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 연구소
정세와 투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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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세(각국의 계급투쟁과 국제정치) | 이탈리아 무지개 좌파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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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본 국철치바동력차 노조 작성일08-04-30 00:00 조회1,6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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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작년 5월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사회당과 그밖의 좌파 정당들이 패배한 데 뒤이어 최근 이탈리아 의회선거의 결과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기존의 이른바 ‘좌파’ 정당들이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또다른 증거를 보여주었다. 글쓴이가 참여하는 정치그룹이 21세기에 걸맞는 사회주의적 비전과 전략을 지녔는지는 (이 글만으로)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신자유주의 지배세력과 어정쩡하게 공조해온 기회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그의 비판만큼은 그릇되지 않다(wsws.org 4.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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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이탈리아 의회선거에서 “무지개 좌파”의 완패는 기회주의의 중요한 사례로서 정치학 교과서에 기록될 것이다. 4개 정당으로 구성된 무지개 선거동맹은 최근 2년 얻었던 선거지지의 4분의 3을 잃었다.
  2006년 선거에서 리폰다치오네 공산당(개혁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PdCI), 녹색당은 모두 4백만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올해 4월 14일 치러진 선거에서는 위의 정당들과 (전 좌파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민주좌파는 불과 110만 표를 얻었을 뿐이다. 의회에서 도무지 어떤 구실도 하기 어려운 표수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이탈리아 의회에서 공산주의 전통과 연결되는 어떤 정당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파시즘 몰락 이후 처음 맞는 사태다.
 최근 2년동안 (7인 7색) 무지개 좌파의 구성원들은 모든 면에서 대중의 이해(利害)와 맞섰던 로마노 프로디 정부의 적극적인 파트너였다. 프로디는 엄격한 긴축 계획에 따라 국가예산 적자를 GDP의 4.6%에서 1.9%로 감축했다. 그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금융써클에게서 갈채를 받았고, 그 반면 노동자계급은 실질임금 하락과 높아진 은퇴 연령으로 그 대가를 지불했다.
  대외정책에서 프로디는 이탈리아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으며, 레바논에 추가 파병했고, 군비 증가와 대중 저항을 무릅쓰고 비첸차 미군기지의 확장을 지지했다.
  프로디는 또한 기본적 민주권리들을 공격했다. 프로디 정부는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된 외국인들을 추방할 권한을 이탈리아 치안부대에 부여하는 법을 만들었다. 법 규정이 너무나 막연해서 치안부대가 임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무지개좌파는 이런 조치들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권좌에 복귀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고 둘러대면서 동조했다. 프로디 정부의 대다수 우파들은 정책을 지령했고, 이른바 ‘좌파’는 그들 자신의 지지자들을 후위에서 가격했다. Rifondazione(개혁공산당)의 의회대표 클라우디오 그라씨는 최근 “정부의 몰락을 막기 위해 좌파는 지지하지 않는 정책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이 무지개좌파를 대중적으로 거부한 것은 정부 요직을 얻은 대신, 줏대 없이 선거 공약을 폐기하는 그런 굴레 벗은 기회주의에 대한 대가이다. 2년전 리폰다치오네 대표에서 국가권력서열 3위, 하원의장 자리로 옮겨간 파우스토 베르티노티의 태도는 이 면에서 전형적이다.
 선거 패배에 따라 녹색당 대표에서 물러난 알폰소 페코라로는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는 프로디 정부에 참여한 대가를 크게 지불했다. 우리는 관료제도에 빠져들었고 유권자들이 이를 처벌했다.” 선거 출구 조사는 전에 무지개좌파에 투표한 유권자들의 거의 절반이 투표에 불참했다고 전한다. 투표자 수가 83%에서 80%로 하락한 것은 이들 때문이다. 예전에 무지개좌파를 지지한 사람의 40%는 발터 벨트로니의 민주당 지지로 옮아갔고, 5%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우익 정당으로 옮아갔다.
 무지개좌파 지지의 하락은 특히 노동자계급에게서 두드러진다. 이것은 토리노(투린)시 미라피오리 교외의 전통 좌파에게서 확인된다. 피아트 자동차공장의 노동자들은 이 교외에 주로 사는데 1996년 무지개 좌파에 참가한 정당들은 5865표를 얻었고, 2006년에 3657표, 올해는 1124표를 얻었다.  리폰다치오네의 반대파 그룹의 대변자 레오나르도 마셀라는 말한다. “최근 며칠 쏟아져 나온 보고서나 신문자료를 보자면 그들은 노동자들을 배반한 리폰다치오네 공산당과 그 지도자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를 처벌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정치적 공백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익은 무지개 좌파의 몰락에서 반사이익을 챙겨 견고한 다수로 출현한 반면, 무지개좌파의 몰락은 노동자와 젊은층 사이에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도 반영하고 있다. 이들 대중은 선거 때만 급진적인 연설과 장밋빛 약속을 늘어놓고는 곧 배반해버리는 사이비 좌파정당들을 지겹게 겪어 왔다. 그들은 현존하는 제도와 정당의 틀 내에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으며 기성 정치에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개입할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국제적 금융위기의 충격과 이탈리아 사회의 위기로부터 불가피하게 계급갈등이 출현함에 따라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탈리아의 지배 엘리트와 그 좌파적 부분은 그러한 전망에 관련되어 있다. 무솔리니 시대 이후 그들은 공산당((PCI)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통제해 왔다. 파시스트 독재자의 몰락 이후, 이탈리아의 부르주아지는 공산당의 도움을 얻음으로써만 자기들의 지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는 1944-1946년 기간에 정부에 입각했다. 그는 반파시즘 저항에 나선 레지스탕스의 무장해제에 책임이 있으며, 법무장관으로서 파시스트 독재가 저지른 범죄자들을 사면하는 데도 앞장섰다.
  냉전 동안 이탈리아공산당은 ‘반대파’로 구실할 수밖에 없었으나, 1960년대말 전투적 파업과 청년들의 저항 물결이 일어났을 때는 이 운동을 단호하게 반대했고 그 뒤로는 이른바 ‘역사적 타협’이라며 기독교민주당과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연정을 추진했다.
  오늘날 공산당 간부 출신들이 민주당의 핵심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미국의 민주당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사회주의 정치에 대해서는 허울조차 내세울 생각이 없다. 부르주아 정치와 ‘공산주의자’ 상징을 결합시키는, 공산당의 오래된 역할은 1991년 공산당에서 갈라져 나와 쁘띠부르주아 급진좌파들의 큰 부분을 흡수한 개혁공산당에 의해 계승되었다.
 
                파벌 투쟁

  선거 패배는 리폰다치오네의 미래에 대해 고통스런 토론을 불러왔다. 오랫동안 당을 주도했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이제 소수파가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유산과의 모든 연계를 끊고 무지개동맹으로부터 새 정당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지난 주말 그의 제안은 리폰다치오네의 전국정치위원회에서 표결에 붙여져 70표의 찬성, 98표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었다. 
  베르티노티는 이미 선거날 당직을 사임했고, 프랑코 지오르다노를 비롯해 당 간부들의 사임이 잇따랐다. 여름의 당대회까지 프로디 정부의 사회연대장관 파올로 페레로는 당의 임시지도부를 맡았다. 베르티노티에 맞선 반대파를 페레로가 이끈다는 사실은 그 정치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리폰다치오네 간부들 중에 프로디 정부에 장관으로 입각한 유일한 인물 페레로는 프로디 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민주당 기관지 ‘루니타(단결)’와의 인터뷰에서 페레로는 자기 당의 재앙스런 선거결과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어떤 책임도 없다고 강변한다. 오히려 그는 정부참여 전략은 온건 좌파(즉 좌파 민주당) 세력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고수하지 못했고, 노동조합들이 비효율적으로 자기들의 이익만을 방어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화살을 돌린다. 그의 ‘노조’ 비판은 사실상 노동자계급을 겨냥하는 말이다.
  리폰다치오네를 무지개 정당으로 해소하는 데 반대하여 백 명이 넘는 지식인들이 철학교수 도메니코 로수르도가 기초한 항의서에 서명했다. 이 그룹은 스탈린주의 이탈리아공산당의 전통을 되살리기를 원하는데 이 공산당은 과거에 이탈리아 지배계급을 거드는 데 톡톡히 구실해 왔다.
  항의서는 리폰다치오네와 이탈리아공산당(PdCI)간의 통일에 기초하여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강력하고 통일된 공산당을 재건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베테랑 스탈린주의자 아르만도 코수타가 이끄는 후자(이탈리아공산당)은 10년전 리폰다치오네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독일신문 ‘융게 벨트’와의 인터뷰에서 로수르도는 “세 개의 트로츠키주의자 그룹이 선거를 지지하고 표를 가로챘다”고 경악을 나타냈다. 로수르도는 자기 자신이 톨리아티의 전통을 잇는다고 자임하고 있다.
 
                      좌파 덮개

  오랫동안 리폰다치오네의 ‘좌파 덮개’로 구실해온 몇몇 그룹은 선거날에 앞서 이미 침몰하는 배를 떠나갔다. 그들 중에 ‘공산주의 노동자당((PCdL)'과 ’비판적 좌파(sinistra critica)‘는 선거에서 자기들 독자적인 입후보자를 냈다. 그들은 무지개 좌파가 얻은 표의 3분의 1인 40만 표를 얻었다.   
 비판적 좌파는 리비오 마이탄이 오랫동안 이끌었던 파블로이테(pabloite) 사무국 성원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그는 10년 동안 리폰다치오네 집행위원회의 한 성원이었고 2004년 사망하기까지 베르티노티의 측근 조언자로 구실해왔다. 이 흐름의 몇몇 성원들은 2006년에 리폰다차이네 티켓으로 선거에 당선되었고, 정부를 지지했다. 다만 작년 12월에 리폰다차이네 지도부와의 갈등이 깊어짐에 따라 독립된 조직으로 ‘비판적 좌파’를 구성한 것이다.
  그들과 같은 계열의 프랑스 조직인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LCR)처럼 비판적 좌파는 새 세대가 변혁적 흐름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는 정당의 건설에 열심이다. 그것은 리폰다치오네의 패배, 좌파 덮개로서 자신의 역할로부터 어떤 교훈도 끌어내기를 거부한다.
  비판적 좌파의 회의 안내책자에서 살바토레 칸나보는 자기만족적으로 선언했다. “한 사이클이 완결되었고, 하나의 실험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이 실험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리폰다치오네가 10년 이상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표했고, 2년전 정부에 들어갔을 때 반자본주의자의 역할을 중단했다고 말한다. 칸나보는 리콘다치오네를 위해 하원에 진출했고, 통합사무국의 주도 성원이다.

  2006년에 출발한 공산주의자노동자당(PCdL)도 믿기 어렵다. 그 지도자인 마르코 페란도는 조직의 대표를 역임했고, 2006년 갈라져 나오기 전까지 15년간 리폰다치오네의 성원이었다. 비판적 좌파와 마찬가지로 그도 리폰다치오네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공백을 메꾸는 데 급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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