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 연구소
정세와 투쟁방향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의 <정세와 투쟁방향>입니다.

국내정세(민중운동 동향) | FTA반대투쟁으로 전선을 넓혀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5-13 14:33 조회1,980회 댓글0건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첨부파일

본문

<주간 정세논평>

               FTA반대투쟁으로 전선을 넓혀라

 

                                       정 은 교 (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동연구소)

 

                       
 한국진보연대, 기대할 구석이 없다

 

  이 글의 결론은 제목에 밝힌 대로 ‘지금의 쇠고기협상 반대 투쟁을 FTA반대 전선으로 넓혀내라’는 것이다. 겸연쩍은 말이지만 우리는 이 취지의 글을 사실 진작에 썼어야 했다. 속내를 토로하자면 그동안 우리는 이 주제로 논설문 쓰기를 선뜻 엄두내지 못했었다.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이 얼마 전까지 FTA 반대운동을 벌여왔기 때문에 뻔히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더 머뭇거린 까닭은 ‘그 말을 과연 누가 화답해 줄까’ 심드렁했던 것이다.

 예전의 민중운동 투쟁전선체 ‘민중연대’가 ‘한국진보연대’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새 부대’가 예전의 부대만큼도 대중투쟁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진보연대는 FTA반대투쟁을 적당한 수준에서 접어버리지 않았느냐, 그리하여 그나마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운동의 열기를 잠재우는 데 오히려 기여(?)한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지우지 못한다. 쇠고기 협상 건에 대한 불만이 민중 사이에 널리 터져 나왔을 때, 한나라당 쪽에서는 “쇠고기 협상과 FTA는 별개의 문제”라고 다급하게 불을 끄는 발언을 했는데 전자가 후자로 발전하는 것을 그들이 두려워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마땅히 그들이 꺼리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민중운동이 나아가야 하거늘, 한국진보연대는 우리의 예상을 깨는 일을 벌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쇠고기협상에 대한 ‘국민 대책회의’ 조직틀을 꾸리는 최소한의 일로 생색만 냈을  뿐, 이 흐름을 ‘FTA 반대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과제와 치열하게 대결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입이 무거워졌던 것인데 그러기는 해도 다시 힘을 내어 글을 쓴다. 우리 운동이 심기일전한다면 관료화된 운동을 타개하기가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0대, 어린 이들이 앞장서 집권세력의 기세를 꺾어놓음으로써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우리에게 다시 분발할 것을 채근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운동성이 있는 주체들이라면 이가 없어도 잇몸으로 먹을 일이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한국진보연대)는 멀찍이 밀쳐 두고 스스로 주체로 나설 일이다.

 

                     협소한 논리를 넘어서라

 

 본디 쇠고기 협상문제는 노동자 민중운동에게 FTA반대 싸움의 한 계기였다. “개방은 이런 결과까지도 낳는다! 그러니 개방을 반대하자!” 그러니 쇠고기반대 정국으로 다소 여유를 얻었다면1) 그 싸움으로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여지껏 민중운동이 보여온 약간의 편향을 조심할 필요는 있다. 이를테면 굴욕적인 쇠고기 협상 결과를 ‘반미’ 선동으로 곧바로 몰고 간다든지, 대중의 심리와 들어맞는다고 ‘정권 규탄’의 결론만 되뇌다 보면 우리의 사회운동이 ‘원한 풀이’ 차원에 갇히거나 식상한 정치 선전으로 협소해질 수 있다. 

  쇠고기 협상 결과에서 FTA반대의 논거만을 찾아서도 안 된다. 그 의제 자체를 더 추구해야 한다. 대중 가운데는 모든 개방이 아니라 단지 ‘건강’에 대한 관심에서 ‘쇠고기 개방’에 대해서만 불신하는 사람도 많다. 이들에게 다가갈 길은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 깊게 추구하는 길이다. “미친 소와 조류 독감과 아토피... 어느 것이든 맹렬한 이윤 추구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농업, 축산업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물론 농업, 축산업에 관철되는 자본주의 원리를 당장 송두리째 폐기할 수는 없다 해도 그런 문제의식과 생태적 가치의식, 사회변혁의 비전을 북돋는 일은 보이지 않게 중요하다. 단지 ‘전투적 대결’만 골몰할 뿐 아니라 대중에게 근본적 사회변화의 눈을 틔워줄 때라야 혁명적 사회운동이 자라나지 않겠는가.

 

                         자본화, 사회성에 초점을

 

  FTA반대 싸움과 관련해서 ‘민영화’와 ‘공공성’이라는 말을 잠깐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민영화’는 사실 정확한 말도 아니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색칠되기까지 했다. “관료주의는 낡았다. 민간인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이분법 구도의 표현! 그러니 ‘사유화(私有化)’라는 말로 고쳐 불러야 할까? 이 말은 이데올로기 색칠을 벗겨낸 것이기는 하지만, 법적인 측면(즉 소유권)만 주목한 말이라서 담아내는 뜻이 협소하다. “경부대운하 계획은 자본가들이 국토를 사유화(私有化)하려는 속셈에서 나왔다.”고 말할 때에는 정확히 들어맞지만, 이명박 정권이 전기와 물을 자본가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넘겨주려고 하는 속셈을 온전하게 짚어내지는 못한다. 전기와 물의 ‘사유화’는 소유권에 대해서만 짚은 말이다.

 ‘사유화’보다 높고, 그래서 ‘사유화’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자본화’다. 가령 KTX공사는 아직 ‘공사’이므로 사유화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원리 즉 영리 위주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낮은 단계이기는 해도 ‘자본화’된 것이다. 서울대 병원도 마찬가지다. ‘자본화’라는 말은 이렇게 소유권이 자본가에게 넘어가지 않은 경우에도, 운영 방향에 대해서 비판의식을 잃지 말라고 우리를 채근한다. 그러니 이른바 전기의 ‘민영화’는 전기 사업이 자본화(자본주의에 포섭)되었다고 고쳐 말하고, 만일 KTX가 ‘사유화’된다면 이를 “KTX가 한 단계 더 자본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엄중한 표현이 된다. 지금의 KTX 자체가 노동자들을 착취 억압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려면 말이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운동이 ‘반기업 정서를 퍼뜨린다 어쩌구...’ 하고 비난을 일삼아 왔다. 이 말에 ‘그렇다. 어쩔래?’하고 나가는 것도 무모한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 하고 발뺌하는 것은 더 볼품없는 언행이다. 과녁은 정확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반대하지 기업을 반대하지 않는다. ‘자본화’라는 말은 이렇게 우리 운동의 방향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도 긴요하다.

 

 ‘공공성’도 따져보자. 기존의 선전물들에는 “FTA는 그나마 남아 있는 공공성의 영역마저도 허물어버린다. 그러니 반대하자!”고 적혀 있었다. 이는 “자본가의 수중에 넘겨주지만 않으면 된다”는 편리한 통념으로 이어지고, “그렇다면 정부가 운영하기만 하면 만사 OK라는 말이냐? 복지 부동(伏地不動)의 정부에?”하는 자본의 반격을 부른다.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을 함부로 내쫓는 지금의 KTX ‘공사’가, 그 법적인 형태가 우리가 수호할 공공성의 핵심은 아닐 터이다. 우리가 FTA를 반대하는 까닭은 덮어놓고 ‘국가 영역’을 고수하자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생활영역이 ‘상품화, 자본화’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말이다. ‘사회주의로 가자!’는 주장에 담긴 실제 내용은 이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지향은 ‘공공성’보다는 ‘사회성’2) 개념으로 뒷받침할 때 더 단단해진다. 한 사회가 전체 민중의 삶을 온전히 떠맡으려면 소비재와 서비스를 ‘개개인이 알아서 구할 일’로 방임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비재와 사회적 서비스의 비중을 늘려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도 이쯤의 변화는 감당했다. 우리는 단지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넓힐 뿐 아니라 그 방향도 분명히 해야 한다. 탈자본화하고 나아가 탈상품화하라!

  자본가들은 ‘경쟁’이라는 화두도 이데올로기 전장에서 유서 깊은 가문의 보검인양 휘둘러댔다. 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언어도 ‘경쟁 반대’가 아니라 ‘탈-상품화’ ‘탈-자본화’다. 이를테면 이명박의 ‘교육자율화’ 담론에 대해서 “<지나친> 교육 경쟁이 아이들을 짓누른다”는 비판은 옳지만 그렇다고 ‘경쟁을 아예 근절하라’고까지 나가기는 어렵고 그럴 일도 아니다. (교육의) 경쟁 여부가 아니라 (교육의) 상품화, 자본화 여부에서 이데올로기 대결을 벌여야 저들의 입씨름을 격퇴한다.

 

                   지금 싸움을 다시 일으켜야

 

   21일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민주당이 FTA 비준동의를 당론으로 정하기 어렵다면 자유투표의 길이라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번 17대 국회에서 처리할 최종 시한은 23일의 본회의라서 다급한 발언이 나왔다. 그러기 앞서 국회 외교통상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주당 개혁파(?) 김원웅 의원은 당내 기류를 무시하고 ‘상임위에 비준안을 상정하겠다’고 독단으로 밝혀 이명박 정권을 도왔는데 어쩌면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가 ‘FTA 비준’과 관련해 맹렬하게 정치사업을 벌인 것이 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한나라당이 갖은 수를 다 쓴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이삿짐 싸느라 바쁠 시기에 굳이 ‘비준 협조’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FTA 비준은 다음 국회의 일로 넘어가고, 10대가 앞장서 열어낸 ‘쇠고기 정국’이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된다.

  

  그러니 이 시간을 귀하게 써야 한다. 사실상 포기 상태에 빠졌던 FTA 반대투쟁의 의제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 쇠고기 정국이 아직 활력을 띠고 있을 때, 이 열기를 더 큰 싸움으로 높여나갈 길을 찾아야 더 보수화될 다음 국회에 맞설 수 있다.

 그런데 싸움의 목표와 선전의 지향을 높이지 않고서 이 싸움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저 국익 감정에 호소하여 (반제 아닌) ‘반미’ 구호만 되뇌거나, ‘민중 생존권이 짓밟힌다’ “내쫓기는 사람들, 민영화에 따른 물가 인상‘의 좁은 경제주의 논리에 머물러서는 FTA에 왜 치열하게 맞서야 하는지 자신의 조직대중들의 마음조차 움직이기 어렵다. 그렇게 상품화 자본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원리적 자각을 넓혀내야 우리는 ‘개혁개방 불가피론’ ‘선진화의 길’을 설파하는 지배세력과 비로소 사상 이념적으로 대결을 벌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진검 승부가 간절히 요청되는 때다(2008. 5. 21).

                  

 

 

    


1) 집권 직후 이명박 정권이 민중운동을 겨누어 서슬퍼런 태도를 보이다가 근래 다소 주춤거린 것도 쇠고기정국 덕분이다. 그러니 저마다 자기 운동과제에 갇히지 말고 다 함께, 지배세력과 정치적 대결의 전선을 쳐야할 필요성이 막중하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말이다. 

 

2) 쇠고기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청소년들이 ‘같이 살자’고 적힌 피켓을 많이 들고 있었다. 지금의 20대는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아보자’고 개인화되는 경향이 뚜렷했다면 지금의 10대는 ‘그래 봤자 찾아지지 않는다’는 깊은 불안을 이미 어려서 터득한 것 아닌가. 그러니 살 길은 ‘각자 알아서’가 아니라 ‘함께 한 사회를 이뤄야만’ 찾아진다는 깨달음이 넓어져 갈 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