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 연구소
정세와 투쟁방향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의 <정세와 투쟁방향>입니다.

국내정세(정치) | <주간논평> 생활공간의 땅을 자본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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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순 작성일07-01-31 00:00 조회1,4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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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전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반값 아파트 안’으로 세인의 마음을 끌자, “내년에 시범 실시해보겠노라.”고 정부 여당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보다 더 ‘개혁정당’으로 나타난 한 사례). 정부가 부동산 폭등에 어떻게든 대책을 세우는 시늉을 해야 하는데 손쉬운 길로 ‘금리인상, 주택대출 제한’ 방침이 나오자 삼성연구소가 기민하게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그랬다가는 경기침체를 부추길 수 있다!” ‘분양원가 공개’ 요구가 다시 일었지만 관료들은 뜨악한 태도로 “공급 확대가 유일 대안”이라는 낡은 타령만 되풀이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임대주택 쿼터제’를 정책대안으로 내놓았던 모양인데, 국민대중에게 얼마나 알려졌을지, 얼마나 반응을 얻었을지 미심쩍다. 이렇듯 한 차례 여론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언론 매체들은 언제 갑론을박의 ‘사후 약방문’들이 나왔는지도 까맣게 잊고, ‘대통령 후보들의 시시콜콜한 움직임’ 보도로 다시 우루루 몰려갈 것이다. 결국 대통령을 잘 뽑아야 무슨 문제든 타개책이 열릴 것이라는 압도적인 현실 법칙 앞에 우리는 맞닥뜨린다. 

2. ‘노동 해방’의 세상을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눈부터 똑바로 떠야 한다. 사람들의 말을 한 낱말 한 낱말 똑바로 따지고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 한다. 정치인과 학자는 거짓 논리로도 얼마든지 밥을 먹고 거짓 논리라야 밥벌이하기가 더 수월하지만, 가진 것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거짓 논리를 단 하나라도 받아들일 때 패망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그래서 따져 본다.
 사회 지배세력과 정부는 ‘부동산 가격의 안정’을 바란다. 높은 폭으로 뛰어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다고 그들 뜻대로 ‘안정’될 일일까? 또 그들이야 그렇다 치고, 우리는 집값이 지금 수준에서 ‘안정’되는 것으로 충분한가? 이미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는 것이라면 그 거품을 남김없이 빼내고, 다들 값싼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점진적 개선’의 신기루를 좇아 다람쥐 쳇바퀴 속을 달리는 ‘개혁’이 아니라 뿌리부터 들추는 ‘혁명’에 나설 일이 아닐까?

 다시 따진다. 아시다시피 지난 15년간의 ‘보수 개혁’은 여지없이 실패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추진해온 ‘진보 개혁’이 몹시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도 그들의 정치적 신망이 바닥을 치는 것으로 입증된다. ‘개혁’이 실패했다는 것은, 그 주체들의 무능력도 말해주지만 점진적 개혁으로 돌파하기에는 우리의 정치 경제적 여건이 너무나 엄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벅찬 일이기는 해도 ‘혁명’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 아닐까?
 우리는 낱말의 표현도 따져야 한다. 운동권에서는 ‘변혁’이라는 낱말을 써왔는데 ‘혁명’의 다른 표현이다. ‘혁명’이 죽은 개처럼 취급되던 시절에 사용한 ‘노예 언어’이고, 그래서 일반 민중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노동자 민중이 주인으로 일어서지 못하고서는 혁명이 성사될 수 없거늘, 정말로 혁명을 추구한다면 언어 습관부터 바꿀 일이 아닐까? 몇몇 사람끼리 말하더라도 ‘우리, 혁명하자!’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3. 베네주엘라의 뜻있는 민중들은 새로 만든 ‘볼리바리안 헌법’ 책자를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는다. 우리도 ‘토지 문제’를 생각할 때 헌법부터 들여다볼 일이다. 헌법에 무겁게 규정돼 있는 ‘국방의 의무’부터.
 제 집이 없어 서럽게 남의 집 전세살이를 해온 한 청년이 군대에 갔다. 그의 임무는 국토를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토는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도 아주 심하게 ‘사유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는 국토를 지키는 것일까, 부동산 투기꾼들이 차지한 사유지를 지키는 것일까? 남의 땅을 지키는 일에 (강제로 끌려가서 임금도 받지 못하고) 노무현의 표현마따나 제 청춘을 ‘썩어야’ 한다면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우리는 국민의 의무만 묻지 말고, 엄중하게 국가의 의무도 따져 물어야 한다. 지난 봉건사회에서 모든 땅은 ‘왕토’였다. 비록 실제의 권력을 쥔 귀족들이 큰 덩어리를 점유하여 행세는 했지만 법 관념으로는 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때로는 몰수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선공후사(先公後私)’라 하지 않았는가. 민주주의 이념이 자리잡을 수 없는 봉건사회에도 나름의 공공성 개념이 있었으니, ‘왕의 정치를 하는 집단 즉 조정(朝廷)’이 ‘공’의 실체였던 것이다. 이렇듯 캄캄한 중세 사회에도 사유(私有)를 다스리는 ‘공’이 있었거니와, 인류의 이성이 계몽되어 태어난 근대 사회가 사유(私有)를 통어할 수 없다면 이는 빗나간 근대라 해야 한다. 

 ‘나라의 땅’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군대와 경찰과 관료들의 일터만을 ‘국토’로 규정한다면 ‘국가 = 벌거벗은 폭력기구’밖에 되지 못한다. 국민에게 ‘당신들 인생의 귀한 시간을 국토 수호에 바치라’고 요구하려면 그 나라는 국민들의 삶터(생활세계)를 제공해야 마땅하다.  그들이 잠잘 집터, 그들이 쉴 마당(공원)과 숲과 산, 그들이 걸어다닐 길만은 적어도 ‘나라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헌병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러나서 국토를 지키지 않겠는가?
 농토와 공장 터와 가게 터까지 나라에서 거둬들일 것은 없다. 주택을 둘러싼 투기 놀음만 확실하게 가라앉혀도 ‘부동산 투기’는 잡힌다. 시장에 맡겨도 큰 탈이 없는 것은 시장에 맡기는 것이 낫다.
 넓고 넓은 사유지들을 사들이려면 국가가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하지 않느냐구? 물론 그렇다. 그 돈을 어디서 구하느냐구? 한국은행에서 돈을 찍어내면 된다(발권). 현대의 국가는 인민의 살림을 위해 돈을 찍어낼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돈’은 신비로운 물신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너무 큰 돈 아니냐구? 지금 시가(時價)로는 그렇겠지만 ‘지금 시가’가 투기의 결과인데 왜 투기소득을 보장해준다는 말인가. 거품을 걷고 나서 보상하면 된다. 이 거대한 사업은 당연히 ‘단계적’으로 밟아나갈 것이다.
 
4. 이것은 혁명인가? 혁명이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이다. “모든” 토지를 국유화 또는 사회화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틀 자체를 문제삼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절박한 과제는 민중의 생활세계를 투기자본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일이고, 이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송두리째 지양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토지 공개념’이 자리잡았고 싱가포르는 ‘토지 국유화’를 단행하지 않았는가.
 민중의 실제 삶을 보라. 비정규직 노동자 부부가 고단한 맞벌이를 해야 매달 2-3백만 원 남짓을 번다. 이들이 피눈물나게 저축을 해도 한 해 5백만 원을 저축하기 힘들다. 이들이 십년을 고생해서 모은 5천만 원은 20-25평 집의 건축비에 해당한다(평당 건축비 2-3백만 원). 세계 10위쯤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국가가 이들에게 집터는 거저 제공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2만불 국민소득’의 통계는 그래야 의미 있는 통계가 되지 않을까?
 집값이 이미 폭등해버린 사회에서 집 없는 서민들이 겪을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리 부처님이라 해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는 일이다. 곤궁한 빈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만이 진정한 정치라면 “혁명 없이” 우리는 정치를 말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내놓은 ‘임대주택 쿼터제’는 미쳐 날뛰는 부동산 투기와 맞대결하겠노라는 ‘선전 포고’가 결여된 소심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광풍은 쪼잔한 ‘개혁 입법’ 갖고 잠재울 수 없다. 국정의 일부에 대해서만 참견하는 국회의원의 제안으로는 어울릴지 몰라도 “우리 당이 집권하면 세상을 바꾸겠다!”는 집권 의지의 표명으로는 너무나 함량 미달이다.   
 
  결국은 대통령 선거다. ‘세상을 크게 바꾸겠노라’는 사람들이 온 민중에게 혁명의 강령을 이때 전파하지 않고 언제 전파할 셈인가. 정말로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이 탄탄하게 모이고 엮일 때라야 가까스로 혁명은 세상에 선 보인다. 혁명 세력이 이때 기지개를 켜지 않고 언제 켤 것인가.
  일찍이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 민중은 민주주의 혁명에 두 차례 나섰다. “독재자를 갈아치우자!”고 일어난 4.19혁명은 한때의 파도만을 일으켰다가 5.16의 반혁명을 불러온 채 덧없이 마감했다. “독재 타도, 노동권 쟁취!”를 부르짖은 87민중대투쟁은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얼마쯤 실현했지만 자유주의 부르주아세력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넘겨주고 점점 활력을 잃어갔다. 87정치체제가 수명을 다한 지금,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사람이 많다.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어 본때있게 민주주의 혁명에 나설 때만이 앞길이 가까스로 열리리라. 단지 사회정치제도만 바꾸는 게 아니라 민중이 고통 겪는 사회경제 현실을 송두리째 타파하는 혁명다운 혁명에! 그 첫 번째 강령으로, 우리는 집 없는 민중의 설움을 끝장내는 토지혁명을 내걸려고 한다. 묻는다. 당신은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간구하는가? 그럼 지금 당신부터 주인 되어 혁명에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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