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세(노동운동 동향) |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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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21 13:08 조회1,498회 댓글0건본문
매일노동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김승호의 노동세상(8월 24일자) 글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단상(斷想)
김승호(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아름답다’는 말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민주노총에서 최근 만든 투쟁조끼에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이 한참 이전에 전태일 동지를 주인공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가 있는데, 그 제목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9년 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 전 위원장 이정미 동지를 기리는 수식어가 “아름다운 사람 이정미”였다. 그녀를 기리는 추모식이 지난 18일 모란공원 민주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지난 14일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계시던 경교장(현재 강북삼성병원 내)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김구와 윤봉길이 꿈꾼 나라”라는 주제의 행사가 있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꿈꾼 나라는 다름 아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였다. 자본과 정권이 이구동성으로 선동하며 추구하는 ‘부강한 나라’가 아닌, ‘아름다운 나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좋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노동과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청년, 아름다운 사람을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 아름답다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일까?
흔히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진`선`미를 언급한다. 진은 거짓이 아닌 참을 뜻한다. 그러나 단지 거짓이 아니라고 해서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거짓이 아닌 동시에 과학적이어야 한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규정은 거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참은 아니다.
선은 무엇일까?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선이 아닌 악이다. 그러나 악이 아니라고 해서 곧 참된 선은 아니다. 참된 선은 필요한 사람에게 자기의 것을 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미는 무엇일까? 추하지 않고 예쁜 것이다. 그러나 예쁘다고 곧 참다운 아름다움은 아니다. 참다운 아름다움은 참된 사실과 참된 선에 기초한 아름다움이다. 독버섯은 얼핏 보면 예쁘지만 참답게 예쁘지는 않다. 성형 수술한 미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은 참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그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현실이 아닌, 그런 현실과 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현실이 갈수록 거짓되고, 악하고, 추하게 되어 가고 있기에 더욱 진과 선과 미를 꿈꾸는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도 자본주의 현실이 매우 거짓되고 악하다는 점은 많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하다는 비판의식과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지향의식은 새로운 면이 있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경지이고, 보통사람들과는, 특히 사회의 최하층에 속하는 임금노동자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되던 영역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이것을 전유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노동운동은 왕왕 “이것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요구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해 왔다. 말하자면 최저 강령을 요구하는 데 머물렀다. 요구의 수준을 그처럼 최저한으로 낮추는 것이 실현가능성이 높고 노동자 자신과 나아가 일반인들에게 더욱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최고 강령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삶을 요구하고 있다. 최소한의 것을 요구한다고 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지도 않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현실을 조금씩 개선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반세기 전 전태일 동지가 그러했듯이 “누구 또는 무엇에 반항함이 없이” 현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자본주의 세상이 거짓되고 악할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더럽고 추한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음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 지점에서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평등사회를 넘어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세상과 나라가 아름다운 세상이고 나라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전태일 열사와 이정미 동지처럼 아름다운 청년과 아름다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나라와 세상이다. 그러면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 인간적 부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탈(脫)물질화된 인간이다. 전태일 동지가 당대와 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던진 물음에 대해,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이라는 물음에 대해, 단호하게 ‘인간의 가치와 희망과 윤리’라고 답하는 사람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노동자가 정신적·육체적, 지적· 도덕적 등 모든 면에서 고도로 발전함으로써, 노동자 자신이 만든 물질적인 것들의 종속물로 소외된 인간상 또는 전태일 식으로 말해서 물질화되고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타파하고 물질적인 것들의 주인으로 우뚝 선 사람이다.
둘째는 개인적이되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사람이다. 나아가 이기와 이타의 구별을 뛰어넘는 경지로 나아간 사람이다. 전태일 동지의 글들에 씌어 있듯이 만인을 나의 나로, 나의 전체의 일부로 삼는 사람이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활동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이 되는 사람이다. 사회적 노동이 삶의 제1의 욕구가 되는 사람이다.
셋째, 역사의 현 단계에서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생을 걸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사람이다. 투쟁을 통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적대하는 전도된 세상이 변혁되지 않고는 만인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꿈꾸는 것만으로 결코 아름다운 세상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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