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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진보 사상가들](5)새 필리핀공산당 창립 호세 마리아 시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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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법모 작성일12-11-30 00:00 조회9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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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진보 사상가들](5)새 필리핀공산당 창립 호세 마리아 시손



 


ㆍ마오식 혁명 꿈꾸는 민족민주운동 대부

9년의 합법적 대중운동, 8년의 지하운동, 9년의 투옥, 그리고 16년의 망명 생활. 필리핀 민족민주운동의 대부 호세 마리아 시손(사진)의 삶이다. 그는 1939년 2월8일 필리핀 북부 일로코스 수르주의 카부가오에서 태어났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필리핀의 무장 반군세력인 인민해방군(HMB)의 일원이었던 이발사의 영향으로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사립학교와 미국 유학을 거쳐 지역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대부분 상류층 자녀와 달리 시손은 공립학교에서 서민층 자녀들과 함께하면서 계층 간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대학 진학 후 사상 토론, 문학, 문예를 통한 구체적인 현실 실천 활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필리핀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여러 대학에서 영어, 정치학, 사회과학 등을 가르쳤다. 1959년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던 모임을 확대하여 대학 내에 필리핀학생문화연합(SCAUP)을 결성했다. 이 모임을 통해 학생들은 필리핀 문학이나 역사, 민속 문학 및 미술, 음악 등을 공부하거나 창작하면서 비민주주적인 학내 문제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다.



  정부의 탄압으로 취업 기회를 잃고 유학을 위한 미국 비자도 거부당한 시손은 인도네시아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는 그곳에서 민족주의적 혁명과정을 눈으로 보게 됐고 그 경험은 자신의 신념에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그는 귀국 후인 1964년 ‘애국청년회’(KM)를 결성했다. 마르코스 독재시기에 애국청년회 회원들은 시골 지역으로 내려가 농민, 어민 등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현실 문제를 배우려 했다. 아울러 도시 노동자 조합과의 연계를 통해 그들의 문제를 같이 고민했다.

 필리핀에는 1930년대부터 필리핀공산당(PKP)이 있었으며, 1940년대에는 무장혁명조직인 인민해방군이 창립되어 스페인과 일본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대중적인 동력을 크게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시손은 1968년 새로운 필리핀공산당(CPP)를 창건하고 1969년 공산당의 무장조직인 신인민해방군(NPA)을 설립한다. 시손은 마오쩌둥 방식의 혁명을 꿈꾸었다. CPP의 창건일이 마오쩌둥의 생일이며, NPA의 창건일이 후크발라합(Hukbalahap)의 창립일인 것은 그의 지향을 보여준다. 그는 저서 <필리핀 역사와 혁명>(1971)에서 필리핀에서의 생산양식은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이 다르며, 농촌지역에서부터 혁명을 통해 봉건주의적 생산관계를 타파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으로부터 해방된 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인민전쟁의 특성들>(1979) 등에서는 필리핀 혁명의 특성들을 나열하고 전술, 전략을 필리핀 군도에 맞게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반봉건-반식민 상태로 필리핀 체제를 분석한 그는 <필리핀 경제와 정치>(2002)에서도 현재 필리핀을 도시화·산업화된 상태로 보는 시각에 반대하며 여전히 시골을 중심으로 토지소유형태를 변화시키는 혁명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마르코스 정권의 부패와 실정으로 외채가 급증하고 물가가 폭등하자 1970년 3개월 동안 대대적인 반정부시위, 이른바 ‘폭풍의 1사분기(First Quarter Storm)’가 발생했고 정부는 이에 대해 무력 진압으로 맞섰으며 1972년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가 창설에 관여한 필리핀민족민주전선(NDFP)은 민족주의적인 대중운동의 한 흐름이 됐다. 이후 체포되어 9년간의 투옥 생활을 해야 했고 1986년 민중혁명 이후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에 의해 사면됐다. 하지만 새로운 정부 이후에도, 빈민들의 시위에 진압군이 발표하여 17명이 사망했던 ‘멘디올라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1987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후에도 시손은 필리핀 공산당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지만, 1991년 병력 확대와 도시 공격 등을 투쟁노선으로 하려 했던 필리핀 내 지도부와 의견 충돌이 있은 후 거리를 두게 되었다. 현재 신인민군의 무장투쟁은 점점 지지 세력을 잃고 있고 시손은 네덜란드에서 머물면서 ‘인민투쟁을 위한 국제동맹(ILPS)’을 이끌고 있다.

 그의 무력투쟁 노선은 필리핀 내에서 신랄한 논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투쟁 방법론은 필리핀 사회의 모순을 반영한 결과였으며, 시손이 제기한 여러 문제들은 필리핀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다. 그는 망명지에서도 민족주의적인 민주화와 사회주의를 열망하며 필리핀의 사회문제, 열강의 제국주의적 간섭을 경계하는 저작들을 내고 있다. 최근 시리아나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그의 글들은 현실 변혁을 꿈꾸는 그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법모 필리핀대학 인류학 박사과정>


2012-10-02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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