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세(각국의 계급투쟁과 국제정치) | 마오주의 공산당의 이상한 마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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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LPS(민중투쟁 국제연맹) 작성일08-07-31 00:00 조회1,55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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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공산당의이상한마오주의080701.hwp (40.5K) 5회 다운로드 DATE : 2018-07-11 1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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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 선거(2008. 4. 10)가 치러진 지 딱 한 달 만에 도착한 네팔국 카트만두의 건물 벽과 거리의 하늘에는 낫과 망치가 펄럭이고 있었다. 벽에는 선거 당시의 포스터들이 아직 남아 있는데 적어도 타멜의 거리에서는 네팔공산당(M)의 포스터가 압도적이었다. 라인초르로(路)에 인접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자마자 둘러보러 나선 길에 마침 터미널 근처의 라트나 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네팔공산당(M)의 집회를 볼 수 있었다. 연단의 한편에서 앰프가 흘리는 연주에 맞추어 한 가수가 구슬프고 처량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 아래위로 자주빛 옷을 입은 사내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함께 동행했던 카지만은 마음을 다잡는 집회라고 설명한다. 물구나무서기는 그래서 등장한 것일까. ‘요가의 왕’으로 불리는 물구나무서기는 세상을 뒤집어 역지사지(易地思之)한다는 자세이기도 하다. 연단에 바싹 다가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사내를 살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무념무상에 빠져있을 것으로 짐작했던 사내는 의외로 멀쩡히 눈을 뜨고 미동조차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집힌 세상을.
모든 일의 가장 가까운 시작은 2005년 9월 네팔공산당(M)의 일방적(!) 휴전이었다. 1996년 인민전쟁을 선언한 이후 두 번의 휴전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정부군과의 합의에서 이루어진 휴전이었다. 2005년의 휴전은 카트만두의 정당연합인 7개 정당연합(SPA)과의 ‘12개 항 각서’로 그리고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
2006년 평화협정은 네팔정부군과 인민해방군의 무장해제와 적대행위 금지, 왕정폐지, 공화국으로의 이행, 해방구의 인민정부 해산, 과도헌법과 과도정부의 구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협정에 따라 인민해방군은 카일라리(Kailali)와 치트완(Chitwan)을 비롯한 7개 지역에 지정된 막사에 수용되었고 정부군과 인민해방군의 무기는 유엔 네팔임무단(UNMIN, UN Mission In Nepal)의 감시 아래 별도로 보관되었다. 양측의 병력은 영외에서는 전투복을 입을 수 없었으며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총을 소지할 수 없었던 것은 경찰병력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나무막대기를 들고 다녀야 했다.
이 평화협정은 진짜 평화협정이었다. 2007년 4월에는 과도정부와 과도의회가 구성되었는데 네팔공산당(M)에서도 상임위원인 크리시나 바하두르 마하라(Krishina Bahadur Mahara) 등 4명이 내각의 각료로 참여했다. 과도의회에서도 7개 정당연합(SPA)의 기존 의석인 209석에 더해진 73석을 할애받았다. 네팔공산당(M)은 총을 내려놓고 대신 4명의 각료와 73개의 의석을 받아들고 의회정치에 진출했던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연히 이건 신실한(?) 마오주의자들이 취할 전술도 태도도 아니었다. 마오주의의 인민전쟁이란 농촌을 근거로 무장투쟁을 벌이며 해방구를 조직하고 확대하며 적들의 근거지인 도시를 포위해 좁혀 들어가다 마침내 숨통을 끊는 것이다. 이게 인민전쟁의 지구전 전략이고 신민주주의 혁명은 그로써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일찍이 마오쩌둥이 그렇게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끌었고 적어도 1994년 등장한 후 1996년 인민전쟁을 선포한 네팔공산당(M)의 투쟁전략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은 마오의 가르침에 따라 농촌을 근거지로 인민전쟁을 선포했고 해방구를 늘렸으며 해방구를 통치할 인민정부를 구성했다. 왕정은 장가이섹의 국민당정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봉건적이고 반민중적이었으며 제국주의자들에 의존했고 총을 앞세워 민중을 억압했다. 부정과 부패는 양념이었다. 네팔 인민은 억압자인 왕정을 혐오했으며 마오주의자들의 편이었다. 인민전쟁 5년 만에 마오주의자들은 전국토의 70퍼센트를 통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인민전쟁은 극도로 성공적이었다.
도시 봉기전략의 도입
그런데도 네팔의 인민전쟁은 전통적인(또는 고전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대신에 전혀 새로운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일찍이 마오의 중국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적의 심장부인 카트만두로 진공을 펼쳐 숨통을 끊을 만한 능력(무력)이 네팔공산당(M)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2005년에 이르러 전국토의 80퍼센트를 수중에 넣었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던 네팔공산당(M)의 인민해방군이 여세를 몰아 왕정쿠데타의 실패로 아수라장이 된 카트만두로 진공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더욱이 네팔공산당(M)이 마오주의 인민전쟁에 있어 지구전(持久戰)의 3단계, 즉 전략적 방어기와 전략적 대치기, 전략적 공세기 중에서 전략적 공세기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은 2004년이었다. 전략적 공세기에 맞게 인민해방군은 당연히 적극적 공세에 나섰고 전투에서 줄곧 승리를 거두었다. 왕립네팔군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의회로 직행한 네팔공산당(M)의 행동은 전통적 마오주의 상식에서는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네팔공산당(M)의 친애하는 마오쩌둥 동지는 일찍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기묘한 행적을 시작한 것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이전부터였다. 2005년 2월 갸넨드라의 왕정쿠데타는 카트만두를 들끓게 만들었다. 갸넨드라가 해산한 의회의 대부분(205석 중 190석)을 구성하고 있던 7개 정당이 연합을 결성했고 이 시위를 이끌고 있었다. 9월4일에는 왕정쿠데타 이후 최대인 5천명의 시위대가 카트만두 시내에 쏟아져 나와 반왕정, 공화국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같은 날 네팔공산당(M)은 갑작스럽게 3개월간의 휴전을 선언했다. 물론 휴전은 2001년과 2003년에도 있었다. 그러나 두 번의 휴전과 달리 2005년의 휴전은 네팔공산당(M)의 일방적 휴전이었다. 절대왕정의 복고를 선언한 갸넨드라 정권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이 시기에 네팔공산당(M)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말하자면 인민해방군은 이 시기에 카트만두로 진공해 전략적 공세기를 끝내거나 아직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인민전쟁의 공세적 고삐를 죄는 편을 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은 마오주의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게 도시봉기 전략이었다.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한 네팔공산당(M)은 카트만두의 SPA와 반왕정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전제왕정에 대한 공동투쟁, 제헌의회 구성 등을 항목으로 하는 12개 항 각서에 서명한 것은 물론 카트만두의 대중투쟁을 확대하고 봉기로 이끄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말하자면 2005년의 그 뜨거웠던 시기에 네팔공산당(M)의 전술은 ‘인민전쟁을 잠시 멈추고 도시봉기에 역량을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농촌을 근거로 무장투쟁을 벌이던 마오주의 공산당이 원한다고 해서 갑작스레 도시봉기를 조직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도시봉기를 지원하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군사적 공세를 강화해 적의 역량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네팔공산당(M)이 휴전을 선언하고 카트만두로 진출했다는 것은 이전에 도시봉기 전략을 도입했으며 도시에 대중적 역량을 조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적 마오주의 인민전쟁 전략과 동떨어진 네팔공산당(M)의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이 2001년 2월 당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프란차다의 이름을 빌린 ‘프라찬다 노선(Prachandapath)’이었다.
프라찬다의 길
1996년 시작한 인민전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 분명했다. 2001년 2월 비밀리에 열린 2차 당 대회는 네팔공산당(M)에게 지난 5년의 인민전쟁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비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중앙위원회가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네팔의 조건에 맞게 해석하고 향후의 투쟁노선으로 제출한 것이 이른바 프라찬다 노선이었다. 그 핵심 내용 중의 하나가 마오주의의 인민전쟁과 도시봉기의 결합이었다. 5년의 인민전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지구전적(持久戰的) 인민전쟁은 농촌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지구전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네팔공산당은 5년 동안의 인민전쟁으로 광범위한 해방구를 획득하고 인민정부의 수립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근거지를 확보하고 안정적인 농업적,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공습에 대한 방책을 세울 수 없었고 보안경찰의 일상적인 토벌과 탄압도 지구전을 수행할 안정적 근거지를 확보할 수 없는 이유였다. 또한 네팔과 같은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국가에서는 도시(카트만두)에서의 봉기를 통하지 않고 농촌에서의 활동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국가권력이 집중된 카트만두에서 투쟁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 프라찬다 노선의 배경이었다. 그 대안으로 도시봉기 전략이 제출되었고 다음과 같은 전술이 제시되었다.
국가정책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
(도시에서의)파업과 가두시위를 가능하게 할 조직 구성
왕립군에 대한 반란 선동
동조세력과 반대 정치세력의 분리 모색
이 전술들이 인민전쟁과 달리 도시봉기를 목적으로 하는 비폭력 전술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라찬다 노선은 마오주의의 전통적 인민전쟁과 도시봉기를 결합하는 노선으로 20세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노선인 것은 분명하다.(혹자는 이 노선을 두고 레닌의 도시봉기인 10월 혁명과 인민전쟁인 마오의 중국혁명이 결합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2005년의 일방적 휴전과 카트만두에서 이루어진 정치세력과의 공동투쟁은 2001년 프란찬다 노선의 정식화 이후 네팔공산당(M)이 꾸준히 독자적인 도시사업을 벌여왔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민주주의야. 고루한 자들아.”
2001년 9월 협상의 결과로 성사된 휴전은 확실히 이 새로운 노선의 첫 번째 실험대였다. 휴전으로 얻어진 공백기에 네팔공산당(M)은 같은 해 9월 카트만두에서의 대규모 시위의 조직을 시도했으며 학생과 청년, 여성을 중심으로 당조직의 확대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고 역량을 집중했다. 인민전쟁에 도시봉기를 결합하는 이 노선은 도시에서의 대중조직 확대, 그리고 기존 정치세력과의 연합으로 이어졌다. 당면 목표는 왕정의 붕괴와 공화국의 수립이었으므로 연합전선의 형성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은 확실히 계급적 주도권에 전통적 수준으로 연연하지 않았다. 마오주의의 신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여전히 노동자, 농민의 계급적 주도권이 보장되는(되어야 하는) 혁명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계속혁명은 레닌과 마오의 이념적 보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 상임위원회 위원이며 당 대변인인 크리시나 바하두르 마하라는 프라찬다 노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라찬다 노선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우리는 맑스와 레닌, 마오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도그마로 받아들이길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민이 스스로 관리함으로써 부유한 자들이 선거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21세기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우리는 모든 정당에게 투명하고 평등한 기회를 원한다.”
말하자면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프라찬다 노선의 또 다른 핵심인데 프라찬다 자신은 2006년 11월 뉴델리에서 열린 ‘지도자 회담’에서의 연설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넉넉하게 인용해보자.
....그러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그 동력을 잃어버리고 점차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민주주의로 탈바꿈하는 동안 국가의 실천에 있어 인민대중의 주도권과 실천은 결국 사망선고를 받았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 오직 한줌의 지도자들만이 능동적이고 대다수 대중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상황은 스탈린 시대에 들어 더욱 악화되었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발전시키고자 담대한 실험(문화혁명)을 시도했지만 그의 노력도 질적인 진전을 거두지 못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왜 결국 실패한 것일까? 왜 그들의 적으로부터 전체주의라는 오명을 얻어야 했던 것일까? 21세기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선언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지난 오류가 던져준 이 질문에 답을 구해야 하고 대담하게 (다시)시작해야 한다.
우리 당은 ‘21세기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결의를 받아들이고 몇 가지 새로운 테제를 제출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테제는 심지어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헌법에 다당(多黨) 경쟁을 인정하고 그것의 조직을 명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프레임워크에서 다당 경쟁의 사상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과 새로운 활력에 거대한 일보전진이다. 오직 이 방법만이 권력을 손에 넣은 공산당의 독점적, 관료적 경향을 억누를 수 있으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제도화할 수 있다. 나아가 국가적 실천에서 인민대중의 개입과 감시, 일상적인 통제의 보증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오직 이런 경우에만 ‘인민이 통치한다’는 의미에서의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다....
프란찬다와 같은 21세기 공산주의자의 말에 따른다면 ‘문제는 민주주의’이다. 20세기 공산주의의 파탄은 민주주의 파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독재가 필연적으로 야기할 관료화, 혁명의 부패와 타락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공산당의 관료주의적 독재로 변질되고 민주주의가 실종되었으며 그 결과 당이 인민대중과 철저하게 유리되었던 것에 기인했다. 요컨대 참된 (인민)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가능하지 않다. 프라찬다와 네팔공산당(M)의 ‘21세기 민주주의 발전’은 바로 그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공산주의로 나아갈 방법으로 ‘다당제’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새로운 것일까. 이게 정말 프라찬다에게 특허를 부여해야 할 독점적 아이디어일까.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1949년 혁명 후 중국의 헌법은 다당제를 명시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도 1972년 이른바 사회주의 헌법을 도입하기 전에는 다당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의 소련도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공산당 일당독재를 확고하게 실현했으며 그 일당독재 속에서 민주주의는 질식하고 관료주의의 독버섯이 꽃을 피웠으며 때로는 1인 독재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론적 명분이 되었던 것은 언제나, 어떤 나라에서나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을 선언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헌법에 명시하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문제는 민주주의를 보장할 아무런 장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프란찬다 노선은 ‘경쟁’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다당제는 ‘투명하고 평등한’ 경쟁을 전제하며 이 경쟁에서 공산당은 아무런 불편부당한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서 사실상 돈으로 선거를 구매하는 따위의 불투명한 경쟁도 배제된다. 말하자면 이것이 프란찬다 노선이 제시하는 ‘21세기 민주주의 발전’의 내용이다.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제헌의회 소집을 내세워 SPA와 협상을 실현시킨 네팔공산당(M)의 행진은 과도정부와 과도의회에의 참여에 뒤이어 제헌의회 선거로까지 이어졌다. 선거에서 승리를 점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팔의회와 UML(맑스레닌주의당)은 자신들이 네팔공산당(M)에 패배할 것이라 예측하지 않았고 그건 또 이 선거를 바라보던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은 자신들의 노선에 따라 제헌의회 선거로 나아갔고 또한 투명하고 평등하게 경쟁했다. 그런 프라찬다 노선의 21세기 실험의 의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폐기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을 (21세기의)민주주의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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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자 주〕이 글은 필자가 곧 발표할 네팔에 관한 긴 글의 일부다. 두루 관찰한 기행문이라 하긴 어렵고, 네팔 혁명주체들의 독특한 노선에 대해서만 조명했다. 네팔 마오주의당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인도 여러 주에서 마오주의 세력이 동일한 변혁 전략에 따라 무장투쟁을 벌여 왔고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가장 가까운 시작은 2005년 9월 네팔공산당(M)의 일방적(!) 휴전이었다. 1996년 인민전쟁을 선언한 이후 두 번의 휴전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정부군과의 합의에서 이루어진 휴전이었다. 2005년의 휴전은 카트만두의 정당연합인 7개 정당연합(SPA)과의 ‘12개 항 각서’로 그리고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
2006년 평화협정은 네팔정부군과 인민해방군의 무장해제와 적대행위 금지, 왕정폐지, 공화국으로의 이행, 해방구의 인민정부 해산, 과도헌법과 과도정부의 구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협정에 따라 인민해방군은 카일라리(Kailali)와 치트완(Chitwan)을 비롯한 7개 지역에 지정된 막사에 수용되었고 정부군과 인민해방군의 무기는 유엔 네팔임무단(UNMIN, UN Mission In Nepal)의 감시 아래 별도로 보관되었다. 양측의 병력은 영외에서는 전투복을 입을 수 없었으며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총을 소지할 수 없었던 것은 경찰병력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나무막대기를 들고 다녀야 했다.
이 평화협정은 진짜 평화협정이었다. 2007년 4월에는 과도정부와 과도의회가 구성되었는데 네팔공산당(M)에서도 상임위원인 크리시나 바하두르 마하라(Krishina Bahadur Mahara) 등 4명이 내각의 각료로 참여했다. 과도의회에서도 7개 정당연합(SPA)의 기존 의석인 209석에 더해진 73석을 할애받았다. 네팔공산당(M)은 총을 내려놓고 대신 4명의 각료와 73개의 의석을 받아들고 의회정치에 진출했던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연히 이건 신실한(?) 마오주의자들이 취할 전술도 태도도 아니었다. 마오주의의 인민전쟁이란 농촌을 근거로 무장투쟁을 벌이며 해방구를 조직하고 확대하며 적들의 근거지인 도시를 포위해 좁혀 들어가다 마침내 숨통을 끊는 것이다. 이게 인민전쟁의 지구전 전략이고 신민주주의 혁명은 그로써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일찍이 마오쩌둥이 그렇게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끌었고 적어도 1994년 등장한 후 1996년 인민전쟁을 선포한 네팔공산당(M)의 투쟁전략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은 마오의 가르침에 따라 농촌을 근거지로 인민전쟁을 선포했고 해방구를 늘렸으며 해방구를 통치할 인민정부를 구성했다. 왕정은 장가이섹의 국민당정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봉건적이고 반민중적이었으며 제국주의자들에 의존했고 총을 앞세워 민중을 억압했다. 부정과 부패는 양념이었다. 네팔 인민은 억압자인 왕정을 혐오했으며 마오주의자들의 편이었다. 인민전쟁 5년 만에 마오주의자들은 전국토의 70퍼센트를 통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인민전쟁은 극도로 성공적이었다.
도시 봉기전략의 도입
그런데도 네팔의 인민전쟁은 전통적인(또는 고전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대신에 전혀 새로운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일찍이 마오의 중국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적의 심장부인 카트만두로 진공을 펼쳐 숨통을 끊을 만한 능력(무력)이 네팔공산당(M)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2005년에 이르러 전국토의 80퍼센트를 수중에 넣었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던 네팔공산당(M)의 인민해방군이 여세를 몰아 왕정쿠데타의 실패로 아수라장이 된 카트만두로 진공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더욱이 네팔공산당(M)이 마오주의 인민전쟁에 있어 지구전(持久戰)의 3단계, 즉 전략적 방어기와 전략적 대치기, 전략적 공세기 중에서 전략적 공세기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은 2004년이었다. 전략적 공세기에 맞게 인민해방군은 당연히 적극적 공세에 나섰고 전투에서 줄곧 승리를 거두었다. 왕립네팔군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의회로 직행한 네팔공산당(M)의 행동은 전통적 마오주의 상식에서는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네팔공산당(M)의 친애하는 마오쩌둥 동지는 일찍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기묘한 행적을 시작한 것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이전부터였다. 2005년 2월 갸넨드라의 왕정쿠데타는 카트만두를 들끓게 만들었다. 갸넨드라가 해산한 의회의 대부분(205석 중 190석)을 구성하고 있던 7개 정당이 연합을 결성했고 이 시위를 이끌고 있었다. 9월4일에는 왕정쿠데타 이후 최대인 5천명의 시위대가 카트만두 시내에 쏟아져 나와 반왕정, 공화국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같은 날 네팔공산당(M)은 갑작스럽게 3개월간의 휴전을 선언했다. 물론 휴전은 2001년과 2003년에도 있었다. 그러나 두 번의 휴전과 달리 2005년의 휴전은 네팔공산당(M)의 일방적 휴전이었다. 절대왕정의 복고를 선언한 갸넨드라 정권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이 시기에 네팔공산당(M)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말하자면 인민해방군은 이 시기에 카트만두로 진공해 전략적 공세기를 끝내거나 아직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인민전쟁의 공세적 고삐를 죄는 편을 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은 마오주의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게 도시봉기 전략이었다.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한 네팔공산당(M)은 카트만두의 SPA와 반왕정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전제왕정에 대한 공동투쟁, 제헌의회 구성 등을 항목으로 하는 12개 항 각서에 서명한 것은 물론 카트만두의 대중투쟁을 확대하고 봉기로 이끄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말하자면 2005년의 그 뜨거웠던 시기에 네팔공산당(M)의 전술은 ‘인민전쟁을 잠시 멈추고 도시봉기에 역량을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농촌을 근거로 무장투쟁을 벌이던 마오주의 공산당이 원한다고 해서 갑작스레 도시봉기를 조직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도시봉기를 지원하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군사적 공세를 강화해 적의 역량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네팔공산당(M)이 휴전을 선언하고 카트만두로 진출했다는 것은 이전에 도시봉기 전략을 도입했으며 도시에 대중적 역량을 조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적 마오주의 인민전쟁 전략과 동떨어진 네팔공산당(M)의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이 2001년 2월 당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프란차다의 이름을 빌린 ‘프라찬다 노선(Prachandapath)’이었다.
프라찬다의 길
1996년 시작한 인민전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 분명했다. 2001년 2월 비밀리에 열린 2차 당 대회는 네팔공산당(M)에게 지난 5년의 인민전쟁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비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중앙위원회가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네팔의 조건에 맞게 해석하고 향후의 투쟁노선으로 제출한 것이 이른바 프라찬다 노선이었다. 그 핵심 내용 중의 하나가 마오주의의 인민전쟁과 도시봉기의 결합이었다. 5년의 인민전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지구전적(持久戰的) 인민전쟁은 농촌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지구전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네팔공산당은 5년 동안의 인민전쟁으로 광범위한 해방구를 획득하고 인민정부의 수립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근거지를 확보하고 안정적인 농업적,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공습에 대한 방책을 세울 수 없었고 보안경찰의 일상적인 토벌과 탄압도 지구전을 수행할 안정적 근거지를 확보할 수 없는 이유였다. 또한 네팔과 같은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국가에서는 도시(카트만두)에서의 봉기를 통하지 않고 농촌에서의 활동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국가권력이 집중된 카트만두에서 투쟁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 프라찬다 노선의 배경이었다. 그 대안으로 도시봉기 전략이 제출되었고 다음과 같은 전술이 제시되었다.
국가정책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
(도시에서의)파업과 가두시위를 가능하게 할 조직 구성
왕립군에 대한 반란 선동
동조세력과 반대 정치세력의 분리 모색
이 전술들이 인민전쟁과 달리 도시봉기를 목적으로 하는 비폭력 전술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라찬다 노선은 마오주의의 전통적 인민전쟁과 도시봉기를 결합하는 노선으로 20세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노선인 것은 분명하다.(혹자는 이 노선을 두고 레닌의 도시봉기인 10월 혁명과 인민전쟁인 마오의 중국혁명이 결합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2005년의 일방적 휴전과 카트만두에서 이루어진 정치세력과의 공동투쟁은 2001년 프란찬다 노선의 정식화 이후 네팔공산당(M)이 꾸준히 독자적인 도시사업을 벌여왔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민주주의야. 고루한 자들아.”
2001년 9월 협상의 결과로 성사된 휴전은 확실히 이 새로운 노선의 첫 번째 실험대였다. 휴전으로 얻어진 공백기에 네팔공산당(M)은 같은 해 9월 카트만두에서의 대규모 시위의 조직을 시도했으며 학생과 청년, 여성을 중심으로 당조직의 확대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고 역량을 집중했다. 인민전쟁에 도시봉기를 결합하는 이 노선은 도시에서의 대중조직 확대, 그리고 기존 정치세력과의 연합으로 이어졌다. 당면 목표는 왕정의 붕괴와 공화국의 수립이었으므로 연합전선의 형성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은 확실히 계급적 주도권에 전통적 수준으로 연연하지 않았다. 마오주의의 신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여전히 노동자, 농민의 계급적 주도권이 보장되는(되어야 하는) 혁명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계속혁명은 레닌과 마오의 이념적 보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 상임위원회 위원이며 당 대변인인 크리시나 바하두르 마하라는 프라찬다 노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라찬다 노선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우리는 맑스와 레닌, 마오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도그마로 받아들이길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민이 스스로 관리함으로써 부유한 자들이 선거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21세기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우리는 모든 정당에게 투명하고 평등한 기회를 원한다.”
말하자면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프라찬다 노선의 또 다른 핵심인데 프라찬다 자신은 2006년 11월 뉴델리에서 열린 ‘지도자 회담’에서의 연설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넉넉하게 인용해보자.
....그러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그 동력을 잃어버리고 점차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민주주의로 탈바꿈하는 동안 국가의 실천에 있어 인민대중의 주도권과 실천은 결국 사망선고를 받았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 오직 한줌의 지도자들만이 능동적이고 대다수 대중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상황은 스탈린 시대에 들어 더욱 악화되었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발전시키고자 담대한 실험(문화혁명)을 시도했지만 그의 노력도 질적인 진전을 거두지 못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왜 결국 실패한 것일까? 왜 그들의 적으로부터 전체주의라는 오명을 얻어야 했던 것일까? 21세기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선언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지난 오류가 던져준 이 질문에 답을 구해야 하고 대담하게 (다시)시작해야 한다.
우리 당은 ‘21세기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결의를 받아들이고 몇 가지 새로운 테제를 제출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테제는 심지어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헌법에 다당(多黨) 경쟁을 인정하고 그것의 조직을 명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프레임워크에서 다당 경쟁의 사상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과 새로운 활력에 거대한 일보전진이다. 오직 이 방법만이 권력을 손에 넣은 공산당의 독점적, 관료적 경향을 억누를 수 있으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제도화할 수 있다. 나아가 국가적 실천에서 인민대중의 개입과 감시, 일상적인 통제의 보증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오직 이런 경우에만 ‘인민이 통치한다’는 의미에서의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다....
프란찬다와 같은 21세기 공산주의자의 말에 따른다면 ‘문제는 민주주의’이다. 20세기 공산주의의 파탄은 민주주의 파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독재가 필연적으로 야기할 관료화, 혁명의 부패와 타락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공산당의 관료주의적 독재로 변질되고 민주주의가 실종되었으며 그 결과 당이 인민대중과 철저하게 유리되었던 것에 기인했다. 요컨대 참된 (인민)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가능하지 않다. 프라찬다와 네팔공산당(M)의 ‘21세기 민주주의 발전’은 바로 그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공산주의로 나아갈 방법으로 ‘다당제’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새로운 것일까. 이게 정말 프라찬다에게 특허를 부여해야 할 독점적 아이디어일까.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1949년 혁명 후 중국의 헌법은 다당제를 명시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도 1972년 이른바 사회주의 헌법을 도입하기 전에는 다당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의 소련도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공산당 일당독재를 확고하게 실현했으며 그 일당독재 속에서 민주주의는 질식하고 관료주의의 독버섯이 꽃을 피웠으며 때로는 1인 독재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론적 명분이 되었던 것은 언제나, 어떤 나라에서나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을 선언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헌법에 명시하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문제는 민주주의를 보장할 아무런 장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프란찬다 노선은 ‘경쟁’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다당제는 ‘투명하고 평등한’ 경쟁을 전제하며 이 경쟁에서 공산당은 아무런 불편부당한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서 사실상 돈으로 선거를 구매하는 따위의 불투명한 경쟁도 배제된다. 말하자면 이것이 프란찬다 노선이 제시하는 ‘21세기 민주주의 발전’의 내용이다.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제헌의회 소집을 내세워 SPA와 협상을 실현시킨 네팔공산당(M)의 행진은 과도정부와 과도의회에의 참여에 뒤이어 제헌의회 선거로까지 이어졌다. 선거에서 승리를 점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팔의회와 UML(맑스레닌주의당)은 자신들이 네팔공산당(M)에 패배할 것이라 예측하지 않았고 그건 또 이 선거를 바라보던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그러나 네팔공산당(M)은 자신들의 노선에 따라 제헌의회 선거로 나아갔고 또한 투명하고 평등하게 경쟁했다. 그런 프라찬다 노선의 21세기 실험의 의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폐기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을 (21세기의)민주주의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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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자 주〕이 글은 필자가 곧 발표할 네팔에 관한 긴 글의 일부다. 두루 관찰한 기행문이라 하긴 어렵고, 네팔 혁명주체들의 독특한 노선에 대해서만 조명했다. 네팔 마오주의당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인도 여러 주에서 마오주의 세력이 동일한 변혁 전략에 따라 무장투쟁을 벌여 왔고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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