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금속노조 SJM지회 투쟁평가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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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김유진 작성일12-11-30 00:00 조회1,95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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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j-SJM.hwp (26.5K) 7회 다운로드 DATE : 2018-07-11 09: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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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M 투쟁 승리의 의미와 과제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김유진
지난 9월 23일 (주)에스제이엠은 회사 정문에 직장폐쇄 철회공고를 붙였다. 회사의 패배선언이었다. 7월 27일 야만의 새벽에서 시작된 두 달 간의 직장폐쇄 철회 투쟁은 SJM지회의 압도적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용역폭력 - 직장폐쇄 - 조합원복귀, 생산재개, 민주노조 고립 - 어용노조설립 - 민주노조 무력화’ 과정, 수 년간 민주노조의 공포로 자리매김했던 일명 ‘노조파괴 시나리오’는 SJM에서 제 무덤을 파야했다. SJM에서 출발한 승리의 기운이 유성기업, KEC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SJM 투쟁 승리로 기존의 민주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그대로 되풀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본은 패배를 분석하고 반격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준비할 것이다. 세계 경제위기는 더 깊어지고 더 자주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자본은 민주노조 무력화의 유혹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운동 또한 SJM 투쟁 승리의 비결을 철저히 분석하고 반영해 지난 패배의 역사를 뒤집고, 연이은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패배로부터도 승리로부터도 배우지 못한 채 ‘알고도 당하는’ 역사를 또 이어가지 않으려면, SJM을 ‘운이 좋아 한 번 이긴’ 특별한 사례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의외의 반전, 압도적 승리
7월 27일 야만의 새벽, 최근 몇 년 전국을 휩쓴 민주노조 파괴 시나리오가 안산의 SJM에 상륙했다. 무장한 용역깡패 300여 명은 회사 안에 모여 있던 150여 명 조합원들을 상대로 살인적 폭력을 저질렀고, 현장에 있던 경찰과 노동부는 피흘리는 노동자를 방치하고 폭력을 묵인했다. 조합원들은 비무장상태로 저항하다 공장 밖으로 밀려났고 회사는 직장폐쇄 공고문을 내다붙였다. 경주 발레오, 구미 KEC, 대구 상신브레이크, 충청의 유성기업에 이르기까지 자본과 용역업체 - 노동부와 경찰 - 노조파괴 전문 컨설팅 업체가 한 몸이 되어 벌인 대대적인 노조파괴 시나리오. ‘집안에서는 돈잔치, 집 밖에선 절대 폭력’으로 완성차 노조는 고립시키고 부품사 노조는 철저히 짓밟아 온 현대차그룹의 노조관리전략이 SJM까지 손길을 뻗었다. 다음 그림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는 전면전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300명도 안 되는 조그만 부품공장의 나이든 노동조합. 무너질 수밖에 없겠지, 어떻게 하면 그나마 덜 잃을까?’ 할 수 있는 일은 ‘수습’ 정도일 것 같았다. 같은 날 같은 일을 당한 만도지부는 조금의 저항도 못한 채 순식간에 무너졌다. 중소 부품사 노조 박멸, 거대 부품사 무력화, 완성차노조 고립이 눈앞인 것 같았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SJM 조합원들은 직장폐쇄 2달 만인 9월 26일 공장 문을 열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직장폐쇄 철회와 회사의 사과, 단체협약 유지와 노동조합 활동 보장, 계약직 정규직화와 위로금 지급 등 지회의 요구는 모두 관철되었다. 이 날의 승리까지 노조파괴 시나리오의 공모자들은 하나씩 모두 깨졌다. 직장폐쇄 열흘 만에 용역업체 컨택터스는 업체 허가가 취소되고 공중분해 되었다. 용역폭력에 대한 비판 여론은 두원정공, 쎈싸타, 두물머리 등에서 준비 중이던 용역투입 계획을 주저앉혔고, 경비업법 개정에 관한 논의도 시작됐다. 당일 폭력을 묵인방조한 안산단원서 경찰서장은 경질되었다. ‘5폭 척결’로 경찰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정권 재창출에 기여하려던 경찰의 계획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 직장폐쇄 한 달 만에 용역폭력 사태를 기획, 지휘한 SJM 민 모 이사가 구속되었다. 노동자에게 불법폭력을 휘두른 회사 측 인사로서는 최초의 구속이었다. 노동부의 무능과 노조파괴 시나리오 공조 사실이 지탄받았다. SJM 직장폐쇄는 정당하다 주장했던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은 요즘 궁지에 몰려 ‘부당노동행위는 암세포’라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창조해 돈을 벌던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은 해체되었고, 노무사 자격도 취소되었다. KEC, 유성기업, 쌍용차에 이르기까지 용역폭력과 직장폐쇄로 고통받았던 사업장들 문제도 청문회로 국정감사로 다시 파헤쳐지는 효과를 발휘했다. 승승장구하던 노조파괴 시나리오는 누더기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반전이었다. 압도적 승리였다.
생산과 생계의 힘겨루기
직장폐쇄 후 회사와 노동조합은 생산과 생계의 힘겨루기에 돌입한다. 회사는 생산을 재개하고 복귀자를 늘리고 공장가동률을 높여 바깥의 노조를 무력화해야 한다. 밀려난 노동자는 당장 월급이 안 나오는 문제, 해고에 대한 두려움 등 생계의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내가 없어도 공장이 돌아간다’는 사실은 노동자에게 엄청난 공포이며, 개별복귀와 생산재개의 원동력이 된다. 그 다음은 개별적 집단적 복귀 흐름, 생산 정상화, 노조무력화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 힘겨루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생계의 공포를 극복하고 회사에게 생산불가의 공포를 돌려줘야 한다. 따라서 복귀자를 줄이고 경제적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는 것, 조합원의 단결이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SJM 사측도 직장폐쇄 전에 이미 관리직 현장 투입, 계약직 채용, 식당 노동자 현장투입 등 생산훈련으로 대비를 했다. 중국 제품 바이백과 외주화 등으로 대체생산 가능성도 시험하고 준비했다. 직장폐쇄 후에는 대체인력을 투입했는데 SJM 공장이 있는 남아공에서 노동자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노동부의 불법판정으로 대체인력 투입이 불가능해지자 사장부터 모든 직원이 생산에 투입되어 생산에 큰 차질이 없다며 복귀를 종용했다. 조합원의 10% 정도만 합류해도 초고강도 노동으로 가동률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SJM 조합원들은 생계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았다. 직장폐쇄를 당했던 사업장들에서 가장 먼저 복귀하고 복귀를 주도했던 그룹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조합원과 직장 반장 기장 등 현장 관리자들이 복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과 함께 여성조합원들, 식당 노동자들, 계약직 노동자들 등 소수 집단들이 모두 투쟁에 앞장섰다. 지회 간부와 조합원들의 모금, 경기지부 조합원들의 모금과 전국적 후원으로 지회는 전조합원에게 100만원의 월급을 지급할 수 있었다. 적지만 상징적인 돈이었다. 당장 어려운 조합원들은 같이 해결하자고 호소했다. 조합원들은 ‘한 명이 들어가면 직장폐쇄가 하루 더 늘어난다.’, ‘승리는 내 손에 있다’며 뭉쳤다. 매일 아침 총회와 분임조 활동, 카톡채팅방 수다 등 서로 소통하고 서로에게 기댔다. 복귀자는 가뭄에 콩 나듯 했고, 집단복귀를 조직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했던 이들도 맥없이 혼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과 생계의 힘겨루기에서 무게중심은 노동자에게로 기울었다.
실업과 해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공포와 이기심’은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기반한 보통 사람들의 감정과 상식이다. 알고도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SJM 조합원들의 단결은 그런 비정한 세상의 상식을 벗어났다. 담대하고 즐거운 태세로 자발적으로 투쟁을 키워가는 조합원들로부터 승리는 현실이 되었다.
단결은 어디에서 오는가
SJM 조합원들이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SJM지회 또한 노령화되고 관성화 된 노동조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고 자평한다. 싸워본 지도 오래됐고, 현장활동과 연대활동도 축소되었다. 지주회사 설립과 바이백, 외주화 등 최소 3년은 준비하고 추진해 온 회사의 그룹재편과 경영권 2세 승계, 노조무력화 계획에도 미리 대응하지 못했다. 지회의 한 간부는 지회의 상태를 ‘민방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서 반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준비와 신뢰였다.
준비 = 단결
분위기 반전은 ‘준비’로부터 시작됐다. 2011년 말 SJM지회는 사측의 공격을 예감하고 현장조직력 강화를 위한 전방위 활동에 돌입했다. 특히 라인별, 부서별, 공장별, 세대별로 꼼꼼하게 간담회를 지속했는데 직장 반장, 고참 조합원, 계약직 등 사측의 주요 공략대상이 될 수 있는 그룹들과 꾸준히 토론하고 의견을 수렴했다. 임단투 돌입 전에 조합원 전체를 28개 분임조로 편성하고 선봉대를 확대 재편했다. 조합원 교육을 통해 회사 상황과 탄압 가능성을 공유했고 채증훈련, 집결훈련도 했다. 외주화 바이백 문제 등 구조조정 전조가 발각되자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조퇴를 하고, 직장 다니며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사무실에 올라가 관련 자료공개를 요구하는 피케팅을 하기도 했다. 지회는 공장 안에 천막을 치고 잔농을 하면서 공감을 높여갔다. ‘잔농’은 SJM지회 특유의 용어로 조합원들이 퇴근 후 농성에 잠시 결합하는 것이다. 한편 외주화나 바이백 발각 등은 회사 측이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를 유도해 공격적 직장폐쇄를 하려고 의도적으로 흘린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는데, 지회는 그에 대비해 전면 파업을 자제하고 현장 투쟁과 조직력을 강화하는 데 몰두했다. 다른 사업장 사례를 조사하고 준비한 것이다.
이러한 준비는 조합원들의 ‘공통된 상황인식’을 만들고, 공동의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회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다음 계획이 무엇일지, 우리는 무엇을 할지, 조합원들 스스로 토론하고 집행부에 계획을 제안했다. 사측의 대응은 지회가 예측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것은 자부심과 단결로 이어졌다. 자본이 준비해 놓은 링에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상대의 작전을 미리 알아둔 것이 단결과 승리의 비결이었다.
신뢰 = 단결
민주노조 무력화 과정에서 노동조합 내 갈등은 자본에게 가장 큰 호재다. 전 집행부와 현 집행부 간의 갈등, 정파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다수 그룹과 소수 그룹 간의 격차와 갈등. 자본은 그 중에 취약한 부위를 먼저 공략한다. 한 곳이 먼저 무너지면 갈등과 분열은 더 커지고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SJM지회라고 그런 차이와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두 달의 투쟁과정에서 큰 갈등 없이 끝까지 함께 싸울 수 있었던 비결은 ‘신뢰’였다. 7월 27일 용역침탈 당일,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 여성조합원이 “공장을 지킵시다”라고 말했다.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 날 가장 앞서서 용역들을 막다가 크게 부상을 당한 이들은 지회 전현직 집행부와 고참 노동자들이었다. 자기를 내세우며 갑론을박하기보다 직접 나서 지킨 것이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본 조합원들은 회사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공통의 사태인식과 공동의 대응은 끝까지 이어졌고 심각한 이견으로 갈등을 빚는 일은 없었다. 가장 앞장서서 싸웠던 여성조합원들, 계약직 조합원들, 회사의 끈질긴 공략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현장관리직, 고참 조합원들까지 어느 한 쪽도 ‘취약집단’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더욱 공고해졌다. 한편 평소 세대별, 취미별로 다양한 동아리 활동, 지역연대활동을 해 온 SJM지회의 오래된 일상이 큰 힘이 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후원기금 명단에는 노조와 단체 뿐 아니라 앞집 사람, 쥐띠모임 등 조합원들의 인간관계와 일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이름들이 많았다.
8월 중순, 회사는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복귀자들로 구성된 어용노조를 만들었지만, 20여 명 어용노조는 정보와 신뢰로 똘똘 뭉친 230여 명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꾸준히 이어진 지회 지도부 고립작전, 지도부와 조합원 분리 작전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투쟁을 리드한 자부심과 자발성
공통의 인식, 굳건한 신뢰, 그에 기반한 단결은 조합원들의 자부심과 자발성을 계속 폭발시켰다. 언론에 보도되어 화제가 되고 폭력당사자들을 구속시킨 결정적 증거, 7월 27일 당일 주요 영상들은 모두 조합원들의 스마트폰에서 나왔다. 휴가 기간에도 조합원들은 매일 공장 앞으로 출근했고, 모아서 나눠쓰자며 적금을 깨서 투쟁기금을 냈다. 스스로 출근 시간을 앞당기고, 농성장 결합 계획, 선전전 계획을 세워 퇴근 시간을 늦추기도 했다. 총회와 카톡채팅방 등을 통해 규찰조, 병원에 입원한 조합원 등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공유하고, 경조사를 나누고, 관련 기사 등을 공유했다. 회사의 회유협박도 바로바로 공유되었다. 직장폐쇄기간 거의 매일 발행된 조합원 소식지 ‘활화산’은 조합원들의 모든 일상과 고민, 투쟁을 둘러싼 정보들을 담았고 자부심과 자발성을 확대하는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SJM 조합원의 자발성과 조직력은 여론과 정치권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유지하는데도 핵심적인 힘이었다. SJM 사측의 모든 불법행위는 적극적으로 공유, 폭로되었고, 대선국면에서 무기가 필요했던 야당들은 진상조사와 청문회를 관철시켰다. 여당 국회의원들도 회사와 용역업체, 노동부를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SJM지회의 2달 간의 싸움은 회사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다. ‘회사 망한다’, ‘너만 잘 살면 되지’, ‘생산은 차질없다’ 조합원들은 이런 회사의 협박에 직접 답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공장을 넘어 더 큰 사회적 투쟁으로 국면을 리드했다. 공포와 분열, 무절제한 저항과 굴복을 기대하며 노동자를 내쫓고 공장을 차지했던 회사는 오히려 공장 안에 고립되었다. 경찰과 노동부도 회사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조합원들은 기세를 몰아 ‘풀어라 직장폐쇄! 없애자 용역폭력’운동, 줄여서 전국적 풀업운동을 제안하고 나섰다. 같은 일을 당한 모든 이들과 함께 폭력의 뿌리를 뽑자는 것이었다. 직장폐쇄가 철회되면서 풀업운동이 본격화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확장되는 기세가 회사의 항복을 끌어냈다.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충남지부가 농성장을 찾았던 날 한 여성 조합원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노조가 아니라 전국의 민주노조를 위해 싸웁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한 노동자도 말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인생 다시 한 번 살고 싶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부심과 긍지였다.
진짜 연대를 보여주다
SJM 조합원들의 조직력과 자발성이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한 지회만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만도효과와 SJM효과 중 무엇이 대세가 될 것인가?’하는 갈림길에서 SJM은 치열한 전장이 되고 있었다. 직장폐쇄라는 효과적 무기를 지키려는 자본의 절박한 이해가 걸려있기도 했다. 계속된 노조파괴 흐름, 만도지부의 붕괴,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노동자운동의 절박함과 용산과 쌍용차, 발레오, 상신브레이크, KEC, 유성 등에서 쌓여 온 분노도 SJM으로 모이고 있었다. 안산공대위, 경기지원대책위 등 지역 연대단위가 꾸려졌고 전국 각지에서 연대를 만들었다.
SJM으로 모인 수많은 힘 중에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집중집회 몇 번’의 투쟁계획을 넘어선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투쟁이다. 경기지부는 직장폐쇄 후 첫 운영위원회에서 “여기서 진다면 민주노조 포기하고 각자 알아서 살자. 그럴 거 아니면 여기서 모든 것을 걸자”고 결의했다. SJM지회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을 ‘조직력 유지 확대’로 보고 지회가 거기에 집중하도록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부가 책임지고자 했다. 경기지부는 투쟁의 장기화에 따라 예상되는 어려움에 대처하고자 매일 철야농성, 전조합원 생계기금 결의, 지부총파업 결의를 이끌어낸다.
직장폐쇄 투쟁 열흘 째, 경기지부는 SJM 공장 앞에 농성천막을 차렸다. 낮에는 SJM 조합원이, 밤에는 지부 조합원들이 공장 앞을 지켰다. 퇴근하고 모인 밤샘 농성자들이 매일 40여 명에 달했다. 농성자들은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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