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FTA 저지싸움,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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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규화 작성일07-07-31 00:00 조회1,578회 댓글0건본문
FTA저지 싸움, 멈출 수 없다
- 무모한 실천의 기록
김규화(KT노동자)
전주천변에서 FTA 영상물을 틀다
스크린이 꺼지자 경찰차가 돌아갔다. 어떤 주민이 ‘시끄럽다’고 신고를 했다는데 우리가 영상물을 보여주는 곳은 서울의 한강변처럼 사람들이 운동하러 다니는 곳이고 아파트에서 멀다. 어쨌든 음향을 줄였어도 이것저것 조사한 경찰차는 돌아가지 않았다. ‘수고한다’고 인사하거나 ‘매일 오냐’고 묻는 사람, 발걸음을 멈추고 영상을 바라보는 사람...가지각색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꽤 알은체를 한다. ‘어디 주최냐, 도민운동본부냐 당이냐?’ ‘우리도 상영하고 싶은데 구할 수 없냐’ ‘조끼라도 같이 맞춰 입지 그러냐’ 등등... 누가 우리더러 그랬다. ‘무모한 사람들’이라고.
짦은 회고담
지난 11월 22일 전주에서 열린 FTA반대 투쟁 집회에 모인 사람 규모에 참가자들이 다들 놀랐다. 2만 5천 대오가 족히 되는데 전북 집회에 이렇게 많이 모여 본적이 없었단다.
그러나 민중의 이러한 열망과는 달리 지도부의 전술은 첫 단추부터 삐그러졌다. 집회 장소부터가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청 타격’ 간답시고 그 많은 시위 대오를 먼 길 걸어서 전주시 외곽으로 빼버린 꼴이 되었다.
정작 도청을 지키는 경찰 대오는 2-3백뿐이었다. “오매, 저것들이 우리를 우습게 알아도 한참 깔봤네잉. 오늘 도청 접수는 시간문제고만. 우리 숫자가 몇 배여? 비록 늙었지만... 아니면 사전에 혹시?” 별 수상한 생각이 다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위대오는 우왕좌왕. 황산벌도 아닌 허허 벌판 도청 건물 하나 두고 뭐 하자는 것인지, 먼길 걸어온 농민 어르신들은 땡볕 아래서 기나긴 연설을 줄창 듣노라니 피곤하고 배고프다며 삼삼오오 모여서 막걸리를 나누었다. 문득 바라보니 개천 건너 민가에서 화사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도청 현관에 들어가잔다. “그래, 도청에 왔으니 도청 구경을 해야지.” 우리 몇 명은 구경꾼들을 뒤에 둔 채 열심히 전경들을 밀어내어 현관 진입을 시도하였고 일부는 현관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였다.
봉고차에 올라서서 진입 지휘하는 사람의 말을 도대체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들어가라’ 해서 들어갔더니 다시 ‘나오라’는 것이다. 들어가면 앉아야지 왜 나오랄까. 그러다 끝났다. 어떤 눈치 없는 전경 놈이 뿌린 소화기 분말 가루를 좀 맞고, 민주 시민답게 불상사를 피하여 평화적으로. 개천 건너 전주시는 여전히 환한 불빛 속에 평안하고, 오가는 차량 소리만 쉼없이 들렸다. 수고하셨다고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또 만나자고 인사하는 운동본부 사람 마이크 발언에, 밤새 솜 비벼 횃불 만들어 왔는디 불 한번 못 댕겨 봤다고 허망해하는 농민회 간부, ‘내 다시 오나 보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촌로.
그 후 FTA반대 투쟁의 기조가 야릇해져 보였다. 협상이 벌어질 때마다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로 관광버스 타고 올라가 연설 듣고 내려오기를 몇 차례. 다녀오고 나면 한동안은 또 잠잠. 점점 협상을 수긍하는 분위기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협상이 몇 군데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지 쇄국 정책을 할 수는 없지 않냐?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협상 타결 전제하에 몇몇 안을 수정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시위대도 점점 줄었고 전주는 20명 남짓이 밤에 모여 촛불만 들었다 놨다 하며 기운을 빼고 있었다. 한미 FTA를 반대한다면서 기실은 체결 날짜만 기다리는 형국이 답답했다. 그러다가 허세욱 동지가 분신했다! 그런데 제 목숨을 던진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고작 밤마다 모여 또 조용하게 촛불을 드는 일이다. 운동의 지도부는 자신을 정말 부끄러워했는가? 선명하게 부르짖던 활동가들은 다 어디 갔는가. 왜 가장 가난하고 고단한 택시 운전사가 제 몸을 불살랐는지 돌아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허세욱 동지 건강회복 기원을 위해 전북 집중집회가 있던 4월 7일 밤. 백명 남짓 밖에 모이지 않았다. 경찰이 유독 전북만 집회를 허가했다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며 어떤 농민분이 한탄한다. 유서에 나를 위해 돈 걷지 말라고 했건만 어설픈 몇 개의 연설이 끝나고 대형 스크린에 그의 일대기 영상이 비춰지는 동안 젊은이들이 ‘병원비가 많이 든다’며 돈 통을 들고 다녔다. 동지라는 용어가 가장 좋다고 유언장에도 썼건만 허세욱님이라고 불렀다. 멀쩡한 큰길을 다 놔두고 상가 골목으로만 행진하는 40 대오의 가운데에서 나는 희망을 잃었다.
무엇인가 해보기로 했다. 단 한명이라도 좋다. 이런 수세적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지역부터 계급적 연대로 나서자는 제안서를 ‘혁명이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촌로에게 제일 먼저 드렸다. 글씨가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며 잘 접어 호주머니에 넣어 가신다. 그날 밤 오십여 장의 선전물이 다 동이 났다.
장례식이 열린 용산 미군기지 앞은 썰렁했다. ‘많이 모였을까?’ 반신반의하고 올라 왔다가 ‘역시나’ 허망했다. 전주에서 올라간 대오도 당 상근자 수준이었지만 다 합친 숫자도 천 명을 밑돌았다. 서울 시청 광장도 썰렁하긴 마찬가지. 용산보다야 숫자가 늘었지만 집회에 팽팽한 느낌이 없었다. 연설을 듣다 말고 전주로 돌아와 버렸다. 이제 서울 집중 투쟁은 합류하지 않으리라.
분노, 그러나 조직은 없었다.
활동가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함께 하자’는 제안서를 내밀었다. 호응이 좋았다. “그래, FTA 투쟁 쉬지 말고 해야 돼.” 그러나 누구랑 하느냐 무슨 단체랑 하느냐란 질문도 빼놓지 않았다. 7-8명이 모여서 첫 모임을 열었다. 사람 숫자가 적으면 적은 대로, 큰 단체에 기대지 말고 우리끼리 FTA를 알려 내기로 했다. “24시간 교대해줄 두 사람만 확보되면 ‘거점’을 잡아 천막을 치고 아침 선전전을 꾸준히 벌이자. 이따금 시기에 맞는 알맞은 전술을 펴되, 강도 높은 싸움으로 가자.” 그러다 보면 활동가들이 모여들리라. 어떤 투쟁이든 당사자들이 열심히 해야 연대체가 붙지 않는가. 적은 숫자로 출발한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일단 활동가용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막상 거점을 마련하려니 한 사람이 문제였다. 천막을 칠 한 사람은 있는데 그 한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천막을 치지 못한다 해도 우린 멈출 수 없었다. 큰 조직과 명망가들이 나서야 할 거대한 투쟁이 있는가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투쟁이 있다. 대규모 집회만 투쟁은 아니다.
작은 실천, 더디 가더라도 나아간다
사람들은 막연히 FTA가 나쁘다고는 생각해도 내 인생과는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설마 다 나쁘기야 하겠느냐 하고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광우병 쇠고기나 스크린 쿼터는 알고 있으나 수출이나 산업은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무현 정부가 중산층에게는 FTA로 분홍빛 청사진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대학교수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 반응을 듣고 1차 대중선전물을 4천부 인쇄하였다. 국익과 협상의 문제를 떠나 우리 삶에 밀접한 것들을 골라 시리즈로 만들기로 했다. 어떻게 배포하나? 형식적인 배포 선전전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돈으로 만들었는데 읽지 않고 버린다면 너무 아까웠다. 가방을 들고 다니다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배포했다. 고속터미널에서 배포했더니 효과 만점이라는 말을 듣고 토요일 오후에 집중해 배포했다. 사람들은 쉽게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전물 배포만으로는 왠지 허전했다. 색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 시작한 것이 ‘거리 영상 상영’이다. 자체 발전기를 준비하고 고물 노트북을 구해서 스크린을 설치하자!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 스크린이 좀 좋은가.
일단 해보는 것이다. 첫날. 행인들이 오가며 흘긋흘긋 쳐다본다. 세 사람은 끝까지 보고 갔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상영했는데 거리 상영과 우리가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바람에 넘어지려는 스크린을 끝날 때까지 동지들이 붙들고 있었다. 민주노총 교육자료 6월 대투쟁 동영상은 화면의 속도가 빨라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금속노조 파업과 최저 임금 싸움, 7.1일자 비정규직법 시행에 관련한 영상을 자주 틀어주었다. 아쉬운 대목은 비정규직 관련 영상에 청소, 경비 또는 연로하신 분들이 많이 나와서 비정규직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 아니냐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빔 프로젝트를 빌려 가는 바람에, 또 비가 오락가락하여 ‘월, 수, 금’을 제대로 다 채우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분회에서 앞으로 계속 함께 하겠다는 반가운 연락도 왔다. 우리 영상을 편집해 주겠다고 자청해 나선 분도 있다. 2차 선전물도 편집 중이다. 1차 선전물은 ‘글이 너무 많았다’는 의견이 많아서 2차는 ‘만화 중심’으로, 쉽게 읽고 버리는 선전물로 만들려고 한다. 왕대포라는 밴드와 함께 FTA반대 문화제도 기획해볼 참이다.
우리의 이 작은 실천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이 적다’고, 형편이 어렵다고 이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더디 가더라도 아무튼 앞으로 가겠지. (2007. 7. 16).
- 무모한 실천의 기록
김규화(KT노동자)
전주천변에서 FTA 영상물을 틀다
스크린이 꺼지자 경찰차가 돌아갔다. 어떤 주민이 ‘시끄럽다’고 신고를 했다는데 우리가 영상물을 보여주는 곳은 서울의 한강변처럼 사람들이 운동하러 다니는 곳이고 아파트에서 멀다. 어쨌든 음향을 줄였어도 이것저것 조사한 경찰차는 돌아가지 않았다. ‘수고한다’고 인사하거나 ‘매일 오냐’고 묻는 사람, 발걸음을 멈추고 영상을 바라보는 사람...가지각색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꽤 알은체를 한다. ‘어디 주최냐, 도민운동본부냐 당이냐?’ ‘우리도 상영하고 싶은데 구할 수 없냐’ ‘조끼라도 같이 맞춰 입지 그러냐’ 등등... 누가 우리더러 그랬다. ‘무모한 사람들’이라고.
짦은 회고담
지난 11월 22일 전주에서 열린 FTA반대 투쟁 집회에 모인 사람 규모에 참가자들이 다들 놀랐다. 2만 5천 대오가 족히 되는데 전북 집회에 이렇게 많이 모여 본적이 없었단다.
그러나 민중의 이러한 열망과는 달리 지도부의 전술은 첫 단추부터 삐그러졌다. 집회 장소부터가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청 타격’ 간답시고 그 많은 시위 대오를 먼 길 걸어서 전주시 외곽으로 빼버린 꼴이 되었다.
정작 도청을 지키는 경찰 대오는 2-3백뿐이었다. “오매, 저것들이 우리를 우습게 알아도 한참 깔봤네잉. 오늘 도청 접수는 시간문제고만. 우리 숫자가 몇 배여? 비록 늙었지만... 아니면 사전에 혹시?” 별 수상한 생각이 다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위대오는 우왕좌왕. 황산벌도 아닌 허허 벌판 도청 건물 하나 두고 뭐 하자는 것인지, 먼길 걸어온 농민 어르신들은 땡볕 아래서 기나긴 연설을 줄창 듣노라니 피곤하고 배고프다며 삼삼오오 모여서 막걸리를 나누었다. 문득 바라보니 개천 건너 민가에서 화사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도청 현관에 들어가잔다. “그래, 도청에 왔으니 도청 구경을 해야지.” 우리 몇 명은 구경꾼들을 뒤에 둔 채 열심히 전경들을 밀어내어 현관 진입을 시도하였고 일부는 현관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였다.
봉고차에 올라서서 진입 지휘하는 사람의 말을 도대체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들어가라’ 해서 들어갔더니 다시 ‘나오라’는 것이다. 들어가면 앉아야지 왜 나오랄까. 그러다 끝났다. 어떤 눈치 없는 전경 놈이 뿌린 소화기 분말 가루를 좀 맞고, 민주 시민답게 불상사를 피하여 평화적으로. 개천 건너 전주시는 여전히 환한 불빛 속에 평안하고, 오가는 차량 소리만 쉼없이 들렸다. 수고하셨다고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또 만나자고 인사하는 운동본부 사람 마이크 발언에, 밤새 솜 비벼 횃불 만들어 왔는디 불 한번 못 댕겨 봤다고 허망해하는 농민회 간부, ‘내 다시 오나 보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촌로.
그 후 FTA반대 투쟁의 기조가 야릇해져 보였다. 협상이 벌어질 때마다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로 관광버스 타고 올라가 연설 듣고 내려오기를 몇 차례. 다녀오고 나면 한동안은 또 잠잠. 점점 협상을 수긍하는 분위기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협상이 몇 군데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지 쇄국 정책을 할 수는 없지 않냐?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협상 타결 전제하에 몇몇 안을 수정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시위대도 점점 줄었고 전주는 20명 남짓이 밤에 모여 촛불만 들었다 놨다 하며 기운을 빼고 있었다. 한미 FTA를 반대한다면서 기실은 체결 날짜만 기다리는 형국이 답답했다. 그러다가 허세욱 동지가 분신했다! 그런데 제 목숨을 던진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고작 밤마다 모여 또 조용하게 촛불을 드는 일이다. 운동의 지도부는 자신을 정말 부끄러워했는가? 선명하게 부르짖던 활동가들은 다 어디 갔는가. 왜 가장 가난하고 고단한 택시 운전사가 제 몸을 불살랐는지 돌아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허세욱 동지 건강회복 기원을 위해 전북 집중집회가 있던 4월 7일 밤. 백명 남짓 밖에 모이지 않았다. 경찰이 유독 전북만 집회를 허가했다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며 어떤 농민분이 한탄한다. 유서에 나를 위해 돈 걷지 말라고 했건만 어설픈 몇 개의 연설이 끝나고 대형 스크린에 그의 일대기 영상이 비춰지는 동안 젊은이들이 ‘병원비가 많이 든다’며 돈 통을 들고 다녔다. 동지라는 용어가 가장 좋다고 유언장에도 썼건만 허세욱님이라고 불렀다. 멀쩡한 큰길을 다 놔두고 상가 골목으로만 행진하는 40 대오의 가운데에서 나는 희망을 잃었다.
무엇인가 해보기로 했다. 단 한명이라도 좋다. 이런 수세적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지역부터 계급적 연대로 나서자는 제안서를 ‘혁명이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촌로에게 제일 먼저 드렸다. 글씨가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며 잘 접어 호주머니에 넣어 가신다. 그날 밤 오십여 장의 선전물이 다 동이 났다.
장례식이 열린 용산 미군기지 앞은 썰렁했다. ‘많이 모였을까?’ 반신반의하고 올라 왔다가 ‘역시나’ 허망했다. 전주에서 올라간 대오도 당 상근자 수준이었지만 다 합친 숫자도 천 명을 밑돌았다. 서울 시청 광장도 썰렁하긴 마찬가지. 용산보다야 숫자가 늘었지만 집회에 팽팽한 느낌이 없었다. 연설을 듣다 말고 전주로 돌아와 버렸다. 이제 서울 집중 투쟁은 합류하지 않으리라.
분노, 그러나 조직은 없었다.
활동가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함께 하자’는 제안서를 내밀었다. 호응이 좋았다. “그래, FTA 투쟁 쉬지 말고 해야 돼.” 그러나 누구랑 하느냐 무슨 단체랑 하느냐란 질문도 빼놓지 않았다. 7-8명이 모여서 첫 모임을 열었다. 사람 숫자가 적으면 적은 대로, 큰 단체에 기대지 말고 우리끼리 FTA를 알려 내기로 했다. “24시간 교대해줄 두 사람만 확보되면 ‘거점’을 잡아 천막을 치고 아침 선전전을 꾸준히 벌이자. 이따금 시기에 맞는 알맞은 전술을 펴되, 강도 높은 싸움으로 가자.” 그러다 보면 활동가들이 모여들리라. 어떤 투쟁이든 당사자들이 열심히 해야 연대체가 붙지 않는가. 적은 숫자로 출발한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일단 활동가용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막상 거점을 마련하려니 한 사람이 문제였다. 천막을 칠 한 사람은 있는데 그 한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천막을 치지 못한다 해도 우린 멈출 수 없었다. 큰 조직과 명망가들이 나서야 할 거대한 투쟁이 있는가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투쟁이 있다. 대규모 집회만 투쟁은 아니다.
작은 실천, 더디 가더라도 나아간다
사람들은 막연히 FTA가 나쁘다고는 생각해도 내 인생과는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설마 다 나쁘기야 하겠느냐 하고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광우병 쇠고기나 스크린 쿼터는 알고 있으나 수출이나 산업은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무현 정부가 중산층에게는 FTA로 분홍빛 청사진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대학교수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 반응을 듣고 1차 대중선전물을 4천부 인쇄하였다. 국익과 협상의 문제를 떠나 우리 삶에 밀접한 것들을 골라 시리즈로 만들기로 했다. 어떻게 배포하나? 형식적인 배포 선전전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돈으로 만들었는데 읽지 않고 버린다면 너무 아까웠다. 가방을 들고 다니다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배포했다. 고속터미널에서 배포했더니 효과 만점이라는 말을 듣고 토요일 오후에 집중해 배포했다. 사람들은 쉽게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전물 배포만으로는 왠지 허전했다. 색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 시작한 것이 ‘거리 영상 상영’이다. 자체 발전기를 준비하고 고물 노트북을 구해서 스크린을 설치하자!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 스크린이 좀 좋은가.
일단 해보는 것이다. 첫날. 행인들이 오가며 흘긋흘긋 쳐다본다. 세 사람은 끝까지 보고 갔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상영했는데 거리 상영과 우리가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바람에 넘어지려는 스크린을 끝날 때까지 동지들이 붙들고 있었다. 민주노총 교육자료 6월 대투쟁 동영상은 화면의 속도가 빨라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금속노조 파업과 최저 임금 싸움, 7.1일자 비정규직법 시행에 관련한 영상을 자주 틀어주었다. 아쉬운 대목은 비정규직 관련 영상에 청소, 경비 또는 연로하신 분들이 많이 나와서 비정규직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 아니냐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빔 프로젝트를 빌려 가는 바람에, 또 비가 오락가락하여 ‘월, 수, 금’을 제대로 다 채우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분회에서 앞으로 계속 함께 하겠다는 반가운 연락도 왔다. 우리 영상을 편집해 주겠다고 자청해 나선 분도 있다. 2차 선전물도 편집 중이다. 1차 선전물은 ‘글이 너무 많았다’는 의견이 많아서 2차는 ‘만화 중심’으로, 쉽게 읽고 버리는 선전물로 만들려고 한다. 왕대포라는 밴드와 함께 FTA반대 문화제도 기획해볼 참이다.
우리의 이 작은 실천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이 적다’고, 형편이 어렵다고 이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더디 가더라도 아무튼 앞으로 가겠지. (2007.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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