 일본 군경이 임신부의 복부에 칼을 찔러 난자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토막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외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만행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31혁명기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대표적인 여성들을 살펴보자.


△ 권애라 - 이화학당 졸업반으로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표회의에 참석하는 등 생애를 독립전쟁에 바쳤다.


△ 어윤희 - 독립선언서를 배포 중 검거돼 2년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 되었다. 이 감방에는 유관순ㆍ김애라ㆍ신관빈ㆍ수원기생 김양화ㆍ맹아학교 교사 심명철 등이 함께 있었다. 출감 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 이순화 - 경기도 고양군에서 만세를 부르다 피검패 26개월 징역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 이아주 - 정신학교 졸업반으로 30여 명의 여학생을 이끌고 시위 중에 피검돼 서대문형 무소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황에스더 - 숭의여고 교사로 재직중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와 농촌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 왕종순 - 배화여중 2년 때 31혁명에 이어 31혁명 1주기 때에도 여학생들과 배화 여중 뒷동산에서 만세를 부르다 피검되었다. 출감 후 선교활동을 하면서 애국 사상을 가르쳤다.


△ 이신애 - 원산 루씨여학교 분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31혁명에 참가하고 대동단에 가담한데 이어 박영효ㆍ이완용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빼내오고, 강우규 의사에게 폭탄을 전달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돌이켜보면 반만 년의 가부장적인 남성사회에서 사회참여와 국권회복 투쟁에 여성이 등장한 것은 31혁명이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현상 하나만으로도 31혁명은 기존체제와 가치를 전복한 레블레이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17897월 프랑스대혁명을 맞은 루이 16세가 사냥을 갔다가 측근 리앙쿠르 공이 시민들의 바스티유 습격에 대해 보고하자 그것은 반역이 아니냐고 묻자 리앙쿠르가 폐하 이것은 반란(Revolte)이 아니라 혁명(Revolution) 입니다라고 정정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전한다.


동서고금의 기득권자들은 혁명을 두려워한다.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고종과 대신들이 외국군을 불러들여 동족을 살해하면서 진압한 것이나, 일제가 31혁명을 폭동으로 낙인한 것,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헌법 전문에서 굳이 기미 31운동으로 폄하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그런데 루이 왕조가 혁명으로 쓰러지고, 이승만이 419혁명에서 타도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사의 정통을 위해 ‘31혁명의 정명이 회복되고 독립투쟁사는 정사(正史)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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