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세(정치) | <주간논평> 저무는 세밑, 큰 뜻을 품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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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순 작성일-1-11-30 00:00 조회1,688회 댓글0건본문
<주간논평>
저무는 세밑, 큰 뜻을 품어야 할 때!!!
김 철 순
‘포대(包袋) 화상(和尙)’을 아시는가? ‘자루를 든 중’이라는 뜻인데, 중국 후량(後粱)시대에 실존한 스님의 별명이다. 그는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거기 들어 있는 오만 것을 다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회향(廻向)’ 정신을 말하는데 자기가 힘들여 쌓은 공덕을 “남에게 돌려준다”는 뜻으로, 이 포대화상은 온 나날을 ‘회향’의 실천에 바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옛 동양 민중의 우상이 되었다.
엊그제 벗들과 직지사에 들렀다. “문 열자 선뚝! 뚝 듯 듯 / 먼 산이 이마에 차라 / 雨水節 들어 / 바로 초하로 아침 /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정지용의 시는 춘설(春雪)을 노래했으나, 아직은 강철 무지개 같은 한창의 겨울. 황악산 이마에 둘린 눈부신 흰눈이 번뇌로 뒤덮인 우리들 이마를 서늘옵게 식혀 주었다.
아, 거기, 황악산 자락 아래 직지사 대웅전 모퉁이에 포대화상 그 친구의 동상이 덩그러니 서서 입 째지게 너털웃음 터뜨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는 비만(肥滿)을 넘어 풍선처럼 흉측하게 늘어졌으나 얼굴은 마냥 순진무구하여 낯선 동네 어린 녀석들이 돌팔매를 던져도 태평할 듯했다.
그의 운수(雲水) 행각은 속으로 속으로 치열하다. 역사책은 그의 베푸는 행위를 ‘뭇 중생의 업을 구제한다’는 거룩한 종교적 관념으로 해설하고 있으나, 관념의 허울을 걷고 그 알갱이만 짚자면 ‘그늘진 곳의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행동’일 터이다. 무릇 진정한 종교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통하리라. 발 부르터 가며 온 동네를 겪은 그의 삶은 위대한 ‘사회적 개인’의 한 표본이었으리라.
한미FTA와 북 핵실험과 부동산 폭등을 겪은 올해의 한국 현실은 온통 컴컴한 어둠의 터널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심지어 중앙일보조차 좌절한 민중의 딱한 처지를 걱정하는 지경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이런 12월이 없었다. 북한 핵실험의 구름은 여전히 한반도를 덮고 있다.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 불쌍한 북한 국민은 또다시 길고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야 한다. 남한에도 추운 사람이 많다.... 이들이 기댈 희망의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12월 4일치 사설)
그래서 ‘(87년 이후)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아니겠는가. 노동자의 처지에서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민주화의 봄’이 왔으되, 오지 않았다. 같잖고 꼴 사납고 민중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사꾸라 민주화만 지겹게 만발했다. 심지어 자본가들에게도 ‘개혁보수’와 ‘수구보수’가 저희끼리 멱살잡이하며 날을 지새어 ‘믿을 놈’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언제 어디서 곪은 종기가 터지고 거품이 꺼져들지, 온통 흔들리는 미래! 그런데 노동자계급은 이 현실에 어떻게 맞서고 있는가?
민주노총은 ‘비정규악법’의 국회 통과를 멀거니 두 눈 뜨고 바라다보아야 했다. ‘노사관계 로드맵 야합’을 응징하겠노라는 11월 총파업은 맥없는 종주먹질로 끝났다. 하중근 열사의 죽음이 ‘경찰의 타살’이라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언명했는데도 이를 받아안아 국가 폭력기구를 징치해낼 단결투쟁력이 지금 노동자계급에겐 없다. 평택 투쟁은 진작부터, 한미FTA 저지투쟁도 날이 갈수록 가라앉았다. ‘민중 총궐기’날에 비조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시위 대오를 뒤따랐는데 정작 그들을 이끌어야할 조직 노동자의 지휘부는 투쟁 열기를 달래기 바빴다. ‘노무현 퇴진투쟁’을 결의해 놓고도, 막상 집회에서는 말꼬리를 흐렸다.
민주노동당은 북핵 실험이 있고나서, ‘미국의 제재’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일은 뒷전으로 돌리고 부질없는 ‘정체성 논쟁’을 벌여 보수언론들의 비웃음마저 샀다. 집값이 폭등하여 민중이 아우성치니까 수구 세력인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집값을 절반으로 내릴 수 있다’고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는데 정작 ‘진보’를 표방해온 민주노동당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다. 비정규악법이 의결되고, ‘로드맵’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는데도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아무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의원직 사퇴만이 그나마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당 게시판에 쓴 소리가 올랐는데도 묵묵부답이다.
무릇 정당이란 ‘집권을 목표’로 치열하게 나설 때라야 대중에게 감명을 준다. “당신들(대중)의 마음을 달라. 그러면 집권하여 당장이라도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 그런데 지금의 민주노동당에서는 그런 기백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울산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이 비정규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집권의 포부를 품은 당이라면 마땅히 통 크게 행동해야 한다. “조직된 노동자와 농민에게 문호를 열어 이들 수많은 대중이 대통령후보를 뽑게 하라. 그리하여 진보세력 전체에게 분발할 기회를 열어주라.”는 제안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아시다시피 북핵 실험으로 한결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정세는 ‘평화와 통일’의 과제를 시급한 것으로 들이밀고 있다. 한미FTA도 국가적 현안일 뿐 아니라, 부동산 폭등이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한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민중은 자잘구레한 개혁이 아니라 크고 굵직한 대안을 갈구하는 법이다. 그리고 대통령선거는 민중 앞에 새로운 큰 그림을 내걸 수 있는 흔치 않은 계기다. 무엇보다, 내년의 대선은 앞으로 30년의 정치정세를 윤곽 지울 긴장된 ‘전환기’가 아니던가. 노동자계급은 이 때에 과연 주인 되어 나설 것인가?
큰 시련은 큰 포부를 품을 때라야 헤어난다. 벗이여, 우리가 지닌 지혜와 열정과 모든 힘을 남북한 7천만 민중의 앞날을 열어제치는 데에 쓰자.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지닌 유형무형의 모든 권력을 우선 조직된 노동자들에게라도 ‘회향’하라! “우리는 얼마든지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다!” 거렁뱅이 중놈 ‘포대 화상’처럼 크낙하게 낙관하라! 언제 어디서 돌팔매를 맞더라도 흔들림 없이 걸어가라! 이는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깊은 눈길의 ‘사회적 역사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먼 산이 이마에 차라! 할(喝)! (2006. 12. 13)
저무는 세밑, 큰 뜻을 품어야 할 때!!!
김 철 순
‘포대(包袋) 화상(和尙)’을 아시는가? ‘자루를 든 중’이라는 뜻인데, 중국 후량(後粱)시대에 실존한 스님의 별명이다. 그는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거기 들어 있는 오만 것을 다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회향(廻向)’ 정신을 말하는데 자기가 힘들여 쌓은 공덕을 “남에게 돌려준다”는 뜻으로, 이 포대화상은 온 나날을 ‘회향’의 실천에 바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옛 동양 민중의 우상이 되었다.
엊그제 벗들과 직지사에 들렀다. “문 열자 선뚝! 뚝 듯 듯 / 먼 산이 이마에 차라 / 雨水節 들어 / 바로 초하로 아침 /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정지용의 시는 춘설(春雪)을 노래했으나, 아직은 강철 무지개 같은 한창의 겨울. 황악산 이마에 둘린 눈부신 흰눈이 번뇌로 뒤덮인 우리들 이마를 서늘옵게 식혀 주었다.
아, 거기, 황악산 자락 아래 직지사 대웅전 모퉁이에 포대화상 그 친구의 동상이 덩그러니 서서 입 째지게 너털웃음 터뜨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는 비만(肥滿)을 넘어 풍선처럼 흉측하게 늘어졌으나 얼굴은 마냥 순진무구하여 낯선 동네 어린 녀석들이 돌팔매를 던져도 태평할 듯했다.
그의 운수(雲水) 행각은 속으로 속으로 치열하다. 역사책은 그의 베푸는 행위를 ‘뭇 중생의 업을 구제한다’는 거룩한 종교적 관념으로 해설하고 있으나, 관념의 허울을 걷고 그 알갱이만 짚자면 ‘그늘진 곳의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행동’일 터이다. 무릇 진정한 종교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통하리라. 발 부르터 가며 온 동네를 겪은 그의 삶은 위대한 ‘사회적 개인’의 한 표본이었으리라.
한미FTA와 북 핵실험과 부동산 폭등을 겪은 올해의 한국 현실은 온통 컴컴한 어둠의 터널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심지어 중앙일보조차 좌절한 민중의 딱한 처지를 걱정하는 지경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이런 12월이 없었다. 북한 핵실험의 구름은 여전히 한반도를 덮고 있다.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 불쌍한 북한 국민은 또다시 길고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야 한다. 남한에도 추운 사람이 많다.... 이들이 기댈 희망의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12월 4일치 사설)
그래서 ‘(87년 이후)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아니겠는가. 노동자의 처지에서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민주화의 봄’이 왔으되, 오지 않았다. 같잖고 꼴 사납고 민중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사꾸라 민주화만 지겹게 만발했다. 심지어 자본가들에게도 ‘개혁보수’와 ‘수구보수’가 저희끼리 멱살잡이하며 날을 지새어 ‘믿을 놈’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언제 어디서 곪은 종기가 터지고 거품이 꺼져들지, 온통 흔들리는 미래! 그런데 노동자계급은 이 현실에 어떻게 맞서고 있는가?
민주노총은 ‘비정규악법’의 국회 통과를 멀거니 두 눈 뜨고 바라다보아야 했다. ‘노사관계 로드맵 야합’을 응징하겠노라는 11월 총파업은 맥없는 종주먹질로 끝났다. 하중근 열사의 죽음이 ‘경찰의 타살’이라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언명했는데도 이를 받아안아 국가 폭력기구를 징치해낼 단결투쟁력이 지금 노동자계급에겐 없다. 평택 투쟁은 진작부터, 한미FTA 저지투쟁도 날이 갈수록 가라앉았다. ‘민중 총궐기’날에 비조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시위 대오를 뒤따랐는데 정작 그들을 이끌어야할 조직 노동자의 지휘부는 투쟁 열기를 달래기 바빴다. ‘노무현 퇴진투쟁’을 결의해 놓고도, 막상 집회에서는 말꼬리를 흐렸다.
민주노동당은 북핵 실험이 있고나서, ‘미국의 제재’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일은 뒷전으로 돌리고 부질없는 ‘정체성 논쟁’을 벌여 보수언론들의 비웃음마저 샀다. 집값이 폭등하여 민중이 아우성치니까 수구 세력인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집값을 절반으로 내릴 수 있다’고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는데 정작 ‘진보’를 표방해온 민주노동당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다. 비정규악법이 의결되고, ‘로드맵’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는데도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아무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의원직 사퇴만이 그나마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당 게시판에 쓴 소리가 올랐는데도 묵묵부답이다.
무릇 정당이란 ‘집권을 목표’로 치열하게 나설 때라야 대중에게 감명을 준다. “당신들(대중)의 마음을 달라. 그러면 집권하여 당장이라도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 그런데 지금의 민주노동당에서는 그런 기백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울산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이 비정규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집권의 포부를 품은 당이라면 마땅히 통 크게 행동해야 한다. “조직된 노동자와 농민에게 문호를 열어 이들 수많은 대중이 대통령후보를 뽑게 하라. 그리하여 진보세력 전체에게 분발할 기회를 열어주라.”는 제안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아시다시피 북핵 실험으로 한결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정세는 ‘평화와 통일’의 과제를 시급한 것으로 들이밀고 있다. 한미FTA도 국가적 현안일 뿐 아니라, 부동산 폭등이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한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민중은 자잘구레한 개혁이 아니라 크고 굵직한 대안을 갈구하는 법이다. 그리고 대통령선거는 민중 앞에 새로운 큰 그림을 내걸 수 있는 흔치 않은 계기다. 무엇보다, 내년의 대선은 앞으로 30년의 정치정세를 윤곽 지울 긴장된 ‘전환기’가 아니던가. 노동자계급은 이 때에 과연 주인 되어 나설 것인가?
큰 시련은 큰 포부를 품을 때라야 헤어난다. 벗이여, 우리가 지닌 지혜와 열정과 모든 힘을 남북한 7천만 민중의 앞날을 열어제치는 데에 쓰자.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지닌 유형무형의 모든 권력을 우선 조직된 노동자들에게라도 ‘회향’하라! “우리는 얼마든지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다!” 거렁뱅이 중놈 ‘포대 화상’처럼 크낙하게 낙관하라! 언제 어디서 돌팔매를 맞더라도 흔들림 없이 걸어가라! 이는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깊은 눈길의 ‘사회적 역사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먼 산이 이마에 차라! 할(喝)! (2006.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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