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 연구소
정세와 투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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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세(정치) | <주간논평> ‘진보적 개혁’에서 ‘변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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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순 작성일-1-11-30 00:00 조회1,3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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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논평>   
                          ‘진보적 개혁’에서 ‘변혁’으로 !

                                                          김 철 순
                         

1.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즘처럼 답답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때가 없으리라. 언론 매체는 한나라당 내 대선 경쟁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으며, 열린우리당이 얼마나 내홍을 겪고 있는지만 날마다 대서특필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사정이 어떠한지는 뉴스에 도통 오르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바깥의 진보세력들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의 언론에 반영되고 있는 ‘정치세력 관계’를 바꿔낼 계기가 마련되지 못한다면 대통령선거 결과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사태의 뿌리를 파헤쳐 살피는 노력이 1분 1초, 긴급하다.

2. 12월 25일 중앙일보 1면에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가 삭발(!)을 하고 예배를 집전하는 광경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위해 사학법을 반대한다!”고 그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새문안교회는 한국 교회의 ‘상징’이라고 중앙일보가 친절하게 제목을 달았다. 같은 날 한겨레 1, 3면은 노무현과 고건이 무슨 말다툼을 벌였는지를 시시콜콜 알렸다. ‘정치적 이용과 계산’이 깔린 말다툼이라고 한겨레는 ‘중간 제목’을 통해 해설했다.
 말하자면 중앙일보는 하나님과 한국교회의 권위를 빌어서 “수구세력이 총궐기합시다!”하고 주관적으로(또는 열정에 들떠) 선동한 반면, 개혁세력의 대변지인 한겨레는 개혁세력의 ‘내분’을 객관적으로(또는 우울한 기분으로) 해설한 것이다.

  “어두운 방 안엔 / 빠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 애처로이 젖어드는 어린 목숨을 / 지키고 계시었다...(김종길의 시 ‘성탄제’)”
 그런 달동네, 응달진 곳의 이웃들에게로 하염없이 관심의 눈길이 모여들어야할 그런 날에,
 수구세력은 유서 깊은 사립학교의 힘센 소유권자들을 구하러 달려갔고,
 개혁세력은 ‘노무현 일병을 구할 거냐, 말 거냐’ 주판알 놓기에 바빴다.   

3. 위의 사실은 ‘진보’와 ‘개혁’에 대해 다시 성찰하게 해준다. 4년 전 노무현은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선동했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캄캄한 옛날로 돌아갑니다!” 그 선동 덕분에 그는 집권했고 공약대로 '개혁'을 추진했는데 그 '개혁'은 '신자유주의 개혁'이어서 민생이 결국 파탄 났다. 나중에 그가 궁색하게 자신을 ‘신자유주의 좌파’라 자칭했거니와, 이를 온당한 낱말로 옮기자면 ‘보수 개혁파’요, ‘지배세력 내 비주류’가 된다.
 그들이 어렵게 개혁하여 생색을 낸 것의 하나가 ‘사립학교 민주화법’이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이 개혁을 도로 물릴까, 말까’ 요즘 갈팡질팡하고 있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과 ‘변화를 바라지 않는 지배세력’ 사이에서 어느 떡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목사들이 머리를 깎는다 하니, ‘날아갈 표’ 계산에 열린우리당 386들의 눈 앞이 캄캄하다. 사학법이든 ‘사법 개혁’이든 다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김영삼에서 노무현까지 15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보수개혁의 실상은 부동산 폭등의 계기를 맞아 ‘총체적 파탄’으로 귀결된 셈이다. 그리하여 민중에게 외면당하고 지배세력에게 왕따당하자 노무현은 '중도 사퇴할 수도 있다'며 한편으론 민중을 협박하고, 더 중요하게는 지배세력을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여차하면 '판을 깨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문제는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파다. 이들은 ‘개혁’하여 진보하겠다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김대중과 노무현도 ‘개혁’한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이들이 아무리 “우리는 ‘진보 개혁’이에요.”하고 외친다 한들 국민들이 둘 사이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보수 개혁과 진보 개혁이 그렇게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사학법 개정안’에서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보다 ‘사학 이사회’를 좀더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설령 민주노동당 안이 통과되었다 한들, 국가 지배세력이 사학 소유자들의 소유권을 든든하게 뒷배 보아주는 현실이 바뀌지 않았는데 ‘이사회 구성의 변화’만으로 과연 사학 문제가 척결될까? 사람들이 “아, 왜 저 좋은 법안(정책 대안)을 놔두고서 이 법안을 채택했을까?”하고 발이라도 굴렀을까? ‘보수 개혁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더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압도적으로 의회에 진출해야만 그 진보적 법안이 실현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문제는 얼마나 좋은 ‘정책 대안’을 내놓느냐가 아니었다. 어떻게 대다수 노동자 농민의 지지행동을 얻어내느냐 하는 것이 막중한 과제였다.

 기실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 차이다. 노동자들이 사회적 요구 운동을 벌여 ‘8시간 노동제’를 얻은 것을 ‘사회 진보’라고 말하지, 사회체제 또는 정치체제를 바꾸는 혁명이었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으로 갈라 보는 것이라서, 보수세력들이 걸핏하면 ‘진보’의 허울을 뒤집어 썼다. “김대중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니 그를 밀어주자!”고, 김대중 비판적 지지파가 오래도록 활약해온 사실을 떠올리라. 그동안 한겨레 같은 데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을 두리뭉수리로 ‘진보 진영’이라 일컬어온 것도 ‘진보의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 데 톡톡히 구실했었다. 그리하여 열린우리당의 탄압을 받아온 민주노동 단체들도 국민들에게는 ‘열린우리당과 한 통속’으로 취급되었고, 거꾸로 진보적 지향을 품은 민중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변함없이 짝사랑하게 만들었다. 열린우리당과 ‘선 긋기’를 하지 않고서 진보세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래 전부터 명명백백했거니와, 민주노동당이 제법 의회 내 거점을 마련한 지금도 ‘선 긋기’가 되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 때문인가? 
 
4. 사학법으로 되돌아 가보자. 한국처럼 ‘사학’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가 이 지구에는 없다. 하나님까지 등에 업은 그들의 사회적 끗발은 여간 큰 것이 아니어서, ‘수구세력’의 든든한 후방 기지가 되어주고 있다. 사립 중고교의 재정을 나라 세금에 97% 의존하고 있으면서, 이들은 마치 사학이 자기들의 사유재산인 양 행세해 왔다. 교직원과 학생은 마치 ‘회사 사원’처럼 상명하복해야만 하고 인사(人事)와 학교 운영은 오직 소유주만이 전횡하는 독재사회! 이를 뿌리채 해결할 길이 무엇인가? 사학 재단을 (거의 대부분) 국공립으로 환수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87민중대진출에 의해 한국 사회는 얼마쯤 민주화가 되기는 하였지만, ‘미완의 혁명’에 머물렀다. 이 과제도 진작에 실현되었어야할 ‘진보적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가 아니었는가? (아마도 혹여나 사회적 반동이 다시 몰아닥칠 경우, 70년대식의 파시즘 문화가 사립학교 사회를 다시 휘감을 수도 있다)

 십수년 교육민주화 운동의 열매로 가까스로 실현된 것이 ‘사립학교법 개정’이었거니와, 이것이 볼품없는 ‘보수 개혁’에 머물렀기 때문에 운동 주체들이 힘을 받지 못했다. 십수 년 전보다 오히려 못하게, 학교 현장이 더 침체돼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진보 개혁이 되었더라면...민주노동당 법안이 실현되었더라면...’하고 상상해 보았자 아무런 힘이 생겨나지 못한다. 어찌해야 운동의 주체들이 다시 일어설까? “사립을 공립으로!” “이 나라 학교 모두에 당장 교육공공성을 실현하자!” 지각 변동을 이뤄내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나아갈 때라야 수많은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5. ‘진보’는 더 이상 우리의 푯대가 될 수 없다. “‘보수’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자구!” 그런가? “그거야 좋은 일이지만, 여보게 친구! 현실 여건이 어려우니 당분간 ‘보수’에 머물러 있자구. 어디 세월이 좀 먹나?” 물러나 앉을 심리적 유혹은 얼마든지 찾아온다. 그래서 사립민주화 운동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독재냐, 민주주의냐? 이 둘은 상대적인 차이가 아니다. 독재에 의해 핍박 받은 민중은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재에 ‘전인격적으로’ 맞서 싸운다. 인생을 건 싸움이다. 전혀 다른 세상을 간구하기 때문이다. 운동의 주체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혁명투쟁에 나설 때라야 비로소 이 사회가 한 걸음, 두 걸음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독재 반대’는 절박한 정세의 문제다. 한나라당의 일방적 독주가 계속될 경우, 우리는 ‘신자유주의 파시즘’의 출현을 허용할지도 모르는데 그러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흐름에 맞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혁명적으로 밀고 나가야할 막중한 과제를 떠안고 있다. 최근 통과된 비정규 관련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은 ‘벌거벗은 자본 독재’의 법적 기초를 더 강화해 놓지 않았는가. 

 물론 우리는 혁명(=변혁)이 꼭 무슨 항쟁과 봉기를 통해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민족해방파의 논객 한호석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에 실린 글에서 “지금 시기에 선거혁명은 하릴없다. 전민항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아주 비현실적이고 수상쩍은 노선을 제출했다. 그러나 냉철한 이성으로 바라보자면 베네주엘라의 차베스처럼 노동자계급이 선거혁명을 통해 집권을 해도 사회를 바꾸어낼 토대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베네주엘라는 차베스의 집권 이후 10년 가까이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대중의 힘으로 실현해 가고 있다. 민중의 정치적 성숙도가 낮다고 할 수 없는 한국에서 선거혁명은, 즉 노동자계급의 집권과 그를 통한 사회변혁은 결코 ‘먼 훗날의 꿈’이 아니다.

6. “진보적 개혁이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 혁명이다!” 지금 들어올릴 우리의 구호는 바로 이것이다. 이 글은 ‘사립학교법 재개정 현실’을 하나의 예로 들어서 그 절실함을 설명했지만 더 예시할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부동산 폭등’과 머지않아 닥칠 ‘거품 폭락’ 사태를 직시할 때 그 변혁의 절실함이 더 분명해진다.(거꾸로, 진보개혁이 보수개혁에 농락 당하는 숱한 경우도 헤아릴 일이다. 엊그제 노무현은 선심성 공약으로 ‘군 복무 단축’을 슬며시 꺼내들었거니와, ‘통일 의제’를 대담하게 꺼내들지 못하고 그저 눈 앞의 ‘긴장 완화’쯤만 거론해온 진보파들의 소심증이 또 드러났다.)

 그런데도 개혁의 테두리를 넘어서기를 끝내 망설이는 한, 진보세력은 영영 ‘보수세력 비주류의 2중대’ 처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북한의 ‘민주기지론’이 민주노동당 다수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몇 년 안에 민주노동운동이 궤멸할 수도 있는 이 엄중한 시기에 한국의 진보세력이 가장 급하게 실천할 일은 자신의 이름부터 ‘개명’하고 그 이름에 걸맞게 체질을 바꾸는 일이다. ‘진보세력’에서 ‘변혁(혁명) 세력’으로! 지금 우리의 진보세력 동네에는 ‘변혁의 기풍’이 너무나 죽어 있지 않은가. 다들 기개와 포부가 조그맣게 오그라들고 있지는 않은가? (2006.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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