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세(각국의 계급투쟁과 국제정치) | 사회주의 개헌을 앞둔 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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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훈 작성일07-11-30 00:00 조회1,99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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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개헌을 앞둔 베네수엘라
강남훈(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11월 12일 밤 12시. 베네주엘라 카라카스 공항에 내렸다. 지난 8월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으로 바리오(카라카스 빈민가)의 불빛이 따뜻하게 비쳐든다. 차베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줄 수 있는 비결은 석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베네수엘라 혁명을 낮추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물은 근본에서 봐야 한다. 석유가 없었던 시절에는 바리오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석유가 나서 달러가 들어오자 환율이 떨어져서(화폐 가치가 높아져서) 국내 농산물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졌다. 더 이상 농사로 먹고 살 수 없게 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국유 산림에 무허가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바리오가 형성되었다. 그러니까 저 달동네 바리오는 석유 때문에 생긴 것이고, 석유는 신의 축복이 아니라 악마의 저주였던 셈이다. 지금의 베네수엘라 혁명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숙소에 도착해서 TV를 틀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시위 모습과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주장이 함께 흘러나온다.(스페인어를 공부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화면의 모습을 보면 찬성인지 반대인지 짐작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12월 2일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친다. 헌법 개정안의 핵심은 베네수엘라의 정치와 경제를 사회주의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겠다니 우익들이 가만히 앉아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갖은 수를 다 써서 헌법 개정을 막으려 들 것이 분명하다.
다른 각도에서, 베네수엘라에 언론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는 점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다음 날 들은 이야기에서도 확인하였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편파적인 보도를 하는 텔레비전 방송이 멀쩡하게 살아서 활개치고 있는 셈이었다.
다음 날 거리로 나서보니 사람들은 의외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복잡하고 분주하고 진행되고 있었다. 고작해야 하루에 한두 번 붉은 옷을 입은 시위대의 행렬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시내 거리의 담벼락 곳곳에는 "Si, Vota Si(yes라는 뜻으로 헌법 개정안에 대하여 찬성을 하라는 메시지)"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몇 차례의 헌법 개정 반대 집회가 있었지만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현재의 헌법 개정 반대 집회는 대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는 찬성 집회와 반대 집회가 충돌하였는데, 우익 쪽에서 먼저 총을 발사하고 좌익 쪽에서 이에 대한 응사를 하여 3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중앙대학이 서울대학 같은 대학인데, 절반 정도가 우익이고 절반 정도가 좌익이어서 그 대학에서 가장 격렬하게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카톨릭이 헌법 개정에 앞장서고 있는데, 카톨릭 계통 대학들이 가장 심하게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한국에 돌아와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지난 번 갔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중앙대학은 우익이 많고 좌익은 얼마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 동안 좌익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우익들이 차베스를 반대하는 논리에는 몇 가지 전형들이 있었다. 차베스가 집권했을 때 석유 값이 30불이었다가 지금 100불이 되었는데도 경제가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다. 석유 값이 비싼데도 시장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다. 시장 원리를 무시한 가격 통제로 우유 같은 일부 제품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석유 달러로 매수하여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헌법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무식한 빈민들을 개정 운동에 앞장세우고 있다.
‘경제가 좋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흔히 자기들의 자본 파업으로 우리나라의 IMF 위기와 맞먹을 정도의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겪었는데, 그것이 차베스 때문인 것처럼 둘러댄다. 실업률, 빈곤률, 국민소득 증가율, 물가 상승률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매우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다만 시장 환율이 높아진 것이 문제인데, 이 문제의 해결은 생필품 가격 안정을 위하여 이중환율 제도를 유지해 온 베네수엘라로서는 간단하지 않은 경제 개혁 과제 중의 하나이다. 우유의 부족은 시장원리를 무시한 가격 통제 때문이 아니라, 시장 원리를 계획 원리로 대체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석유 달러를 독차지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오의 빈민들을 새로운 사회 건설의 주체로 세우는 것은 바로 참여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이다.
헌법 개정의 핵심은 사회주의 정치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치는 주민 평의회를 핵심으로 하여 꼬뮌과 자치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꼬뮌은 몇 개의 주민평의회가 합쳐져서 구성되는데, 상당한 정도의 행정, 입법, 재정 권한을 갖는 자치 단위, 즉 ‘정부 속의 정부’를 의미한다. 경제의 핵심은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정치를 더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헌법 개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떠나서라도 장관부터 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었다. 이번에 헌법이 통과되면 베네수엘라는 사회주의를 향해서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활동가들은 오전에는 카톨릭 대학에 가서 개헌 찬성 집회를 하고, 오후에는 바리오에 가서 주민들에게 전단을 돌리고, 저녁에는 민중학교에서 활동가들을 교육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생애 최고의 날을 맞은 듯 활기가 넘쳤다.
이번 방문의 기본 목적은 국제 학술대회 참석이었다. 이 학술대회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정치경제와 비판적 사고" 라는 이름의 학회와 "정치경제"라는 이름의 학회가 함께 주최한 것으로서 그 주제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는 사회운동 세션에서 노동자 교육의 사례로서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을 소개하였다. 학회 개막식 때 과학기술부 나바로 장관이 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베네수엘라가 말하는 21세기 사회주의란 과거의 사회주의와 목표는 동일하지만 건설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장관부터 일선 활동가들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었다.
현재 여론 조사를 해 보면 65% 정도의 국민들이 헌법 개정에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헌법 개정이 실시되기만 하면 통과될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익들이 총을 발사하고, 학교를 불태우는 등의 투표 진행 자체를 방해하려는 공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일상생활은 평온한 채로 계속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안정적으로 정치적, 이념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헌법 개정에 성공하면 부르주아 헌법을 국민투표에 의해서 사회주의 헌법으로 바꾼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된다. 1970년 칠레의 아옌데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대통령이 당선되어 토지개혁 등에 착수하였지만, 미국이 획책한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3년 뒤에 목숨을 잃었다. 그도 헌법을 개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차베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쿠데타를 이겨냈고, 이제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앞두고 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스페인어 문법책을 펼치니 머리에 더 잘 들어왔다. 베네주엘라가 내 마음 속에 더 깊이 자리 잡았는가 보다(2007.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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