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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세(정치) | 이란 문제의 지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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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승호 작성일08-06-30 00:00 조회1,5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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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문제의 지정학

                                                                                엄 한 진(한림대, 사회학)


  한국에서 이란문제는 미국과의 관계에 국한해 논의되거나 기껏해야 유럽의 개입, 중동국가의 일원이라는 측면이 덧붙여진다. 서구사회와의 관계에 편중된 시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란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의는 첫째, 이 사회가 놓여있는 복합적인 지정학적 차원을 간과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부각시키며 둘째, 시아파와 같은 종교적 요인을 강조하는 반면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요인과 같은 세속적 요인들이 흔히 무시된다. 이 글에서는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이란문제의 지정학을 설명한다.


  1. 이란문제의 지정학


  일반적으로 이란 핵문제와 관련해 거론되는 지정학적 요인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미국, 이스라엘, 친미 아랍국들을 한편으로, 그리고 이란-시리아-헤즈볼라-하마스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대결구도 속에서의 이란의 지위, 둘째, 미국․유럽 대 러시아․중국의 헤게모니 투쟁 속에서 이란의 지정학적 가치, 셋째, 아라비아반도 및 중앙아시아 석유자원의 수송로에 위치한 경제지리적 중요성.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면 첫째,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생각만큼 영원하고 절대적인 숙적이 아니다. 주지하듯이 1979년 이란혁명 이전까지 팔레비 왕조의 이란은 영국을 대체한 미국, 심지어 이스라엘의 동맹국을 자처했다. 이란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악화된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1989년 호메이니의 사망에서 2003년 이라크 침공에 이르는 시기 동안 호전되었다. ‘악의 축’ 발언 이전에 이란이 미국의 이라크 정책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었고 미국의 침공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지금도 이라크 문제에서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 시아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2006년부터 급속히 증대되었던 이라크 저항세력에 대한 이란의 지원이 최근 눈에 띠게 줄어들고 있다. 물론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를 놓고 이란과 미국은 구조적으로 경쟁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지정학적인 요인이 덜 중요한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문제와의 차이다. 따라서 전쟁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 이란에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것은 미국의 사활을 건 지속적인 과제이다.


  둘째, 러시아, 중국과 관련해서는 이란 집권세력은 미국의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전환되는 현 양상을 적극 활용하려고 한다. 19세기부터 밀접한 연관을 맺어온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 더 나아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도 발전시키고 싶어한다. 거꾸로 중국은 석유 등 경제적인 측면, 러시아는 구 소련 지역에 대한 헤게모니 확보, 군사무기 및 핵기술 수출에 대한 전망이 최근 이란 핵문제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현실적 배경이다.

 
  셋째, 중앙아시아, 걸프지역 국가들과의 관계도 이란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인도-파키스탄-이란으로 이어지는 가스관 공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세계 제2의 가스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이란으로부터 파키스탄-인도에 이르는 2700km의 가스관 공사에 대한 논의가 1994년 시작된 이후 별 진전이 없다가 2005년부터 본격화되었다.1)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조치를 근거로 미국이 인도, 파키스탄 모두에 이란과 경제적 관계를 맺지 않도록 다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숙적이기는 하지만 ‘평화의 파이프라인’ 계획에 진전이 나타나고 있다.

  냉전시대 중앙아시아와의 관계는 소련의 존재로 인해 활동반경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아프가니스탄과는 형식적인 문화적 차원의 교류를 넘어선 관계를 맺어왔다. 탈레반의 집권기에는 타지크족과 북부동맹을 지지했던 이란이 탈레반 및 파키스탄과 갈등관계에 있었다면 최근에는 시아파가 아프가니스탄 서부지역을 사실상 지배함에 따라 이 지역과 국경을 맞댄 이란의 영향력이 커졌다.


  넷째, 걸프지역 산유국들과의 관계에서는 최근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이란 정상으로는 최초로 카타르에서 개최된 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담에 초대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걸프지역 국가들이 이라크전쟁 이후 높아진 이란의 위상을 의식하고 있다. 현재 이란은 걸프지역 국가간 경제 및 안보 협력체제의 건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걸프 지역에서의 헤게모니 추구는 이미 이란 혁명 이전에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 영국이 이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고 나서 이란이 영국을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이슬람세계의 수장 지위를 놓고 오랜 경쟁관계에 있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최근 걸프지역 국가들간의 협력 차원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란에 대한 사우디나 걸프지역 소국들의 태도 변화는 무엇보다도 이라크에서 미국이 보여준 모습으로 인한 실망, 그리고 이에 따른 미국의 영향력 감소가 그 배경이 되었다. 이들은 자국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차원에서 미국으로부터 더 큰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란이 미국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고려되고 있다. 걸프지역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이란은 군사력과 종교적 영향력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다. 아랍 에미레이트가 이란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원하고 있는 등 경제적 차원에서도 관계가 증진되고 있다. 종합해보면 미국의 영향력 약화에 대한 대안으로 이란과의 관계 개선이 고려되면서 동시에 이란의 패권주의와 핵보유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 유럽과의 관계 증진도 시도하는 양상이다.


  한편 이러한 구도와 중첩되면서도 더 근본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의 지정학적 구조가 있으며 이는 이란의 대외관계를 틀지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

  첫째, 지리적인 차원을 보면 이란의 대외관계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동,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중앙아시아라는 세 지역과의 관계가 전통적으로 중요했다.

  둘째, 문명적인 차원에서 ‘이란세계’ 또는 ‘페르시아세계’가 중요하다. 이 문명권은 이슬람 이전 페르시아제국에 속했던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 속한 사회들은 아랍인들에게 아랍어가 그렇듯이 페르시아계 언어가 정체성의 주된 요소이다. ‘이란세계’는 ‘아랍세계’, ‘투르크세계’와 대비되는 종족적 범주이다.

  셋째,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란에서 조로아스터교 등 고대 이란종교는 소수종교로 남아있고 대다수가 무슬림, 특히 시아파이다. 이슬람세계에서 소수파인 시아파의 대표적인 국가라는 점에서 이란은 중동에서 독특한 나라다.

  넷째, 지정학적인 면에서 이란은 19세기부터 강대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러시아와 영국은 각각 바다 또는 인도제국을 위해 이란에 관심을 가져왔다. 1차 대전 이후 소련이 러시아를,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영국을 대체하게 된다. 냉전시절 이란은 친서방노선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다.


  2. ‘시아파 이란’의 역사성과 상대성


  위에서 보았듯이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 자리잡은 이란은 미국, 일본, 중국 등 몇몇 나라와의 관계에 국한된 한국의 외교현실에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지역 또는 문화권의 일원이며 다수의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이란문제는 한 두 나라와의 관계나 한 두 측면으로 단순화해서 설명될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시아파 이란’이라는 이미지가 이란에 대한 인식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 중심의 이란사회, 통일성 있는 시아파세계와 그 수장 이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시아파적 정체성이라는 인식은 역사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에 형성된 것이며 그마저도 현실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다. 이란의 현대사를 되짚어 보며 이 점을 확인해보자.

  1978년까지 이란의 이미지는 안정되고 매우 세속화된 사회, 권위주의적이지만 근대주의자였던 국왕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따라서 호메이니의 카리스마에 의해 부활한 이슬람의 힘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 현상에 대해 외부 세계에서는 이란 역사에 있어서 이슬람의 비중, 이란인들의 삶에 있어서 종교의 비중, 성직자의 사회적 비중을 흔히 과대평가했다.3)


  이란에서 시아파 성직계급은 전근대, 근대 모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1979년 이란혁명 전까지 성직계급은 그 어느 시기에도 이란을 정치적으로 지배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란을 정치적으로 근대에 접어들게 한 1906년 ‘헌법혁명’ 전까지 이 나라에서 권력은 왕의 전유물이었다. 그 이후 이란의 역사는 팔레비 왕조의 권위주의적 권력과 의회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왔다. 여기에서 성직자들도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지만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사실 이들은 강력한 압력집단 이상의 지위를 추구하지 못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종교가 도시민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친족제도, 직종별 조직, 종족집단 등도 종교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호메이니의 새로운 점은 바로 성직계급의 정치권력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는 또한 이슬람법(샤리아)의 적용을 정치의 최우선 목적으로 간주함을 의미했다. 이에 상응해 이란의 외교노선에도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팔레비 왕조가 채택했던 현실주의가 아닌 (종교적 성격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제3세계주의에 입각한 대외관계가 그 대표적인 양상이었다. 우선 미․소 양 진영 모두와 경합하는 ‘이슬람진영’의 건설을 추구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이란이 속한 다양한 세계 중 종교적 공간만을 중시했다. 이들에게 이란은 무엇보다도 ‘시아파 이란’이었으며 이슬람혁명의 수출을 통해 시아파를 넘어서 전 이슬람세계의 변화를 꿈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외정책에 있어서 주된 대상은 ‘이슬람세계’였다. 아프리카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이슬람세계 중에서도 그 ‘심장부’에 해당하는 이란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아랍의 일원이 아닌 이란에게 팔레스타인문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이 점 때문이다. 이란은 이 지역을 놓고 소련, 미국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

  간명하고 공격적이고 현실적인 요인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 호메이니 이란의 대외정책은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머지않아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반발은 이라크의 공세였다. 200만 이상의 희생자를 낳은 이 전쟁은 이슬람세계에만 몰두해 있던 이란 성직자들에게 페르시아세계, 아랍세계, 투르크세계라는 범주의 중요성, 그리고 서방진영의 비중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즉 이란은 같은 이슬람세계의, 그러나 아랍세계에 속한 이라크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이 이슬람국가는 서양의 공개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이란사회 내적으로도 전쟁은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때까지 종교적 정체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탄압했던 이란인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호소하게 하였다.4)


  1988년 이란-이라크전쟁이 끝나고 1년도 되지 않아 호메이니가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이란 대외정책이 유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되고 많은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것은 이란의 대외정책에 새로운 개척지의 탄생을 의미했다. 구 소련지역에는 페르시아권과 투르크권 사회들이 있었고 따라서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터키와의 경쟁이 첨예해졌다. 그러나 이 지역 국가들의 대외관계는 종교적 요인보다는 언어나 문화적 요소가 중요했다. 예를 들어 시아파가 다수인 아제르바이젠이 터키와 가까워지자 이란은 아제르바이젠과 갈등관계에 있는, 그리고 기독교 사회인 아르메니아에 가까워진다. 타지키스탄은 수니파 사회인데 이란과 가까워졌다.

  이상과 같이 이란의 대외정책은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혁명 초기에 부각된 종교적 차원을 넘어 다양한 요인들을 고려하는 식으로 변화해갔다. 그런데 이란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일반적 인식은 종교적 차원에 치중한 혁명 초기 이란 이슬람주의자들의 시각에 머물러 있다. 시아파 벨트와 여기에서의 이란의 위치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길게 보아서, 이란은 호메이니 시절에 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온건해지는 등 점차 혁명적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국면으로 변해 왔다. 그런데 2005년 아흐마디네자드의 등장은 과거 혁명을 수출하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급진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호메이니 사후의 실용주의 노선을 지속하는 것인지 또는 반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과거로 회귀하는 것인지?5) 그러나 설령 두 번째 가설이 옳다고 해도 이때의 ‘이데올로기’는 종교적이기보다는 세속적인 성격의 것이다. 이란의 지배세력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요소뿐 아니라 \'이란\'이라는 민족적 요소에 호소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아랍과 투르크, 서양, 러시아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강했던 이란인들을 효과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외적으로도 이란 핵시설에 대한 이스라엘과 미국의 반복적인 위협, 그리고 이란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는 이란 민족주의를 강화시킴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이란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결속을 초래했다.


  3. \'시아파 세계\'의 형성과 한계


  이란 사회가 항상 종교적인 사회가 아니었으며 이란의 대외관계가 종교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듯 이란이 주도한다고 여겨지는 소위 ‘시아파세계’ 역시 특정 시기에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며 매우 불완전하게 묶여져 있는 범주이다. 시아파세계의 결속, 시아파적 정체성은 시아파가 탄생했던 이슬람 초기나 이란이 시아파 사회가 된 16세기부터 시작된 오래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라크 전쟁 이후에나 생겨난 극히 최근의 현상도 아니다. 시아파 세계의 형성은 1979년 이란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란혁명은 이란인들 뿐 아니라 아랍세계의 시아파들에게도 아랍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보다 이란을 중심으로 하는 시아파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아랍 시아파 등은 그간 수니파가 주도하는 아랍사회에서 소외감을 느껴왔다. 이란 종교세력은 자신들의 혁명사상을 주로 시아파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시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미국은 간접적으로 시아파 벨트의 형성의 계기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이라크 정치구도 재편과정을 통해 시아파적 정체성을 활용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이란혁명에서 시작된 시아파세계 형성의 주된 조력자였다. 911테러에 뒤이은 대테러전쟁은 역설적으로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주요 지원세력이었던 이란과 사우디가 아닌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이라크는 이슬람주의나 테러세력과 어떤 연관도 갖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대테러전쟁은 역설적으로 중동에서 이란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탈레반 정권의 붕괴는 탈레반 지지자였던 파키스탄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사우디가 지원하는 이슬람 세력의 비중을 약화시킨 반면에 이란에 망명해 있던 저항세력은 귀국하여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였다. 페르시아어를 쓰고 시아파인 아프간인들이 파슈툰족이자 수니파였던 정권의 억압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이란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게다가 2003년 2차 이라크전쟁은 이란의 숙적이었던 후세인의 이라크를 제거해주었고 시아파의 비중을 강화시켰다.

  또한 이라크 전쟁은 이란이 시리아, 레바논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즉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세속적인 이라크 체제가 붕괴되면서 양 지역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지리적, 정치적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다. 이란은 시아파 지역을 중심으로 이라크에 개입함으로써 시리아, 레바논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중해 동안(東岸) 레반트 지역과의 관계가 밀접해진 것이다. 시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과 터키,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등 친미세력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고 경제적으로 미국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란과의 정치적, 경제적 연대는 불가피했다. 즉 양 사회 결속의 배경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아파 세계에 대한 강조는 외부세계의 관점이다. 즉 중동 석유의 대부분이 매장되어 있는 시아파 지대, 즉 사우디 유전지대에 있는 시아파 지역, 시아파가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이라크, 시아파의 중심국가 이란에 걸쳐있는 시아파 지대를 잃게 될 우려가 시아파에 대한 편집증의 객관적인 배경이다. 6)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은 레바논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레바논의 상황은 비종교적이고 반시리아 성향의 민간정부와 친이란 이슬람주의 단체 헤즈볼라가 주도하는 종족적, 종교적 반대파간의 대결이 아니다.7) 반대파에는 미국에 종속된 현 정권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이 결집해 있다. 또한 헤즈볼라는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이란에 군사적, 재정적으로 크게 의존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레바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2006년 2차 레바논전쟁에서 이란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해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또는 종족적 요인만을 강조하는 까닭은 한편으로는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갈등구조가 외세 및 매판계급의 전략에 의해 실제로 종교적, 종족적 갈등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양상은 레바논 사태의 경제적, 사회적 차원에 대한 언론과 국제사회의 침묵에 기인한다. 실상 레바논 내전 종식 이후 진행되어 온 재건과정은 구 지배계급에만 유리한 것이었고 암살된 전직 수상 하리리(R. Hariri) 집권기 맺어진 외부와의 많은 계약은 경제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정위기를 초래하는 문제점을 남겼다. 현재 레바논은 부채가 적지 않고 심각한 실업문제와 빈곤화 현상을 겪고 있다. 또한 레바논 위기는 종족분쟁만으로 규정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표현이다. 특히 정치사회는 민중과 급격히 단절되어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레바논의 주요 정치세력들은 레바논을 분열시킴으로써 이득을 얻는 외부세력에 더욱 의존함에 따라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 대한 레바논 사회 전체 차원의 논의는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4. 이란의 운명


  역사가 보여주듯이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급격한 변화를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20세기 ‘극단의 시대’를 지나 왔지만 지금도 20세기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요인들이 미래에 대한 예측을 어렵게 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복합적인 지정학적 측면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체제 변화에 대한 예측도 마찬가지다. 이란 체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진단은 줄곧 있어 왔다. 특히 1989년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호메이니의 사망 직후 특히 그러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란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첫째, 1990년대 이후의 지속적인 유가인상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상당부분 석유수입에 의존하는 ‘지대국가’(rentier state) 이란은 석유수입의 증대 덕에 이슬람체제의 지지기반인 종교재단, 상인, 수입업자의 기득권을 약화시킬 근본적인 경제 개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증대된 석유수입의 일부는 복지에 투자되어 민중의 저항을 억누르고 혁명적 상황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 다른 요인에는 정치의 제도화가 있다. 하타미 개혁정권이 민주주의 제도를 강화시켰고 이를 통해 정상적이고 비폭력적인 정치과정이 일반화되었다. 이 제도화 과정은 보수 이슬람주의자들이 정당으로 변신함으로써 더욱 용이해졌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제도권 정치 참여는 이들에게 종교와 정치의 상대적 분리의 경험이었다. 결과적으로 정치의 합리화는 이슬람체제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하타미 시대에 시작된 민주화 과정은 이제 보수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이들은 의회와 행정부를 최고지도자와 그 측근세력들의 의지를 수동적으로 비준하고 집행하는 기관으로 전락시키려 한다. 이란혁명은 정치적 격변을 가져왔지만 그에 버금가는 사회혁명을 낳지는 못했다. 특히 지배계급의 구성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에 따라 이란 혁명이 성립시킨 이슬람체제 내부에는 다양한 세력이 경합해왔다. 지금은 종교지도자 하메네이가 대표하는 보수 종교세력과 하타미가 대변했던 자유주의 세력에 이제 아흐마디네자드의 극보수 민족주의 세력이 경합하는 양상이다(2008.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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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ilippe Rekacewicz, \"En Asie, des projets de construction de voies d\'acheminement du p&eacute;trole et du gaz\", Le Monde diplomatique mai 2005.

2) Ramine Kamrane, Iran, l\'islamisme dans l\'impasse, Buchet Chartel, 2003: 110-113

3) ibid., pp.7-8

4) ibid. p.117.

5) Azadeh Kian-Thi&eacute;baut, La R&eacute;publique islamique d\'Iran, Editions Michalon, 2005: 9-10

6)  엄한진, “아프가니스탄 문제의 지정학적 차원”, 월간정세연구 2007년 8월호.

7) Le Quotidien d\'Oran, 14 mai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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