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 연구소
정세와 투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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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세(노동운동 동향) | 불타는 7·8·9월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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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8-08 00:24 조회1,0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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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7·8·9월을 맞으며
 

김승호(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T.S. 엘리엇이라는 시인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을 해서 4월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엘리엇의 시구는 이렇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이 지켜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희미한 생명을 마른 뿌리로 먹여주었지. (<황무지> 중에서)

 
엘리엇이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한 뜻은 이러하다고 한다.
“엘리엇은 현대인을 황무지에 사는 ”죽은 산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그 의식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 황무지 인간인 우리들은 추억(과거)과 욕망(미래)이 가져오는 고통이 아프고 싫어서, 때로는 현실이 너무 버거워서 어둡고 무감각한 깊은 땅 속에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잠들고 싶어 합니다. 과거를 떨쳐내느라, 미래를 쫓아가느라 때로 우리는 영원히 오늘을 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 의식의 무감각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는 것은 이러한 살아 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 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에서)
 

4월혁명을 경험한 세대들은 해마다 4월이 되면 그날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의 암울한 현실과 그 부조리한 현실에 굴종하거나 영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고 고통스러워서, 이 시구를 많이 읊었다. 하지만 우리 민중에게는 일 년 어느 달 치고 잔인하지 않은 달이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98년 전 3월에는 유혈이 낭자한 농민·노동자의 3.1혁명이 있었다. 57년 전 4월에는 학생·노동자가 피를 흘린 4월혁명이 있었다.  37년 전 5월에는 자기 나라 군대에 의해 여학생의 젖가슴이 잘려나가는 5월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또 26년 전 5월에는 강경대·박창수 열사의 죽임에 항거한 민중항쟁이 있었다. 30년 전 6월에는 시위하던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민주항쟁이 있었다. 그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0년 전 7·8·9월에는 노동자대파업투쟁이 있었다. 71년 전 10월에는 대구 인민항쟁이 있었고, 47년 전 11월에는 전태일 동지의 분신항거가 있었다.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는 이른바 사회지도층들은 주로 천민자본주의의 업적을 찬양하지만 기릴 거리가 별로 없다. 그래서 간혹 그 천민자본주의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도 기념하고 기린다. 마지못해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는 기념행사를 주관하면서 그 투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능욕해서 두 번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관해서는 아예 기념하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적대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김상곤 교육부장관 겸 사회부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있었다. 조·중·동 같은 주요 일간지, 채널A·tv조선·MBN 같은 종편방송, MBC 같은 공영방송을 가리지 않고 김상곤 후보자가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했던 2007·2008년 졸업식 축사 동영상을 훔쳐가지고 빨갱이 사냥을 했다. 2008학년도 신입생 모집 포스터에 적힌 “자본의 족쇄를 거부하고 사회주의를 상상하자”는 구호를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전태일의 죽음이 자본의 족쇄를 거부한 몸부림이 아니었던가?, 7·8·9 대파업투쟁이 자본의 족쇄를 거부한 대투쟁이 아니었던가? 6.30 민주노총의 사회적 총파업이 자본의 족쇄를 거부하는 분노의 몸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소선 어머니는 “우리 노동자는 비정규직, 정리해고, 손배·가압류 등등 수많은 족쇄를 차고 있다”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던가.


사회주의를 상상하는 것은 나쁜 일인가? 전태일 동지가 수기에 남긴 글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금전대의 부피와 그것에 대한 욕망을 쫓는 사회가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묘사한 인간이 죽은 세상인 자본주의라면, 인간의 가치와 희망과 윤리를 쫓는 세상이 인간이 살아 있는 사회주의다. 노동자가 그것을 꿈꾸지 않는다면 엘리엇이 말한 “죽은 산자”일 것이다. 전태일도 87년의 파업노동자도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들 그것을 꿈꾸었다. 그래서 모두들 “물건처럼”이나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다. 이제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말하도록 하자. 
 

7월이 다가온다. 촛불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노동자는 더욱 더 7·8·9월의 뜨거웠던 대파업투쟁을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이 먹고 지위가 높아져 의식이 녹슬어 버린 채 자본에 영합하거나 굴종하고 있는 자신을 두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그렇게 바라보는 일이 매우 고통스럽고 싫은 일일지라도, 그렇게 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매우 잔인한 일일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사람이다. 

전태일 동지는 1969년 9월 30일경 친구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을 남겼다.
 

“불행하게도 너는 나의 친구. 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너는 나의 친구이니까, 정이라는 것을 통해 너에게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보이는 거다. 너도 괴롭지만 보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나 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 설 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 통신」 2017년 160호에 게재한 글을 좀 다듬고 교정·교열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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