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세(정치) | 3.1절 96주년에 기억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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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호 작성일15-03-31 00:00 조회1,584회 댓글0건본문
매일노동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김승호의 노동세상(3월 2일자) 글입니다.
3.1절 96주년에 기억할 것들
김승호(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3월 1일은 독립만세운동이 터져 나온 날이다. 이날 오후 2시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김희선) 주최로 기념식 및 여성독립운동가 추모헌공 차례(茶禮)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3월 1일 혁명과 여성독립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기념강연을 했다.
96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이날을 기점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타오른 만세운동을 우리는 3.1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여성단체에서는 이 만세운동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혁명’으로 부른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제3공화국 이래 4공 때까지 헌법전문에 ‘4.19 의거’라고 명명돼 있던 시위운동도 당사자들은 ‘4월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고, 기념단체 이름도 ‘사월혁명회’다. 그런 선례도 있는 만큼 1919년 3월의 만세운동을 혁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5.16 세력은 실패한 정변은 혁명이 아니고 성공한 정변은 혁명이라며, 3·4공화국 헌법 전문에 4.19혁명을 4.19의거라고 폄하하면서 5.16군사정변을 5.16혁명이라고 추켜세워 왔다.
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5.16은 낡은 질서를 '재건'한 정변이었을 뿐이다. 그에 비해 3.1운동과 4.19운동은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더 진보된 새로운 질서, 나라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민중이 피 흘리며 싸웠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에 부합한다.
이 지점에서 4.19 1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4.19 시위운동의 명예회복을 위해 ‘의거’가 아니고 ‘미완의 혁명’으로 규정하자고 주장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보면 굳이 '미완의 혁명' 운운할 필요 없이 그냥 4월혁명이라고 하면 되는 것이었다. 청교도 혁명에서 프랑스대혁명, 러시아 혁명을 거쳐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까지 혁명은 죄다 하나의 사건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미완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기미년 3월혁명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민중들의 영웅적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이씨 조선의 주인이었던 양반계급은 한일합방 이후 대부분 독립의 의지를 잃고 일제에 투항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을 벌여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고 그것을 양반과 지주들의 완전한 사유지로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갑오년 혁명 이래 농민들의 염원인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꿈은 국내 봉건계급이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함에 의해 압살됐다. 극복해야 할 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갑오년에는 봉건 지배계급이 일본 제국주의를 끌어들여 농민의 염원을 짓밟았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봉건계급은 일제의 하위 동반자가 됐다.
그래서 피지배 민중은 갑오년 투쟁에 이어 기미년 투쟁에서도 안팎의 지배세력과 맞서야 했다. 다만 이번에는 전근대적이고 허약한 양반계급보다 근대(모던)를 대표하고 강력한 제국주의와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그래서 맨손으로 싸웠고 그래서 그 투쟁은 더욱 영웅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추상적 민족운동이나 양반지주계급을 포함한 전 민족적인 투쟁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과감하게 떨쳐나선 민중들의 민족해방 투쟁, 민족해방 혁명이다. 3.1운동에서 유생이나 지주가 이끌던 만세운동은 없었다.
3.1운동은 일제의 통치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만들었다. 그러면 당시 앞장섰던 이승만 등 33인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3.1 만세 사건이 있기 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다. 그 선언문을 춘원 이광수가 작성했다. 3.1 독립선언문은 육당 최남선이 썼다. 두 지식인은 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보냈는가. 이것들도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때의 민중의 영웅적 투쟁만이 아니라 그 투쟁을 목적지까지 지속시키지 못하고 투항한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변절이다. 지식인의 경우를 보자.
이광수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 <독립신문> 주필을 담당하다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팽개치고 국내로 들어와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민족개조론을 펼치면서 독립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 하의 자치를 주장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완전히 친일로 전향했다. 이후 “조선인은 자신이 조선인인 것을 아주 잊어야 한다.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창씨개명과 황민화(조선인의 일본화)에 앞장서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고무하고 청년들을 총알받이와 정신대로 내몰았다.
최남선 또한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 된 후 친일로 전향하고 1928년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식민사관을 개발하는 변절자가 됐다. 최남선은 또 이광수와 함께 대동아전쟁을 찬양·고무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당대의 대표적 두 지식인은 어째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독립투쟁을 펼치지 못했을까. 그것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지조마저 지키지 못하고 변절자가 되고 말았는가. 일제 패망 후 이광수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극렬 친일파로 지목돼 재판을 받을 때 “나는 조국이 그렇게 빨리 해방될 줄 몰랐다”며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했다. 그런 것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무슨 민족지도자고 계몽가란 말인가.
우리는 유교문화의 부정적 유산으로 지식인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곧 선각자가 아니다. 선구자는 더더구나 아니다. 극소수를 빼고 그들은 오히려 푸코의 지적처럼 폭력 소유자와 함께 어울려 계급사회와 국가를 생산하고 재생산해 왔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 또한 대중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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