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주간논평> ‘반미’ 구호, 따라 외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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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순 작성일-1-11-30 00:00 조회1,550회 댓글0건본문
언제부터인가 민주노총 집회에서 구호를 외칠 때 ‘후렴구’의 하나로 ‘반미 투쟁’이 선을 보였다. 께름칙한 느낌이 들면서도 다들 외치니 따라 부를 수밖에. 그러고는 잊어버렸는데 그러다 딴 사람에게서도 이 말을 듣고는 이마를 쳤다. 그려, 말 좀 해야 쓰것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라!
가벼이 들으면 가벼운 일이다. 이 투쟁도 하고, 저 싸움도 벌이자! 미국놈들, 우리에게 횡포 부리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에 작동하고 있는 ‘정치’를 우선 들춰내야 한다. “민족해방파가 특권화한 말을 딴 사람들도 따라 외쳐라! 민족해방파의 주도성을 다소곳이 수긍하라!” 게다가 ‘반미’의 과녁이 과연 현실의 핵심을 꿰뚫는 것인지도 미심쩍다.
“21세기에 민족주의 이념이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는 말은 거의 ‘상식’에 가깝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담론이 흔히 유통된다. “NL은 농경사회의 패러다임이고 PD는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사회는 ‘정보 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으니 이 변화를 좇지 못한다면 진보운동은 멸종할 위험이 높다.” 물론 이 도식은 너무 맹탕의 3 단계론이어서, ‘왜 낡은 패러다임들을 버려야 하는지’ 설명이 충분하지는 못하다. ‘정보사회’는 변화의 겉을 핥는 개념에 불과하고, ‘NL = 농경, PD = 산업’의 규정도 사실 ‘유추(아날로지)’일 뿐이다. 그러나 두 이론틀의 어떤 특징을 잡아낸 것은 분명하고, 두 개념을 고이고이 받들 까닭이 없음도 아울러 말해준다. 1987년 이후의 한 흐름이 바닥 모르게 가라앉고 있는데도 왜 일선 활동가들에게는 새로운 통찰이 더디게 찾아오는 것일까?
내 말은 ‘반미 투쟁’을 단칼에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민족주의를 신봉할 것은 없지만 민족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자칫 눈 앞의 자기 문제에만 갇히기 쉬운 노동자 민중이 이따금 민족적 과제를 내걸고 정치투쟁을 벌여온 것은 훌륭한 일이다. 거드는 손이 모자라서 안타깝지, 평택의 대추리 투쟁은 전 민중이 함께 해야 했다. 민족해방파에게는 민중민주파가 소홀히 여긴 과제를 열심으로 떠안은 공이 한때 있었다. 미국 지배자들이 한반도에서 준동하는 것을 그들의 반미 투쟁이 조금은 누그러뜨리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한국의 진보운동이 줄곧 ‘민족 대립’의 구도에 머물러서는 진보운동진영 바깥에서 예언하는 대로 ‘멸종’의 운명이 ‘따 놓은 당상(?)’이다! 가령 몇 해 전 시애틀의 반세계화 투쟁 때, 한국과 미국의 노동자들은 한때일망정 함께 싸웠다. 앞으로도 양국의 노동자들이 더불어 어깨 걸고 나아가야 할 터인데 ‘반미’의 옹색한 구호가 이를 가로막지 않겠는가?
‘반미’는 노동자들이 민족개량주의로 함몰하는 것을 은폐하는 알리바이로도 구실했다. “이른바 ‘민족 자본’은 미국과 맞서는 자본이므로 우리의 우군”이라는 속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았는가. 1990년대 초,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현대총수 정주영을 ‘통일의 역군’이라고 칭송했던 경망스런 작태는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기실 민중운동의 대부분이 오랜 세월 동안 김대중당, 노무현당의 ‘2중대’ 노릇에 만족한 데에도 ‘식민지 해방론’이 톡톡히 구실했었다. 숱한 NL들이 자신의 진취성을 살짝 묽히고 열린우리당에 들어가서 노동자계급을 때려잡는 신자유주의 굿판에 앞장을 섰던 것도 냉엄하게 비판할 일이다.
‘반미’는 너무나 옹색한 과녁이다. ‘반미’만 되뇌다 보면 북핵 사태에 더 험상궂게 쌍지팡이 짚고 나선 일본 군국주의, 시어미보다도 더 나대는 시누이에 대한 경계도 소홀해진다. 사실 따지고 보면 중국도 (예전에 베트남과 국경 분쟁을 벌였듯이) 아시아에서 나름의 패권을 휘두르려는 제국주의적 경향이 잠복해 있다. 북한이 중국에 정치·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반미 운동’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담아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남한 자본 자신이 아(亞)제국주의로 행세하여 제3세계 민중들을 착취하는 데 대한 성찰을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아시아로 진출한 남한의 악덕 자본들이 그 곳의 민중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례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남한의 국가기관은 네팔의 왕정을 유지하는 일을 은밀히 돕기도 했다. 근래 들어 보수언론의 지면에는 ‘우리도 자원확보 경쟁에 나서자’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실린다. 남한의 이라크 파병을 꼭 ‘미국이 시켜서’라고만 볼 일일까? 베이루트 평화유지군 파병은 자청해서 하려는 것 아닌가. 남한이 일본, 호주와 함께 NATO 회의에 참관 초청을 받은 것도 예사롭지 않다.
남한의 지배층이 세계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 구조, 정치 군사적 지배 기제에 동참하는 일을 정면으로 따져 살피지 않는 진보운동이라면 과연 그런 안일한 운동을 ‘진보’라 추어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한미FTA’도 아(亞)제국주의에 대한 통찰 없이는 깊이 비판할 수 없다. 한미FTA를 발판으로 하여 제 3세계에 진출하려 하는 남한 초국적 자본의 속셈과 우리 사회가 배출해낸 (아)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겸비될 때라야 한미FTA 저지투쟁의 설득력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운동의 과제를 ‘반미’로 좁히는 것이 “북한을 엄호하자”는 정치의 발로라는 것도 확인해 두자. 물론 우리는 그들을 엄호해야 한다. 그러나 더 넓은 전망 속에서 그 일도 벌여야 그 일이 엇나가지 않는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과 중국과 남한의 지배계급을 두루 엮을 때 만들어지는 운동의 과제는 ‘반제(反帝)’가 아니던가? 그래야 네팔과 필리핀, 중국과 일본과 미국의 노동자들과 본때 있게 ‘연대’할 수 있지 않은가? ‘반미’에서 ‘반제’로 과녁을 업그레이드할 때라야 우리의 운동은 드넓은 지평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한편으로 우리는 ‘반미’의 문제의식이 소홀한 쪽에 대한 비판도 게을리할 수 없다. 이른바 범좌파라는 ‘전진’의 기관지 최근호에 북핵 관련한 글이 실렸는데, ‘미국에게 책임이 있다’는 단언은 있으나 어떻게 미국을 추궁할 것인지 진지한 결의가 들어있지 않다. ‘반핵은 무조건적인 원칙’이라는 수상쩍은 이야기가 난무할 뿐(...세상에, ‘무조건’이라니!!!...), ‘반제’나 ‘반미’라는 낱말은 찾아볼 길이 없다. ‘미국과 대립하지 않겠다’는 방침이 은밀히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제국주의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사회개량주의의 안온한 틀 속에 머무르겠다는 뜻이 아닌가.
반세계화 또는 대안세계화 운동에 열심인 그룹도 눈길이 다소 비좁다. 일국적(一國的) 틀을 넘어 세계 현실을 ‘하나’로 파악하는 것은 옳으나,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추상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경제적 착취와 수탈의 현실만 주로 주목할 뿐, 미국을 맹주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횡포를 일삼는 정치군사적 지배의 현실을 깊이 숙고하지 않는다. ‘무장된 세계화’를 언급은 하고 있으나, ‘제국주의에 맞서라!’고 똑 부러지게 과녁을 제시하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생결단하겠다는 치열함이 부족한 탓일 게다. 담론은 아주 급진적이지만, 실천은 개량주의 구도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지금의 정세가 얼마나 엄중한지, 구태여 자세히 언급할 것도 없다. 민주화의 한 시대가 저물고, 한 시대의 사회운동이 역사적으로 패배했다. ‘제2의 박정희 시대’라 부름직한 신자유주의 파시즘이 도래할 위험이 아주 높다. 그렇다면 박정희 시대에 살았듯이 그렇게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우리의 운동을 추슬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은가?
한 쪽은 ‘민족’을 탐닉하고 다른 쪽은 ‘계급’을 희롱했다. ‘반미’에 얼마쯤의 진실이 들어 있지만 ‘반제’로 상승할 때라야 그 진실이 산다. ‘노동해방’도 ‘반제’를 치열하게 떠맡을 때라야 노동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추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힘차게 팔뚝질하며 외칠 말은 ‘반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반대!’도 안일한 외침에 불과하다.
드디어 비정규악법도 국회를 통과하고, 로드맵 통과가 곧 예고되어 있는데도 별다른 저항이 조직되지 못하는 시절.
노동자계급이 이렇게 무기력해질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시절에
그리하여 “껍데기는 가라!!” (2006. 12. 04)
가벼이 들으면 가벼운 일이다. 이 투쟁도 하고, 저 싸움도 벌이자! 미국놈들, 우리에게 횡포 부리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에 작동하고 있는 ‘정치’를 우선 들춰내야 한다. “민족해방파가 특권화한 말을 딴 사람들도 따라 외쳐라! 민족해방파의 주도성을 다소곳이 수긍하라!” 게다가 ‘반미’의 과녁이 과연 현실의 핵심을 꿰뚫는 것인지도 미심쩍다.
“21세기에 민족주의 이념이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는 말은 거의 ‘상식’에 가깝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담론이 흔히 유통된다. “NL은 농경사회의 패러다임이고 PD는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사회는 ‘정보 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으니 이 변화를 좇지 못한다면 진보운동은 멸종할 위험이 높다.” 물론 이 도식은 너무 맹탕의 3 단계론이어서, ‘왜 낡은 패러다임들을 버려야 하는지’ 설명이 충분하지는 못하다. ‘정보사회’는 변화의 겉을 핥는 개념에 불과하고, ‘NL = 농경, PD = 산업’의 규정도 사실 ‘유추(아날로지)’일 뿐이다. 그러나 두 이론틀의 어떤 특징을 잡아낸 것은 분명하고, 두 개념을 고이고이 받들 까닭이 없음도 아울러 말해준다. 1987년 이후의 한 흐름이 바닥 모르게 가라앉고 있는데도 왜 일선 활동가들에게는 새로운 통찰이 더디게 찾아오는 것일까?
내 말은 ‘반미 투쟁’을 단칼에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민족주의를 신봉할 것은 없지만 민족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자칫 눈 앞의 자기 문제에만 갇히기 쉬운 노동자 민중이 이따금 민족적 과제를 내걸고 정치투쟁을 벌여온 것은 훌륭한 일이다. 거드는 손이 모자라서 안타깝지, 평택의 대추리 투쟁은 전 민중이 함께 해야 했다. 민족해방파에게는 민중민주파가 소홀히 여긴 과제를 열심으로 떠안은 공이 한때 있었다. 미국 지배자들이 한반도에서 준동하는 것을 그들의 반미 투쟁이 조금은 누그러뜨리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한국의 진보운동이 줄곧 ‘민족 대립’의 구도에 머물러서는 진보운동진영 바깥에서 예언하는 대로 ‘멸종’의 운명이 ‘따 놓은 당상(?)’이다! 가령 몇 해 전 시애틀의 반세계화 투쟁 때, 한국과 미국의 노동자들은 한때일망정 함께 싸웠다. 앞으로도 양국의 노동자들이 더불어 어깨 걸고 나아가야 할 터인데 ‘반미’의 옹색한 구호가 이를 가로막지 않겠는가?
‘반미’는 노동자들이 민족개량주의로 함몰하는 것을 은폐하는 알리바이로도 구실했다. “이른바 ‘민족 자본’은 미국과 맞서는 자본이므로 우리의 우군”이라는 속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았는가. 1990년대 초,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현대총수 정주영을 ‘통일의 역군’이라고 칭송했던 경망스런 작태는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기실 민중운동의 대부분이 오랜 세월 동안 김대중당, 노무현당의 ‘2중대’ 노릇에 만족한 데에도 ‘식민지 해방론’이 톡톡히 구실했었다. 숱한 NL들이 자신의 진취성을 살짝 묽히고 열린우리당에 들어가서 노동자계급을 때려잡는 신자유주의 굿판에 앞장을 섰던 것도 냉엄하게 비판할 일이다.
‘반미’는 너무나 옹색한 과녁이다. ‘반미’만 되뇌다 보면 북핵 사태에 더 험상궂게 쌍지팡이 짚고 나선 일본 군국주의, 시어미보다도 더 나대는 시누이에 대한 경계도 소홀해진다. 사실 따지고 보면 중국도 (예전에 베트남과 국경 분쟁을 벌였듯이) 아시아에서 나름의 패권을 휘두르려는 제국주의적 경향이 잠복해 있다. 북한이 중국에 정치·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반미 운동’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담아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남한 자본 자신이 아(亞)제국주의로 행세하여 제3세계 민중들을 착취하는 데 대한 성찰을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아시아로 진출한 남한의 악덕 자본들이 그 곳의 민중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례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남한의 국가기관은 네팔의 왕정을 유지하는 일을 은밀히 돕기도 했다. 근래 들어 보수언론의 지면에는 ‘우리도 자원확보 경쟁에 나서자’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실린다. 남한의 이라크 파병을 꼭 ‘미국이 시켜서’라고만 볼 일일까? 베이루트 평화유지군 파병은 자청해서 하려는 것 아닌가. 남한이 일본, 호주와 함께 NATO 회의에 참관 초청을 받은 것도 예사롭지 않다.
남한의 지배층이 세계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 구조, 정치 군사적 지배 기제에 동참하는 일을 정면으로 따져 살피지 않는 진보운동이라면 과연 그런 안일한 운동을 ‘진보’라 추어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한미FTA’도 아(亞)제국주의에 대한 통찰 없이는 깊이 비판할 수 없다. 한미FTA를 발판으로 하여 제 3세계에 진출하려 하는 남한 초국적 자본의 속셈과 우리 사회가 배출해낸 (아)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겸비될 때라야 한미FTA 저지투쟁의 설득력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운동의 과제를 ‘반미’로 좁히는 것이 “북한을 엄호하자”는 정치의 발로라는 것도 확인해 두자. 물론 우리는 그들을 엄호해야 한다. 그러나 더 넓은 전망 속에서 그 일도 벌여야 그 일이 엇나가지 않는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과 중국과 남한의 지배계급을 두루 엮을 때 만들어지는 운동의 과제는 ‘반제(反帝)’가 아니던가? 그래야 네팔과 필리핀, 중국과 일본과 미국의 노동자들과 본때 있게 ‘연대’할 수 있지 않은가? ‘반미’에서 ‘반제’로 과녁을 업그레이드할 때라야 우리의 운동은 드넓은 지평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한편으로 우리는 ‘반미’의 문제의식이 소홀한 쪽에 대한 비판도 게을리할 수 없다. 이른바 범좌파라는 ‘전진’의 기관지 최근호에 북핵 관련한 글이 실렸는데, ‘미국에게 책임이 있다’는 단언은 있으나 어떻게 미국을 추궁할 것인지 진지한 결의가 들어있지 않다. ‘반핵은 무조건적인 원칙’이라는 수상쩍은 이야기가 난무할 뿐(...세상에, ‘무조건’이라니!!!...), ‘반제’나 ‘반미’라는 낱말은 찾아볼 길이 없다. ‘미국과 대립하지 않겠다’는 방침이 은밀히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제국주의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사회개량주의의 안온한 틀 속에 머무르겠다는 뜻이 아닌가.
반세계화 또는 대안세계화 운동에 열심인 그룹도 눈길이 다소 비좁다. 일국적(一國的) 틀을 넘어 세계 현실을 ‘하나’로 파악하는 것은 옳으나,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추상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경제적 착취와 수탈의 현실만 주로 주목할 뿐, 미국을 맹주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횡포를 일삼는 정치군사적 지배의 현실을 깊이 숙고하지 않는다. ‘무장된 세계화’를 언급은 하고 있으나, ‘제국주의에 맞서라!’고 똑 부러지게 과녁을 제시하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생결단하겠다는 치열함이 부족한 탓일 게다. 담론은 아주 급진적이지만, 실천은 개량주의 구도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지금의 정세가 얼마나 엄중한지, 구태여 자세히 언급할 것도 없다. 민주화의 한 시대가 저물고, 한 시대의 사회운동이 역사적으로 패배했다. ‘제2의 박정희 시대’라 부름직한 신자유주의 파시즘이 도래할 위험이 아주 높다. 그렇다면 박정희 시대에 살았듯이 그렇게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우리의 운동을 추슬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은가?
한 쪽은 ‘민족’을 탐닉하고 다른 쪽은 ‘계급’을 희롱했다. ‘반미’에 얼마쯤의 진실이 들어 있지만 ‘반제’로 상승할 때라야 그 진실이 산다. ‘노동해방’도 ‘반제’를 치열하게 떠맡을 때라야 노동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추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힘차게 팔뚝질하며 외칠 말은 ‘반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반대!’도 안일한 외침에 불과하다.
드디어 비정규악법도 국회를 통과하고, 로드맵 통과가 곧 예고되어 있는데도 별다른 저항이 조직되지 못하는 시절.
노동자계급이 이렇게 무기력해질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시절에
그리하여 “껍데기는 가라!!” (2006.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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