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세(군사와 전쟁) | 독일 공공부문 파업과 어용노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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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피델 카스트로 작성일08-03-31 00:00 조회1,468회 댓글0건본문
편집자 주] 이 글은 2008년 3월 10일 발표된 독일 사회주의평등당의 성명서 앞부분을 옮긴 것이다(WSWS. ORG에 등재됨). ‘사회주의평등당’은 제4 인터내셔널을 이루는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미국과 영국, 호주와 캐나다, 스리랑카, 독일 등에 있다. 글의 말미에는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지만, 평범한 내용이라 생략했다. 독일에서는 2월말과 3월초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크게 일어났다. 이 파업은 임금협상을 둘러싸고 고용주들을 압박하려는 ‘경고’ 파업이었는데 철도와 항공의 많은 부분이 멈춰서는 바람에 공공 수송이 곳곳에서 마비되었다. 이 파업들은 사민당과 좌파 당의 연립정부에 포문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노사 타협주의로 일관해온 관료화된 노조들(과 그 지도부)에 대해서도 암암리에 반대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체제에 오래 포섭되어온 독일 노동운동이 곧바로 ‘정치적 급진화’를 이뤄내기는 까마득한 일이지만, 공공부문 파업이 거세게 터져나온 것은 어쨌든 유럽 사회에 신자유주의 흐름에 맞서는 정치적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조짐으로 읽힌다.
독일에서는 최근1)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전국 파업과 베를린 운수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철도 노동자들의 산업 분쟁이 몇십 년만에 크게 폭발했다.
이는 단지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을 넘어서는 더 큰 내기다. 그들이 교통을 멈추게 하고 불편함을 초래했는데도 이번 파업은 대중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지지를 받았다.2) 누군가가 나서서 이러한 대대적인 사회적 예산삭감과 최하층에서 최상층에 이르는 부의 재분배에 맞서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처음에 산업적 분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현재는 사회체계에 맞서는 폭넓은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과거 15년에 걸쳐서 모든 공공분야 일자리의 3분의 1, 즉 총 2백2십만개가 사라졌다. 생산성은 계속해서 상승하고 총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데도 수입은 감소하고 있다. 공공부문을 공격하면서 고용주들은 끊임없이 노동비용을 떨어뜨리고 노동자들을 닦아세우는 "Bolkestein Directive"3) 통치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 국영기업들은 부분적으로 사유화되었고 사기업이나 준사기업에서의 분명히 더 낮은 임금과 악화된 노동조건들은 “사회적 덤핑”의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된다.
작년 여름 철도 노동자들이 사회적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지 않아도 저임이었던 그들의 임금이 2년만에 10%까지 가라앉았다. 그것은 BVG(베를린 운수회사)의 노동자들도4) 다르지 않았다. 2년전에 체결한 계약은 노동조건을 극적으로 악화시켰고 노동자들은 그들 임금의 12%까지 잃어야만 했다. 동시에 성탄절 보너스는 줄었고 휴일 임금은 사라졌다. 신입사원들은 기존 임금의 3분의 2보다도 적게 받으며, 고참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도 삭감 대상이다.
국영기업과 공공 행정부서에서의 이러한 삭감은 사기업 분야의 대량 해고의 파도와 맞물려 돌아간다. 지멘스는 7천개의 일자리를 해고하고 있으며, BMW5)는 8천개의 일자리를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노키아는 보쿰에 있는 공장을 폐쇄하고 루마니아로 생산을 옮기고 있으며, 독일 텔레콤은 5만명의 직원을 더 낮은 임금과 악화된 노동조건을 감수하는 저임금 자택 근무직원으로 바꾸었다. 거의 매일 새로운 일자리 감소와 복지 삭감이 발표되고 있다.
한편으로, 많은 회사들이 기록적인 수익을 발표하고 있으며 증권거래소는 희한한 형태로 부를 쌓아가고 있다. 포르쉐 사장인 비데킹 씨는 5천4백만 유로를 집으로 가져갔으며, 독일은행 사장 아커만 씨는 천3백만 유로를 주머니에 챙겼고, 도이체 반(독일 철도회사) CEO 하르무트 메도른 씨는 3백2십만 유로를 벌어들였다. 독일 DAX6) 주식시장에 등록된 회사들의 중역들의 수입은 2002년 이후로 62%나 올랐다. 그러나 그들보다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임금과 수입은 1992년 이후로 인플레이션에 따라 13% 떨어졌다.
부패한 경제 독재자들은 세금도 내기를 거부하고 온갖 사치를 다하며 사회를 약탈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모든 정당들은 그들의 과두정치에 휘둘리고 있다. 거대 기업의 기업세는 2007 개혁(?)으로 25%에서 15%로 줄었다. 수익에 대한 세금은 이자에서 나왔으며, 배당금은 44%에서 26%로 삭감되었다. 그래서 올해 정부 세입은 100억 유로 적자를 기록했다. 정부 관료들은 국고가 텅 비어있어 공공 서비스분야에서 임금을 인상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1974년과 1992년 파업의 교훈
지금의 파업운동은 사회적 황폐화 시절에 대한 역공의 시작이다. 그것이 성공하려면 비판적인 균형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그간 노조와 고용주들이 벌여온 “사회적 파트너십” 정책의 결과이다. 공공서비스 노조 ‘베르디’의 정력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임금과 조건이 현재의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고를 텅 비게 한 부자들의 (동냥아치에게 몇 푼 건네는 듯한) 세금 기부는 기독교 민주당과 자유민주당 하의 정부에서의 결과라기보다는 사실 1998-2005년 기간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 정부의 작품이다.
두개 거대 공공 서비스 파업은 수십년 전에 일어났었다.
1974년 경기침체의 한 가운데에서 베르디의 전신인 ÖTV 공공 서비스노조는 11%의 임금인상을 얻어냈다. 1971년 노동자들은 CDU/CSU에 의한 불신임 투표에 대항하여 빌리 브란트 정부를 수호했는데, 이듬해에 사회민주당(SPD)은 선거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어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민당에 대해 커다란 희망을 품고, 더 높은 임금과 개선된 생활조건을 요구했다. 1973년과 74년 겨울 천만 명의 노동자들은 이러저런 문제로 임금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브란트 수상은 두 자리 숫자 임금인상에 반대했으나 임금투쟁을 억누를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곧 같은 당의 헬무트 슈미트로 교체되었는데 슈미트는 임금투쟁을 격퇴하기 위해 노조 관료들에 의지했다. 슈미트는 노조 관료 15 명을 장관 차관으로 정부에 등용하였다. 슈미트 정부의 우편향 정책에 대한 환멸이 기독교민주당(CDU)에 길을 열어주었고 콜 정부가 이후 16년 동안(1982-1998) 권력을 유지했다.
1980년 중반 사회적 갈등이 다시 높아졌지만, 1989년 독일 통일은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승리에 기여를 하였고 콜 정부는 또 다시 10년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독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그리고 소련의 붕괴는 결국 모든 공식적인 선전에서 퍼뜨리는 자본주의와 “자유와 민주의 승리”일 뿐이었다. 사실 생산의 세계화와 운송/통신의 새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단일 국가 지향의 사회주의 정부는 쇠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동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사회개혁주의 정부의 근간도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사민당 정부의 급속한 우경화와 노조관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 현상이다.
독일에서 이는 1992년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공공서비스 파업 속에서 현실화되었다. 공공분야의 파업에는 도이체 반, 독일 우체국 그리고 심지어 경찰과 화이트칼라 DAG노조에 이르는 33만 명의 노동자들이 여러 날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민당 소속의 ÖTV 의장인 모니카 불프 마티즈는 부패한 타협에 합의하였다. 노조 지도부는 콜 정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위기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파업 투표에서 대다수의 노조원들은 협상 결과에 반대하였으나 그런데도 지도부는 계약에 서명했다. 2년후 모니카 불프 마티즈가 지역발전을 위한 유럽연합 위원으로 뽑혀 보상을 받게 되었다. 2001년 이후 그녀는38만 직원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물류회사 중 하나인 독일 Post World Net AG의 정책과 환경을 이끌고 있다.
사민당 녹색당 연정과 노조의 우경화
사민당과 녹색당이 1998년 콜 정부를 대신했을 때 그들은 독일 노조연맹의 지원에 의존했다. 2001년 공공분야 노조가 ‘베르디’로 통합되어 사민당-녹색당 연립정권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들은 사민당 슈뢰더 정부의 반사회적 정책에 맞서는 반대투쟁이 심각하게 커나가는 것을 통제하려고 Hartz VI7) 와 ‘2010복지’ 의제, 그리고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했다. 2005년 가을 ‘베르디’는 TvöD (공공분야협약)에 서명했는데, 이는 지역과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심각한 악화를 초래했다.
그해가 가기 전, 5만 명의 노동자가 독일 텔레콤이 자기들을 저임의 사내 회사로 내쫓는 데에 반대하였을 때, 베르디는 파업을 상징적인 저항 수준으로 멈추고, 그 조치에 합의했다. 노동자들은 주당 4 시간의 초과 근무를 받아들이도록 강제되었고, 임금은 하락했다.
상황은 ‘IG 금속’과, 다른 독일노동총동맹(DGB) 노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노조 관료들과 노동자 평의회 대표자들은 어디에서나 협약에 서명했고 임금과 수당을 삭감하였다. DGB 노조는 진정한 계약 카르텔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노동자들에게는 족쇄와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과거 몇 달간 철도노동자들이 경험하였던 것이다.
철도 노조(GDL)의 주요한 요구사항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독립적인 계약 협정”이다. 31% 임금 인상에 대한 ‘독립적인’ 요구는 철도노조(GDL)가 ‘트렌스넷’과8) 또 다른 열차 노조들을 포함하는 계약 협약체를 포기한 이후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과거에 이러한 조직은 심각한 임금 삭감과 사회적 조건의 해체에 동의했다.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개시하자마자 DGB의 지원을 받은 트렌스넷은 파업을 깨는 가장 비열한 행위자로 버젓이 나섰다. 경영진에게서 자금 지원을 받은 트렌스넷은 “어용(house) 노조”로 활동하며 사민당을 통해 정부와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다. 트렌스넷 회장 노베르트 한센(SPD)은 철도노조에 맞서 공격적인 정책을 지시하였고 도이체반 CEO 하르무트 메도른은 철도노조가 ‘독립’하는 것을 막는데 동의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DGB 계약 카르텔은 유지될 것이다.
경영상의 막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트렌스넷과 독일노동총동맹(DGB)9) 그리고 철도노동자들은 아직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끊임없는 복지 삭감에 맞서는 반역의 전조이고, 노동자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트렌스넷과 베르디, 그리고 다른 독일노동총동맹(DGB) 노조에서 탈퇴하고 철도노조에 합류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베르디는 자신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노조는 분명히 과거 며칠 간 파업의 숫자를 늘려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분노를 식히고 통제를 유지하려는 베르디에 대해 아무도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는 동안에 “4월까지 파업은 불법”이라고 노동자들을 회유했던 것이 알려졌다. 베르디 지도부는 파업의 동력인 운수노동자들과 베를린 운수회사(BVG)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능력을 떨어뜨리려고 무엇이든 할 것이다(200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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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3월 4-5일의 대규모 (경고)파업을 가리키는 말.
2) 가령 시민들 사이에 공항과 철도 마비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
3) 네덜란드 정치인 볼케슈타인이 제안한 유럽 내부시장 서비스 방략.
4) 이들은 2월초에도 39시간 파업을 벌였다.
5) 독일 뮌헨에 본사를 둔 자동차, 오토바이 제조회사.
6) 대형 우량주 주식시장.
7) 2002년 독일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 위원회’에서 추천한 개혁의제. 그 위원회 대표인 피터 하르츠의 이름을 딴 것으로, 독일정부의 ‘아젠다 2010’ 시리즈의 일부가 되었다.
8) 독일 노조연맹에 속한 8개 노조의 하나. 조합원 28만 명. 수송, 서비스, 네트워크 노동자를 포괄한다.
9) 독일노동총동맹이라 불리는 단체는 3개다.
⑴ ADGB(Allgemein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독일혁명이 독일사회민주당과 자유노동조합총동맹 우파(右派) 지도자들의 이탈로 분쇄된 1919년, 구(舊)자유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조직된 우파세력.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투적으로 임했고, 나치 정권의 출현으로 전면 붕괴.
⑵ DGB(Deutscher Gewerkschaftsbund):전후 분단된 서부독일에서 결성된 노동조합의 중앙조직이다. 현재 650만 근로자를 회원으로 가지고 있으며, 노사협조정책과 재군비 지지 노선.
⑶ FDGB(Frei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1946년 2월 동베를린에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창설의 지도에 의해 조직됨. 동독 붕괴와 함께 무너짐.
독일에서는 최근1)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전국 파업과 베를린 운수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철도 노동자들의 산업 분쟁이 몇십 년만에 크게 폭발했다.
이는 단지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을 넘어서는 더 큰 내기다. 그들이 교통을 멈추게 하고 불편함을 초래했는데도 이번 파업은 대중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지지를 받았다.2) 누군가가 나서서 이러한 대대적인 사회적 예산삭감과 최하층에서 최상층에 이르는 부의 재분배에 맞서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처음에 산업적 분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현재는 사회체계에 맞서는 폭넓은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과거 15년에 걸쳐서 모든 공공분야 일자리의 3분의 1, 즉 총 2백2십만개가 사라졌다. 생산성은 계속해서 상승하고 총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데도 수입은 감소하고 있다. 공공부문을 공격하면서 고용주들은 끊임없이 노동비용을 떨어뜨리고 노동자들을 닦아세우는 "Bolkestein Directive"3) 통치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 국영기업들은 부분적으로 사유화되었고 사기업이나 준사기업에서의 분명히 더 낮은 임금과 악화된 노동조건들은 “사회적 덤핑”의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된다.
작년 여름 철도 노동자들이 사회적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지 않아도 저임이었던 그들의 임금이 2년만에 10%까지 가라앉았다. 그것은 BVG(베를린 운수회사)의 노동자들도4) 다르지 않았다. 2년전에 체결한 계약은 노동조건을 극적으로 악화시켰고 노동자들은 그들 임금의 12%까지 잃어야만 했다. 동시에 성탄절 보너스는 줄었고 휴일 임금은 사라졌다. 신입사원들은 기존 임금의 3분의 2보다도 적게 받으며, 고참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도 삭감 대상이다.
국영기업과 공공 행정부서에서의 이러한 삭감은 사기업 분야의 대량 해고의 파도와 맞물려 돌아간다. 지멘스는 7천개의 일자리를 해고하고 있으며, BMW5)는 8천개의 일자리를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노키아는 보쿰에 있는 공장을 폐쇄하고 루마니아로 생산을 옮기고 있으며, 독일 텔레콤은 5만명의 직원을 더 낮은 임금과 악화된 노동조건을 감수하는 저임금 자택 근무직원으로 바꾸었다. 거의 매일 새로운 일자리 감소와 복지 삭감이 발표되고 있다.
한편으로, 많은 회사들이 기록적인 수익을 발표하고 있으며 증권거래소는 희한한 형태로 부를 쌓아가고 있다. 포르쉐 사장인 비데킹 씨는 5천4백만 유로를 집으로 가져갔으며, 독일은행 사장 아커만 씨는 천3백만 유로를 주머니에 챙겼고, 도이체 반(독일 철도회사) CEO 하르무트 메도른 씨는 3백2십만 유로를 벌어들였다. 독일 DAX6) 주식시장에 등록된 회사들의 중역들의 수입은 2002년 이후로 62%나 올랐다. 그러나 그들보다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임금과 수입은 1992년 이후로 인플레이션에 따라 13% 떨어졌다.
부패한 경제 독재자들은 세금도 내기를 거부하고 온갖 사치를 다하며 사회를 약탈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모든 정당들은 그들의 과두정치에 휘둘리고 있다. 거대 기업의 기업세는 2007 개혁(?)으로 25%에서 15%로 줄었다. 수익에 대한 세금은 이자에서 나왔으며, 배당금은 44%에서 26%로 삭감되었다. 그래서 올해 정부 세입은 100억 유로 적자를 기록했다. 정부 관료들은 국고가 텅 비어있어 공공 서비스분야에서 임금을 인상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1974년과 1992년 파업의 교훈
지금의 파업운동은 사회적 황폐화 시절에 대한 역공의 시작이다. 그것이 성공하려면 비판적인 균형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그간 노조와 고용주들이 벌여온 “사회적 파트너십” 정책의 결과이다. 공공서비스 노조 ‘베르디’의 정력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임금과 조건이 현재의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고를 텅 비게 한 부자들의 (동냥아치에게 몇 푼 건네는 듯한) 세금 기부는 기독교 민주당과 자유민주당 하의 정부에서의 결과라기보다는 사실 1998-2005년 기간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 정부의 작품이다.
두개 거대 공공 서비스 파업은 수십년 전에 일어났었다.
1974년 경기침체의 한 가운데에서 베르디의 전신인 ÖTV 공공 서비스노조는 11%의 임금인상을 얻어냈다. 1971년 노동자들은 CDU/CSU에 의한 불신임 투표에 대항하여 빌리 브란트 정부를 수호했는데, 이듬해에 사회민주당(SPD)은 선거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어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민당에 대해 커다란 희망을 품고, 더 높은 임금과 개선된 생활조건을 요구했다. 1973년과 74년 겨울 천만 명의 노동자들은 이러저런 문제로 임금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브란트 수상은 두 자리 숫자 임금인상에 반대했으나 임금투쟁을 억누를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곧 같은 당의 헬무트 슈미트로 교체되었는데 슈미트는 임금투쟁을 격퇴하기 위해 노조 관료들에 의지했다. 슈미트는 노조 관료 15 명을 장관 차관으로 정부에 등용하였다. 슈미트 정부의 우편향 정책에 대한 환멸이 기독교민주당(CDU)에 길을 열어주었고 콜 정부가 이후 16년 동안(1982-1998) 권력을 유지했다.
1980년 중반 사회적 갈등이 다시 높아졌지만, 1989년 독일 통일은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승리에 기여를 하였고 콜 정부는 또 다시 10년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독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그리고 소련의 붕괴는 결국 모든 공식적인 선전에서 퍼뜨리는 자본주의와 “자유와 민주의 승리”일 뿐이었다. 사실 생산의 세계화와 운송/통신의 새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단일 국가 지향의 사회주의 정부는 쇠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동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사회개혁주의 정부의 근간도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사민당 정부의 급속한 우경화와 노조관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 현상이다.
독일에서 이는 1992년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공공서비스 파업 속에서 현실화되었다. 공공분야의 파업에는 도이체 반, 독일 우체국 그리고 심지어 경찰과 화이트칼라 DAG노조에 이르는 33만 명의 노동자들이 여러 날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민당 소속의 ÖTV 의장인 모니카 불프 마티즈는 부패한 타협에 합의하였다. 노조 지도부는 콜 정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위기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파업 투표에서 대다수의 노조원들은 협상 결과에 반대하였으나 그런데도 지도부는 계약에 서명했다. 2년후 모니카 불프 마티즈가 지역발전을 위한 유럽연합 위원으로 뽑혀 보상을 받게 되었다. 2001년 이후 그녀는38만 직원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물류회사 중 하나인 독일 Post World Net AG의 정책과 환경을 이끌고 있다.
사민당 녹색당 연정과 노조의 우경화
사민당과 녹색당이 1998년 콜 정부를 대신했을 때 그들은 독일 노조연맹의 지원에 의존했다. 2001년 공공분야 노조가 ‘베르디’로 통합되어 사민당-녹색당 연립정권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들은 사민당 슈뢰더 정부의 반사회적 정책에 맞서는 반대투쟁이 심각하게 커나가는 것을 통제하려고 Hartz VI7) 와 ‘2010복지’ 의제, 그리고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했다. 2005년 가을 ‘베르디’는 TvöD (공공분야협약)에 서명했는데, 이는 지역과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심각한 악화를 초래했다.
그해가 가기 전, 5만 명의 노동자가 독일 텔레콤이 자기들을 저임의 사내 회사로 내쫓는 데에 반대하였을 때, 베르디는 파업을 상징적인 저항 수준으로 멈추고, 그 조치에 합의했다. 노동자들은 주당 4 시간의 초과 근무를 받아들이도록 강제되었고, 임금은 하락했다.
상황은 ‘IG 금속’과, 다른 독일노동총동맹(DGB) 노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노조 관료들과 노동자 평의회 대표자들은 어디에서나 협약에 서명했고 임금과 수당을 삭감하였다. DGB 노조는 진정한 계약 카르텔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노동자들에게는 족쇄와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과거 몇 달간 철도노동자들이 경험하였던 것이다.
철도 노조(GDL)의 주요한 요구사항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독립적인 계약 협정”이다. 31% 임금 인상에 대한 ‘독립적인’ 요구는 철도노조(GDL)가 ‘트렌스넷’과8) 또 다른 열차 노조들을 포함하는 계약 협약체를 포기한 이후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과거에 이러한 조직은 심각한 임금 삭감과 사회적 조건의 해체에 동의했다.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개시하자마자 DGB의 지원을 받은 트렌스넷은 파업을 깨는 가장 비열한 행위자로 버젓이 나섰다. 경영진에게서 자금 지원을 받은 트렌스넷은 “어용(house) 노조”로 활동하며 사민당을 통해 정부와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다. 트렌스넷 회장 노베르트 한센(SPD)은 철도노조에 맞서 공격적인 정책을 지시하였고 도이체반 CEO 하르무트 메도른은 철도노조가 ‘독립’하는 것을 막는데 동의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DGB 계약 카르텔은 유지될 것이다.
경영상의 막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트렌스넷과 독일노동총동맹(DGB)9) 그리고 철도노동자들은 아직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끊임없는 복지 삭감에 맞서는 반역의 전조이고, 노동자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트렌스넷과 베르디, 그리고 다른 독일노동총동맹(DGB) 노조에서 탈퇴하고 철도노조에 합류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베르디는 자신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노조는 분명히 과거 며칠 간 파업의 숫자를 늘려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분노를 식히고 통제를 유지하려는 베르디에 대해 아무도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는 동안에 “4월까지 파업은 불법”이라고 노동자들을 회유했던 것이 알려졌다. 베르디 지도부는 파업의 동력인 운수노동자들과 베를린 운수회사(BVG)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능력을 떨어뜨리려고 무엇이든 할 것이다(200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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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3월 4-5일의 대규모 (경고)파업을 가리키는 말.
2) 가령 시민들 사이에 공항과 철도 마비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
3) 네덜란드 정치인 볼케슈타인이 제안한 유럽 내부시장 서비스 방략.
4) 이들은 2월초에도 39시간 파업을 벌였다.
5) 독일 뮌헨에 본사를 둔 자동차, 오토바이 제조회사.
6) 대형 우량주 주식시장.
7) 2002년 독일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 위원회’에서 추천한 개혁의제. 그 위원회 대표인 피터 하르츠의 이름을 딴 것으로, 독일정부의 ‘아젠다 2010’ 시리즈의 일부가 되었다.
8) 독일 노조연맹에 속한 8개 노조의 하나. 조합원 28만 명. 수송, 서비스, 네트워크 노동자를 포괄한다.
9) 독일노동총동맹이라 불리는 단체는 3개다.
⑴ ADGB(Allgemein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독일혁명이 독일사회민주당과 자유노동조합총동맹 우파(右派) 지도자들의 이탈로 분쇄된 1919년, 구(舊)자유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조직된 우파세력.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투적으로 임했고, 나치 정권의 출현으로 전면 붕괴.
⑵ DGB(Deutscher Gewerkschaftsbund):전후 분단된 서부독일에서 결성된 노동조합의 중앙조직이다. 현재 650만 근로자를 회원으로 가지고 있으며, 노사협조정책과 재군비 지지 노선.
⑶ FDGB(Frei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1946년 2월 동베를린에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창설의 지도에 의해 조직됨. 동독 붕괴와 함께 무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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