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 연구소
민족/국제자료실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민족/국제자료실입니다.
민주노동연구소의 회원들이 자료를 서로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네팔 공화제 출범 이끈 프라찬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재현 작성일12-11-30 00:00 조회1,050회 댓글0건

본문

[아시아의 진보 사상가들](6) 네팔 공화제 출범 이끈 프라찬다
 

ㆍ21세기 공산주의자가 껴안은 ‘인민이 통치하는 민주주의’

2008년 5월28일. 이제 막 구성된 네팔 제헌의회는 237년을 완고하게 이어오던 히말라야의 왕국이 공화국으로 탄생했음을 선포했다. 왕조의 숨통은 온전히 끊겼고 마지막 군주인 갸넨드라는 카트만두의 왕궁을 비우는 데에 15일간의 말미를 얻었다. 시대착오적 왕정이 21세기에까지 숨을 쉬고 있던 네팔은 인구의 90%가 절대빈곤선 아래에서 신음하고, 평균수명이 35세밖에 안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카스트제도 아래 불가촉천민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엄존하고 토지개혁의 부재로 무토지 농민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이룬 네팔의 공산주의 운동은 1949년 인도 캘커타에서 네팔공산당이 창당되면서 닻을 올렸다. 창당 직후인 1951년 나라얀 왕조 아래 100년을 넘게 지속되던 친영 라나 정권의 붕괴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네팔공산당은 1962년 3차 당대회에서의 노선투쟁을 계기로 분열이 가속화하면서 한때 17개 분파에 이르렀다. 1990년대까지 공산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정당인 네팔의회(NC)와 협력해 왕정 폐지를 목표로 하는 도시중심의 대중투쟁 조직이 지배했다. 무장투쟁을 표방한 마오주의자들도 실제로 인민전쟁을 시도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았다.

l_2012100801000681200059371.jpg
1994년 네팔공산당(통일센터)에서 분화한 마오주의자들이 1996년 당명을 네팔공산당(M)으로 바꾸고 그해 2월 두 자루의 구식 소총이 전부인 인민해방군으로 세 곳의 경찰 검문소와 한 곳의 농업은행을 습격하며 시작된 인민전쟁은 네팔 공산주의 운동을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농촌을 거점으로 한 게릴라 투쟁은 5년 뒤 네팔 전 국토의 70%를 해방구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에 네팔공산당(M)의 서기장(뒤에는 의장)인 프라찬다(사진)가 있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농학학사를 받고 USAID(미국국제개발협력처)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네팔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면서 1981년 공산당원이 되었다. 거의 지하운동에 종사하며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그가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인민전쟁을 통해서이다.

인민전쟁 5년을 결산하는 2001년의 2차 당대회에서 전폭적인 지지로 승인된 ‘대약진-불가피한 역사적 요구’란 제목의 문건은 ‘프라찬다의 길(Prachandapath)’로 불린 새로운 이념과 노선을 제시했고 이 ‘길’이 이후 네팔공산당(M)의 진로를 결정했다. 이 노선 변경의 배경에는 ‘21세기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요약되는 프라찬다 테제가 있다. 테제는 ‘인민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21세기 공산주의의 실현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선거와 다당제의 수용, 참여는 ‘21세기 민주주의 발전’의 연속선상에 있다.

2001년 이후 네팔공산당(M)은 게릴라 투쟁과 해방구 유지 못지않게 카트만두와 같은 도시에서의 조직과 투쟁에 힘을 쏟았다. 프라찬다의 길이 전통적 마오주의와 확연히 다름을 증명한 것은 2005년이었다. 왕의 반동적 쿠데타에 반대해 부르주아를 포함한 전 계급이 봉기 수준까지 발전한 저항을 벌인 상황에서 네팔공산당(M)은 인민전쟁에서 일방적인 휴전을 선포했다. 2006년 갸넨드라가 항복을 선언한 후 네팔공산당(M)은 7개 정당연합(SPA)과의 협상을 통해 과도정부와 과도의회에 진출했으며 인민해방군의 무장해제와 정부군으로의 통합과 함께 제헌의회 선거를 받아들였다.

2008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네팔공산당(M)이 제1당으로 부상하고 왕정 폐지 후 정국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프라찬다의 길은 일차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후 험로를 걷고 있다. 초대 총리로 선출된 프라찬다 자신은 국방장관 해임을 둘러싼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10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2년을 시한으로 한 헌법 공포는 지난 4년 동안 연기를 거듭했고 제헌의회는 올해 5월 성과 없이 해산되었다. 11월 네팔은 또 한번의 제헌의회 총선을 치를 예정이다.

국방장관 해임의 직접적 배경이었던 인민해방군의 정부군으로의 통합 또한 지지부진한 가운데 당 안팎의 반발을 사고 있다.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개혁 역시 답보상태이다. 당내 갈등도 불거져서 프라찬다의 오랜 동료였던 키란은 다시금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세력을 이끌고 이탈해 새로운 당을 만들었다.

프라찬다의 길이 의회민주주의에 포섭된 세계의 많은 공산당들처럼 개량화의 길을 걸으며 좌초하게 될지 또는 21세기 공산주의의 칭호를 얻게 될지 그 판단은 아직 유보적이지만 프라찬다의 21세기 공산주의 또는 21세기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는 아직 21세기의 서언을 작성하고 있을 뿐이고 더 많은 프라찬다를 필요로 하고 있다.

<유재현 | 소설가>


 

2012-10-07

[출처 : 경향신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