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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 ‘거대한 전환’의 시기 노동자와 노동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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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7-27 11:42 조회2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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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의 시기 노동자와 노동운동(1)

 

2023년 7월 19일

김승호(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 노조 강연 교안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체 게바라)

 

“외신들도 한국 폭우 집중 보도 ... ‘동아시아 기후위기’ [앵커] 주요 외신들도 한국의 심각한 폭우 피해 상황을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일본, 중국의 사례와 함께 들며 동아시아가 기후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습니다. ... [기자] 주요 통신사와 미국 매체들은 한국의 폭우상황을 자세히 타전했습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충북 오송 지하차도 침수 피해를 상세히 다루면서 며칠 동안 한국을 휩쓴 장맛비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많은 주택이 물에 잠기고 기차와 항공편 운행이 취소됐으며 수만 명의 전기 공급이 끊겼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지난해 8월 기록적인 폭우로 한국에서 14명이 숨지고, 2020년에는 몇 주에 걸친 홍수와 산사태로 48명이 사망했다고 전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해 서울이 115년 만에 가장 큰 폭우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뒤 정부가 폭우 대비를 강화하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이번 재난이 발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 외신들은 기후위기를 원인으로 꼽은 전문가들의 분석도 실었습니다. CNN방송은 ‘과학자들이 기후위기로 기상이변 가능성이 높아지며 동아시아에서 폭우 피해가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고 전했습니다. ”(YTN, 2023년 07월 17일 05시 39분)

 

“‘암울한 미래’ 한국, 2050년 사실상 세계 최고 고령국가. 오는 2050년이 되면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늙은 국가’로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1위가 고작 인구 790만 명의 중국 자치도시인 홍콩으로, 한국이 사실상 세계 최고의 고령국가가 된다는 의미다. 현재 세계 최대의 노동력을 갖춘 중국도 27년 뒤에는 생산가능 인구(15~65세)가 2억 명이나 줄어들 것이란 예측이다. ... 뉴욕타임스(NYT)는 16일(현지시간) 유엔의 세계인구 추계를 인용해 [이렇게 추계했다.] 한국은 2050년 생산가능 인구 4명 당 65세 이상 노인수가 3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노동인구 4명이 노인 3명을 부양해야 하는 셈이다. 한국의 생산가능인구는 올해 3600만 명에서 2050년 2400만 명으로 감소하는 반면 65세 이상 노인은 950만 명에서 1800만 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기간 젊은이(15세 미만)은 58만 명에서 38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산된다. ... NYT는 ‘2050년까지 동아시아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며 ‘프랑스에서 100년 이상, 미국에서 60년 이상 걸렸던 인구 변화가 동아시아에선 최근 20년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국민일보, 2023-07-18-00:03)

 

주관적인 희망으로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로서 세상이 지금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관계인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더 이상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지속될 수 없는,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1. 역사 인식의 중요성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전태일은 일기에서 그렇게 썼다.1)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정치적(국가적) 동⸳물”이라고 했다.2) 어느 것이 인간에 대한 바른 규정일까?

 

둘 다 맞는 규정이지만 전태일의 규정이 더 근본적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것은 무리를 이루어 사는 것이다. 그러나 벌과 개미도 무리를 이루어 산다. 그것들은 본능에 의해 그렇게 무리를 지어 산다. 사람도 오랜 세월 그렇게 무리를 지어 살았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부터 달라졌다. 신석기 시대가 열리면서 인간은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착해서 사회를 이루어서 살았다. 말하자면 의식적으로 사회를 이루어서 살았다. 이것이 씨족사회⸳부족사회다. 이런 사회가 바로 원시공동체 사회이다. 이런 공동체 사회가 이루어지면서 부부⸳형제⸳이웃 같은 여러 사회적 관계가 생기고 그런 관계들을 유지하기 위한 윤리 관념도 생겼다. 오늘날 보거나 알고 있는 많은 인간적인 관계나 관념들이 이 시대에 생겨났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생활하면서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의 능력에도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생업이 수렵·어로에서 농경·목축으로 바뀌면서 노동생산성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래서 이 시대의 탄생을 ‘신석기 혁명’이라고 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규정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사회를 이루어 생활함으로써 만물의 영장이 되는 존재, 바로 그것이 인간이다.3)

 

한반도에서는 어떠했을까? 구석기 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다. 전곡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한반도 구석기인들은 주먹도끼를 사용했다. 아직 호모 사피엔스도 아닌 직립원인 즉 호모 에렉투스다. 신석기 유적으로는 서울 암사동 유적이 유명하다. 지금으로부터 5~6천 년 전쯤이다. 그러니 위에서 한 구석기→신석기 사회 얘기는 라틴 아메리카와 한반도만의 얘기가 아니다. 인류 보편적인 발전 법칙이다.   

 

이에 비해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규정은 역사가 매우 짧다. 정치란 국가의 권력으로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 생겨났나? 사회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나서부터이다. 이런 현상은 왜 생겨났나? 사회의 생산력이 높아져서 소수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지식과 완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은 노동하지 않으면서 다른 보통 사람들을 노동하도록 시켜서 그들로부터 잉여생산물을 빼앗아 갈 수 있게 됨으로써, 또 그렇게 빼앗아가기 시작함으로써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노동의 생산력이 높아짐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로부터 소수의 능력 있고 힘 있는 자들이 다수의 힘없고 능력 없는 자들을 지배⸳착취하는 계급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계급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이 만들어지고 법을 집행할 기구인 국가가 생겨났다.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보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생산력이 발전한 사회에는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국가가 생겼고,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원시공동체, 즉 씨족사회⸳ 부족사회가 유지됐다.

 

한 공동체 안에 이런 지배·피지배 관계가 발생하자 공동체들 상호간에도 서로 지배하려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럴수록 국가는 규모가 커지고 강력해졌다. 씨족·부족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계급사회가 되자 사람들은 이제 국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단계에 도달하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4)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나 정치적 동물이기 이전에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가 있고 국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변화한다. 과거의 많은 학자들은 세상을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고정불변의 원리를 찾으려 했다. 그게 하늘(天))의 도(道)였다. 이조시대 유학자들은 이렇게 하늘의 도리를 추구했다.5) 이런 접근방식은 동양에서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에서 세상은 하느님이 만든 질서였다. 따라서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또는 신부가 그것을 해석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을 관념론과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자들 가운데는 만물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변화한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데모크리토스처럼 “만물은 유전한다” “태양은 날마다 새롭다” “사람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이 유물론적·변증법적 사고방식이다. 어느 사고방식이 과연 과학적이고 올바른가? 당연히 후자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원리도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가 바꾸어지면 그것과 맞물려 부단히 바꿔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올바로 살려면 기존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변하는지 그것을 잘 알고 거기에 조응해서 생각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세상은 왼쪽으로 가는데 자기는 계속 옛날과 똑같이 오른쪽으로 달려가면 되겠는가?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그것은 성공할 수 없다. 오늘날 양반 자손이라고 뒷짐 지고 ‘에헴’ 한다고 누가 받들어주는가? 그렇다고 세태가 흘러가는 대로 무조건 뒤쫓아 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시야가 좁은 것이다. 일제가 망할 때까지 친일을 하다가 일생을 망친 이광수, 최남선 선생, 서정주 시인 같이 말이다.6) 시야를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거시적 역사는 한 두 사람이 한 동안 거스르려 해도 결국은 거스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장의 세태만 쫓다가 거시적 역사를 놓치면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된다.

 

2.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 디지털-뉴딜 전환

 

요즘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전환기’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뉴딜 전환’, ‘디지털 전환’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눈앞의 세태를 쫓아 말하는 것이지 거시 역사적인 전망을 얘기하는 말이 아니다.

 

‘디지털 전환’이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요즘 AI니 쳇GPT니 하는 말이 유행한다. 또는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말도 널리 입ㅂ에 오르내린다. 4차 산업혁명은 이윤율 저하에 직면한 자본이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기 위하여 노동을 절약하는 기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신노동을 절약하는 기술을 대대적으로 도입하려고 하면서 나온 얘기다. 자본이 기대하는 대로 과연 그렇게 될까? 1970년대 이후 이윤율 저하경향이 표면화되자 자본은 한편으로는 임금비용 절감을 위하여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화·자동화 기술을 대대적으로 채용했다. 예컨대 공장을 자동화하는 스마트공장이 등장했다. 사무자동화도 진행됐다. 그 결과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노동자가 줄어드는 동시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공장과 기업을 자동화하기 위해서는 생산기계든 사무기계든 기계에 대한 투자 규모가 크게 늘어나야 한다. 그러면 당장에는 노동생산성 향상으로 이윤율이 높아지지만 머지않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어 이윤율이 다시 저하한다. 그러므로 스마트 공장은 고급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만 적용되고 범용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은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한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산업 공동화가 일어났다. 그 후과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금 중산층이 몰락하여 격심한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 괴물 같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또 다음 대통령에 오를지 모르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정보화·자동화를 더욱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4차 산업혁명은 중산층을 더욱 몰락하게 하여 계급갈등을 내전수준으로 격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4차 산업혁명이나 디지털 전환이니 하는 시대인식은 눈앞의 움직임만 말할 뿐 그런 움직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큰 역사적 흐름은 말하지 않거나 말하지 못한다. 그런 인식을 흔히 근시안(myopia)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근시안적 시대인식은 자본가계급의 희망사항을 말하는 담론 즉 자본의 이데올로기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희망사항을 말한 대동아공영권이 일본 군벌과 독점재벌의 이데올로기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뉴딜 전환’은 어떤가? 이것은 주로 민주당과 친 민주당 성향의 이데올로그(논객)들이 쓰는 용어다. 사실 ‘거대한 전환’이라는 말은 칼 폴라니라는 학자가 1944년에 지은 책의 이름이다. ‘거대한 전환’이란 자본주의는 고삐 풀린 시장의 작용으로 인해 사회 양극화와 황폐화를 빚어내어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하며, 이 때 이 사회 양극화와 황폐화를 수정하는 거대한 반작용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반작용을 그는 ‘거대한 전환’이라고 했다. 폴라니는 고삐 풀린 시장의 이런 부작용을 ‘악마의 맷돌’이라고 격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반작용 즉 ‘거대한 전환’은 고삐 풀린 시장의 부작용이 가장 심했던 미국에서 처음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에 대공황이 발생하여 실업자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 등 사회의 양극화와 황폐화가 극심해졌는데, 그러자 이 문제를 극복하려는 정책이 등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명한 뉴딜(New Deal) 정책이 그것이다.7)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원조 나라인 영국에서 보수당의 주도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치고 나왔다. 그러자 다른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도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다시 장기불황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사회 양극화와 황폐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바 1930년대의 뉴딜 정책과 같이 다시 한 번 시장을 규제하고 노동과 사회를 보호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칠 때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뉴딜 전환’은 ‘디지털 전환’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실현불가능하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아직 충분히 발전하여 이른바 성숙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대폭적인 분배개선을 하고도, 아니 오히려 그와 같은 분배개선을 통하여 자본축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자본가들은 2차대전이 시작된 194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오기까지 30년을 황금기(glorious thirties)라고 부를 정도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금 그런 황금기를 거쳐 성숙단계를 지나 하강 단계 또는 쇠퇴기를 걸어가고 있다. 아니 쇠퇴기를 넘어 소멸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윤율이 너무 낮아져 있는 데에다 인구증가가 멈추어8) 신규투자의 기회도 줄어들고 있어서 이런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것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고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그 결과 노동소득과 소비수요가 만성적으로 부족한 과잉생산 상태가 되었다.) 또 세계화로 공장을 해외로 이전(산업공동화와 이로 인해 고용기회가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한 결과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뉴딜정책이 제안하는 것처럼 분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면 과잉생산은 더욱 심화되면서 이윤율은 더욱 낮아지고 자본은 더욱 더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는 제로성장에서 역성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도 분배를 개선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불가능하다. 최근 미국의 중국에 대한 탈동조(decoupling) 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보라. 정책당국자의 뜻대로 경제가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유지하는 한 그런 대전환은 실시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말하는 사람들의 의향은 무엇인가? 그렇게 분배를 크게 개선하면 헬조선과 같은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현실을 변혁하지 않고 약간 손질(개혁)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든 아니면 최소한 천민자본주의 체제든 그것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뉴딜 전환’은 자본가계급을 대표·대변하는 정치집단 가운데 자유주의 분파의 희망사항을 표현한 담론이다. 이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 과학이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그 두 용어를 즐겨 쓰는 이유다. 자본가를 직접 대변하는 경제신문이 ‘디지털 전환’을 더 선호한다면 자유주의 언론은 ‘뉴딜 전환’을 더 선호한다. 자유주의 정치집단은 그 둘을 묶어서 ‘디지털-뉴딜 전환’을 선호한다. 거기에 가끔 그린-뉴딜 전환이라며 기후위기 극복 의지를 덧붙인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나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자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러한 한 거대한 전환은 불가능하다.

 

3. 노동자의 인식: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의 거대한 전환

 

지금은 전환기가 아니고 그냥 이대로 계속 굴러가는 시대인가? 아니다. 자본가들이 말하는 것과 현저하게 다른 의미에서 지금은 ‘거대한 전환’의 시기이다. 기후위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인류세’라고 말한다.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본세’라고 말한다.10) 인류세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지구생태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고 주장한다. 빙하시대가 오고 그 다음에 간빙기가 오듯이 이제 자연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의해 지구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 온도가 상승하여 대구에서 사과가 생산되지 않고, 해수온이 상승하여 동해에 상어가 출몰하고 있다. 7월초부터 폭우를 동반한 장마가 오는 것도 이런 기후변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지구 생태계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인류가 이렇게 자연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면 이런 변화는 인류가 번성하는 한, 인간의 수를 대폭 줄이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된다. 그러나 이렇게 지구 온난화가 일어난 데는 단순히 인류가 수적으로 번성해서 생겨난 문제라기보다 서구를 비롯하여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산업화에 그 원인이 있다. 현 기후위기의 원인은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나 인도와 같은 나라들의 국민들에게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 자르듯이 인류가 지구를 뒤덮어서 이렇게 기후위기가 초래됐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면 공장이 가장 많고 노동자가 가장 많은 중국이 가장 큰 원인제공자인가? 기후위기에는 중국의 산업화에도 큰 원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곳이 세계의 공장이므로. 그러나 그곳 공장에서 만들어낸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주로 미국·유럽·일본 같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이다. 이들이 자기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자국에서 생산하기보다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 나라들에서 수입하여 소비한다. 이들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이 지금처럼 대량소비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대량생산은 지속될 수 없다. 그러면 선진자본주의 나라 국민들은 왜 그렇게 대량소비 하는가? 그렇게 대량소비 해야 자본의 대량생산이 지속될 수 있고, 대량생산이 이루어져야 자본의 대량이윤이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의 탐욕적인 이윤추구가 기후위기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11) 그러므로 지금은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지금은 자본세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시대, 탈자본의 시대이다. 자본의 시대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관계 아래서 살아간다. 그런데 자본주의, 무엇보다 특히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면서 더 많은 원료를 사용하여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낸 결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고 이윤율이 저하되었다. 이것은 투자유인의 저하이다. 이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고자 임금을 삭감하면12) 노동자의 소득이 줄어들고 생활이 어려워진 노동자는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인구가 감소하니 투자기회가 사라진다. 이것은 선진자본주의 나라의 공통적인 현실이다.13) 그 나라들 안에서는 더 이상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잃어버린 30년” 운운하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유럽 전반이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이고 미국에도 나타나고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노동인구가 감소하는데 어떻게 경제가 성장하며 자본이 축적될 수 있는가?14) 자본주의는 스스로 사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는 서구 봉건제가 14세기에 귀족의 증대된 화폐욕망으로 인한 혹심한 착취로 인해 기근이 빈발하고, 농노들의 건강이 악화되자 페스트가 창궐하고, 그 결과 인구가 대폭 감소하여 스스로 사멸의 길을 걸은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지속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것은 공상적으로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기초로 한 과학적인 전망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수백 년 만의 거대한 전환기이다.

 

경제가 원만하게 굴러가지 않으면서 돈 없고 힘없는 노동자·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일하는 사람들의 과로사와 산업재해 그리고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늘어난다. 일할 능력도 있고 일하고 싶지만 일하지 못하는 실업자도 늘어난다. 노동능력 없는 노인들의 빈곤이 심화한다. 또 1인 가구,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 자살, 노인 자살, 고독사, 우울증과 공황장애, 마약, 성매매 같은 것들이 만연한다. 학교폭력, 성폭력, 스토킹 살인, ‘묻지 마 살인’ 같은, 인간성이 파괴된 인간들의 타인에 대한 폭력이 늘어난다. 영국 런던의 빈민폭동(2011년), 미국 흑인시위(2020년 미니애폴리시), 프랑스 이슬람 청년폭동(2005년과 2023년)과 같은 이유 있는 폭력사태도 빈발한다. 인간이 의식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이상 이런 사회적 상태는 지속될 수 없다. 어떤 방향으로건, 어떤 방법으로건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전환기가 도래하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지금이 바로 그런 거대한 전환의 시기이다. 인간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도, 인간이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도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활동에 있어서나 분배하고 소비하는 생활에 있어서나!

 

4. 전환기의 노동자와 노동운동: 인간이 해방된 세상/인간성이 해방된 인간을 향하여

 

‘자본세’가 막을 내리는 이런 전환기이므로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지 않으며 안 된다. 목표로 설정하기에 앞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상도 못하는데 목표로 설정할 수 있겠는가? 노동대학에서 15년 전에 베네수엘라와 쿠바에 다녀오고 나서 “사회주의를 상상하자”고 내걸었다. 사람들은 왜 그것을 목표로 삼자고 하지 않고 상상하자고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아니 어느 사회체제나, 민중에게 상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1968년 68혁명 당시 프랑스 청년들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며 상상의 억압을 비판하고 상상의 해방을 요구했다. 지금과 같이 암울한 시기에, 그리고 역사적 대전환의 시대에 민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의 회복이다. 지배자들은 기술적인 문제에서는 ‘혁명’ 운운하며 창의적인 것을 강조하면서 사회적·역사적 문제에서는 그런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그 이유는, 기술적인 창의성이나 상상력은 자본의 축적에 도움이 되지만 사회·역사적 상상력은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상상을 하는 것과 공상을 하는 것은 다르다. 공상과학에서 얘기하던 것이 때로 현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공상이 현실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공상적이지만 현실적인 것이 우리가 말하는 상상력일 것이다. 그런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한 통찰에서 나온다. 전태일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색하면서 만인이 하나로 용해된 상태를 꿈꾸었다. 그것을 상상했다. 그 꿈을 이루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지금 노동자와 민중들에게는 전태일과 같은, 사색을 통한 상상이 필요하다. 전태일은 그것을 “경험에 입각한 양심의 소리”라고 했다.15) 꼭 많은 책을 읽어야만, 많은 지식이 있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자연과 인간을 같은 위치에 놓을 수는 없지만 자본가들이 생각하듯이 이윤을 벌기 위해 마음대로 쓰고 버려도 되는 소모품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라틴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땅과 산과 물 같은 자연에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그런 내용을 헌법과 법률에 포함시켰다.16) 이런 원시공동체 사회의 지혜를 복원해야 한다. 이런 것은 하지 않고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만 여러 마리 자식처럼 부르며 사랑하는 것은 자기애이지 동물애도 아니고 자연애는 더욱 아니다.

 

둘. 더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인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개로 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맺고 생활을 영위한다. 인간은 개별적으로 자연과 관계를 맺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자본주의적 형태를 그대로 둔 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위와 같이 바꾸자고 하는 것(환경주의자들처럼)은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를 잘 모르는 탓이거나 심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려는 것이다. “뭣이 중한디”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한다. 한편으로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의 노동자를 임금노동자로 고용하여 ‘피’고용인으로 삼는다. 그런 고용-피고용 관계에서는 인간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지금의 자본(가)-임금노동(자) 관계는 이조 시대 양반과 노비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노비에 비해 노동자는 인격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피지배자이기에는 노비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아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추호의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첫 번째 수기 끝 부분에 자기 세계관을 적은 글) 이런 지배⸳착취관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노동해방이라고 불렀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한 관계는 왜 생겨나고 지속되는가?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착취하여 이윤을 획득하고 나아가 탐욕으로 더 많은 착취를 하고자 즉 자본축적을 하고자 자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불합리한 관계는 지금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신에 내재하는 모순에 의해 쇠퇴하고 있고 사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17)

 

하지만 자본주의를 폐지했던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는 실패해서 역사무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없으면 우리는 노동해방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소련이 붕괴하자 노동운동에서 노동해방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극히 소수지만 노동해방을 기치로 내거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 대해 노동자들은 별로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노동자 대중의 눈으로 보기에 이들은 그저 대안 없이 과격한 사람들 또는 완고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 노동자는 노동해방의 꿈을 버리고 자본주의 현실에 굴종하면서 그 틀 안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성공 가능성이 없는 디지털-뉴딜-녹색전환이나 계속 시도해야 하는가? 여기에 진짜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배와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꿀 뿐 아니라 전태일 동지가 꿈꾸었듯이 만인이 하나로 용해된 상태,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 모든 인간적인 관계는 돈 때문에 파괴되고 있다. 친구고 가족도! 그 밑바탕에는 모든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교환하는 관계가 가로놓여 있으며, 그 뿌리에는  인간의 노동을 상품으로 사고파는 관계가 가로놓여 있다. 진정한 인간적인 사회라면 사람들은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서로 사고파는 관계를 극복해야 한다.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는 상품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상품관계가 사라지려면 인간의 노동이 상품이 아니어야 한다. 이제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 나를 아는 나, 나를 모르는 나에게 선물로 내놓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인간은 참으로 만물의 영장으로서 고귀한 존재가 될 것이며, 그 사회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인류는 지금 이런 거대한 전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지 않으면 희망이 없을 것이다. 그 희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의 끈을 놓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파시즘과 전쟁 같은 야만밖에 없을 것이다.

 

체 게바라의 말처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1) “세상은 누구나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고.” 67. 2월 27일. 『전태일의 일기·수기 편지 모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06쪽. 

2) 『정치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궁극적 목적인 국가는 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국가적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3) 신석기 사회와 문명에 대해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현재를 보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대륙에는 서구인들이 정복하기 전에 신석기 원시공동체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신석기 국가가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원주민들이 원시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라틴 아메리카사』 상·하. 강석영 저 및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카를로스 푸엔테스 저, 서성철 옮김, 까치글방 등을 읽어보시오.

4)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한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노예는 생명 있는 도구”라고 규정했다. 이 시대에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마소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존재, 다만 생명 있는 물질적 존재였다.

5)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면 저희들은 무엇에 의해 도를 말하고 전하겠습니까?’고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계절이 운행되게 하고 만물이 자라게 하되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했다.” 공자는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요 궁극적 목표라고 한 것이다.

6) 서정주는 해방 직후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7) 여러 가지 정책이 있지만 3R정책으로 압축된다. 구제(Relief), 부흥(Recovery), 개혁(Reform)이 그것이다.

8) 이것은 선진자본주의 공통의 현상이다. 그 가운데 한국이 가장 심각하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모델을 답습한 중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7월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한 한 회합에서 행한 연설에서 대대적인 이주노동자 수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9)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말은 네덜란드 화학자로서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크뤼천(Paul Crutzen)이 2000년에 제안한 용어로서, 새로운 지질시대 개념이다.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의 환경체계는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지구환경과 맞서 싸우게 된 시대를 뜻한다. 시대 순으로는 신생대 제4기의 홍적세와 지질시대 최후의 시대이자 현세인 충적세에 이은 전혀 새로운 시대이다.”(이상 두산백과 두피디아에서 인용) 그러나 이런 규정은 아직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기후위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 용어를 선호한다.

10) 영어로 Capitalocene라는 것인데, '인류세'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크다. 따라서 아직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현 기후의기의 원인이 자본의 축적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는 점에서, ‘인류세’가 자본-변호론이라면 ‘자본세’는 자본-비판론이라 하겠다.

11) 최근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기업의 탐욕으로 발생했다는 ‘탐욕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출현했다. 자본의 입장에서 편집되는 유서 깊은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지는 최근호 논설에서 “‘탐욕플레이션’(greedflation)은 말도 안 되는 개념 nonsense idea이”라며 이 용어에 반감을 드러냈다. <이코노미스트>, 2023. 07. 08-14

12) 2023년도 최저임금 인상은 명목임금으로는 인상이지만 실질임금으로는 삭감이다.

13) 이 또한 <이코노미스트> 지에서 얼마 전 보도했다. 인터넷 판 6월 1일자에 인구 감소로 선진국 뿐 아니라 조만간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들까지 포함하여 전 세계가 인구감소로 경제위기에 처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한국은 인구감소가 너무 급격하여 그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14)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축적은 곧 프롤레타리아의 증식”이라고 했다. 임금노동자의 증가 없이 자본은 확대재생산 즉 축적을 할 수 없다. 자본가들과 국가가 인구감소에 대해 크게 걱정하는 이유다.

15) “인생이란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다. 진리란 경험에 의한 양심의 소리가 진리다" 전태일, 앞의 책, 231~132쪽.

16) 원주민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에콰도르에서는 헌법으로, 볼리비아에서 법률(어머니 대지법)로 ‘자연의 권리’를 법적 권리로 규정했다.

17) 이윤율 저하 경향법칙과 궁핍화 법칙 및 쇠퇴기의 인구법칙인 ‘생산가능인구 감소 법칙’이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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