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세(민중운동 동향) | FTA 투쟁 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전대석 작성일07-05-31 00:00 조회1,590회 댓글0건첨부파일
-
에프티에이투쟁평가.hwp (16.5K) 29회 다운로드 DATE : 2015-05-13 14:12:23
본문
FTA 투쟁일기
전대석 (사무금융노련 수석부위원장
한미FTA저지 범국본 금융공대위 집행위원장)
11월 18일 광화문 농성장에서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 회의가 열렸다. 22일의 민중총궐기를 궁리하는 차례가 되자 다들 얼굴이 달아올랐다.
범국본은 출범 때부터 11월을 ‘100만 민중 총궐기의 달’로 잡아 놓았었다. 첫 파고를 일으킬 때를 7월로 잡아, 민중 총궐기의 돛배를 띄울 수 있게끔 드넓은 민중의 바다를 만들 계획도 짜 내었으니 바로 1천만 서명운동이었다.
7월 12일 서울 집중투쟁은 일정부분 성공했다. FTA의 흐름에 얼마쯤 파열구도 냈고 다들 자신감도 얻었다. 그러나 그 열기를 8, 9월 휴가철에 다 까먹었고 제주 원정투쟁(10. 22-27)으로 간신히 되살려 놓기만 했을 뿐 좀처럼 다시 달아오르지 못하던 터였다. 오히려 돈 많은 정권의 선전 퍼붓기에 밀려 자꾸 움추러들었다. ‘민중의 바다’를 만들겠노라던 서명운동도 그 호기가 어디로 갔는지 부산 같은 몇 군데를 빼고는 파리를 날렸다. 10월까지 128만 명의 서명에 그쳤는데 그 중에도 민주노총은 8만 7천 명에 불과했다. 11월 민중총궐기 이후에도 서명 열기는 별로 되살아나지 못했다.
이런 형편이라 그 날의 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민주노총은 30만 총파업을 일으키고, 전빈련 같은 부문들을 그러모아서 지역마다 2만에서 5만까지 만들어 보자!” 그러나 실제 동력이 30만에 불과함을 확인하자, ‘50만을 목표로 다들 열심히 하자’고 되뇔 수밖에.
우리는 87년 민중항쟁을 머릿속에 그렸다. “(11월) 22일부터 29일까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싸우자! 주경야투(晝耕夜鬪)! 그래서 서울 시민들을 끌어내 보자!” 그런데 그리던 날이 밝고 보니, 지역에서는 끓어올랐지만 서울이 영 신통찮았다. 주력 부대가 되어야 할 민주노총 파업 대오가 미약했고, 시민들도 모여들지 않았다. 정부와 제대로 맞장 뜨는 정치 대립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22일 이후 정부가 반격에 나섰다. “폭력과 불법을 엄히 다스린다”는 불관용 원칙이 담긴 정부 담화가 24일에 나왔고, 조/중/동은 열을 내어 ‘교통 체증’을 욕해댔다. 168명에게 소환장이, 8명에게 체포 영장이 떨어졌고 스무 명 남짓이 철창에 갇혔다. 대부분 지역에서 싸운 동지들이다! 지역은 농민이 주력이었으니 서울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총궐기 뒤로 농민들이 ‘합법적 집회 공간’을 자꾸 거론 한 것도 ‘우리만 싸우라는 말이냐’ 하는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29일 2차 총궐기는 원천 봉쇄됐다. 4,5 천 명이 을지로 같은 도심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거리 시위를 벌였지만 22일만큼의 위력은 없었다.
11월 싸움은 정권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집회를 아예 막아버리고 시위대를 두들겨 패지 않나, 군사 정권때나 했던 ‘통행 제한’을 하지 않나. 개혁정권의 본색을 드러내게 했고, ‘12월 타결’의 희망을 접게 했다. 투쟁 열기가 높아졌고, FTA 반대여론이 과반수를 넘어섰다. 그러나 주체들 내부에서는 균열의 조짐이 비치고 ‘중앙 정치역량’의 허약함이 드러났다. 시민에게 다가간다는 명분 하에 줄곧 ‘국익’ 논리와 민족주의 선동을 벌였는데 그런다고 시민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노동자들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로 구석에 밀쳐 버리는 효과만 거두었을 뿐이다. “우리 노동자는 농민을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군! 우리 문제가 아니군!” 그러니 노동자들이 싸우는 시늉만 할 밖에.
그 뒤로 범국본은 중간층을 끌어 들이려고 부동산 문제를 FTA의 주된 의제로 다루고 중앙 정치전선도 세우자고 의견을 모았다. 고민은 한 셈이지만 ‘계급적 접근’은 여전히 곁가지에 머물렀다. 촛불 집회나 대중 연설에서 부동산 문제를 많이 꺼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한나라당이 ‘반값 아파트’로 기선을 잡은 뒤였다.
정치전선을 세우자고 내부 토론도 벌였다. 발제자 최형익의 요지인즉슨 FTA가 결국 정치와 주권의 문제라는 사실이 널리 드러났다는 것이다. 통일된 싸움을 꾸준히 벌이려면 탄탄한 정치전선체가 필요한데 아직 민노당은 미약하고 사회운동세력과의 연합이 긴요하므로 07년 대선에서 ‘민중경선제’를 들여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가 제안했다.
12월 3-8일 몬테나주에서 5차 협상이 열렸다. 8명이 원정을 갔고, 6일의 촛불집회도 초라했다. 민노당은 6차 협상에 당의 사활을 걸고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올 1월 15일, 민노당 의원들의 신라호텔 협상장 진입이 가로막히자 의원 9명 모두 노숙 단식에 들어갔다.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싸운 적은 헌정사상 단 한번도 없었는데도 언론은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당에서도 국회의원들이 앞장섰는데 뒤따르는 투쟁이 없었다. 민주노총은 선거를 구실로 ‘개점 휴업’에 들어갔다.
6차 협상 첫날 기자회견장도 무척 한산했다. 1월 16일 범국민대회는 5천 명 남짓만을 모아냈을 뿐이고, 국회의원들이 굶고 있는데도 동국대 앞에서 흩어져 귀가했다. 의원단을 엄호할 노숙농성단을 농민과 학생, 민노당이 하루씩 맡았는데 고작 50명 남짓이 모였다. 민노총 위원장 후보들도 협상장인 신라호텔을 외면하고 민노총 회의실에서 반FTA 기자회견을 열었다.
7차 협상(2.10-17)은 예상하지 않은 일이라 궁리 끝에 미국에 대규모 투쟁단을 보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결국 의례적인 수준에서 18명만 떠났다.
3월 2일 범국본 대표자회의가 열렸는데 대부분의 지역이 총궐기 뒤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서명도 제 자리 걸음이어서 2월말까지 140만 명을 넘지 못했다. 다들 몸과 마음이 지쳤던 게다.
이러니 ‘극단적인 처방’ 없이 3월 투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심전심으로 대표단 단식을 입에 올렸다. 문제는 노동쪽이었다.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구경만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어떻게 불러올까? 단위사업장노조 위원장까지 모아서 천 명의 단식단을 꾸리면 분위기가 뜨려나? 결국 1000명의 대규모 단식단을 꾸리기로 제안했다.
3월 8일 비상시국회의에서 민노당 문성현 대표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10일 서울역과 대흥역, 홍대 입구에 그런 대로 7천 대오가 모여 이대 입구로 행진했다. 독립문 지하철 역사가 막히고 경찰이 시내 곳곳의 통행을 막았다. 종각 마무리 집회에서는 물대포를 쏘아대고 토끼몰이식 강제 해산에, 기자들까지 폭행 당했다. 그러나 이 경찰 폭력을 사회문제로 규탄할 힘이 없었다. 대규모 단식단은 회의가 거듭될 때마다 ‘규모를 줄이자’는 소리가 나와 결국 100명의 단식단을 꾸리기로 했는데 막상 12일 기자회견장에는 20명 남짓이 나타났다. 무기한 단식은 6명만이 이어갔고 나머지는 하루씩 릴레이 단식으로 100명을 채웠다..
그 단식 농성장을 날마다 밤 11시 반 무렵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발동기가 잘 돌아가나 살피고 농성자들을 멀찍이서 지켜 보다가 자리를 떴는데 나는 나중에 알았다. 그가 허세욱 동지였음을.
3월 25일 2차 민중총궐기 때에 1만 명이 모여서 광화문을 거쳐 미대사관 앞까지 진격했다. 이상하리만치 경찰의 대응이 없어, 혹시 타결이 임박한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찾아 왔다.
26일 저녁, 단식을 풀었다. 4월 2일, 협상 시한은 점점 다가오는데 텐트에 인적이 뜸해졌다. 정부는 극적인 타결 국면을 만들려고 마지막 홍보에 열을 올렸다. 4월 1일 범국본 기자회견을 하이야트 협상장 앞에서 하기로 했는데 경찰이 가로막아 몸싸움 끝에 반경 5미터의 기자회견장 자리를 얻어냈다. 4시 무렵 회견을 하는 도중에 경리단 골목에서 ‘퍽’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흰 연기로 바뀌었다. 아, 허세욱!
한강 성심병원으로 갔다. 편지 3통! 범국본으로 보낸 편지는 공개됐지만, 노조로 보낸 편지는 내용을 “비공개”로 하고 “편지 자체”만 공개했다.
당일 7시 촛불집회는 허세욱열사 쾌유기원을 추가했다. 촛불 집회후 성난 시위대는 종로 광화문 안국동 서울경찰청 등 게릴라 집회를 이어갔고 사직공원 뒤편을 뚫고 시장을 지나 바로 청운동 새마을 금고 사거리 농아학교 주차장 까지 진출 했다. 다음날 마무리 집회후 새벽3시 범국본 회의가 열려 허세욱 동지건에 대해 열띤 토의가 있었다. ‘확전’에 부담을 느끼는 발언이 많아 ‘텐트도 접자’는 말까지 나왔고 결국 텐트 농성을 유지하자는 것까지만 합의했다.
4월 2일 범국본 회의가 열려, 노무현 퇴진과 타결 무효를 기조로 정했다. 미국 반대와 미제국주의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국민투표 실시 여부 등은 확정 짓지 못했다. 그 날 촛불 집회에는 50명 남짓이 왔다.
영등포 성모병원에서 ‘범국본’은 허세욱 열사의 가족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가족끼리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가족을 설득하러 들어간 오종렬 의장이 나와서 장탄식을 했다. “정권 퇴진까지 내걸어 놓고 우리 싸움이 왜 이 지경이냐. 가족에게 무시당한 것도 우리 대오가 짱짱하지 못해서다.” 기실 병원 앞에는 노동자 몇십 명이 모여들었을 뿐이다. 이미 뼛가루가 하늘로 날아간 며칠 뒤, ‘우리’의 장례식이 조용히 치러졌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범국본을 투쟁의 구심으로 다시 올곧게 세우고, 모든 것을 새로 짜야 한다. FTA는 농민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노동자의 문제다! ‘국익’ 이야기는 그만 해도 된다. 오히려 남한 자본이 아시아를 향해 소(小)제국주의를 일으키는 그런 면을 새로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대안도 준비해야 한다. 다시 선전하고 교육하자. ‘금속연맹’이 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