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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투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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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 개혁주의 시대의 종언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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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6-15 15:45 조회2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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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은 뿌리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념적으로 사회민주주의 또는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을 탈피하고 21세기 사회주의 이념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노동자 정치운동은 의회주의·개량주의 정치운동을 탈피하고 혁명적 정치운동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은 조합주의·경제주의·실리주의 노조운동을 탈피하고 계급적변혁지향적 노조운동으로 혁신해야 한다. 이런 대대적인 자기변혁이 없다면 위에서 말한 모든 이야기, 노동운동의 개혁주의 청산과 혁명주의 복원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이런 자기변혁은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들이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태우는 법이다."



개혁주의 시대의 종언과 그 이후

김승호(2023.1.29.)

 

 

1. 개혁주의에서 혁명주의로, 혁명주의에서 개혁주의로, 전환의 전환.

 

필자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1968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하숙집 룸 메이트는 진해 출신의 법대생이었다. 그는 박정희를 지지했다. 나는 박정희에 반대했다. 그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나는 분배가 악화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 차이로 인해 필자는 공부보다 학생운동을 했다.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학교에서 영구제명되고 강제징집되어 군에 입대했다.

군 생활 하는 중인 197210월 유신이 일어났다. 당연히 그것에 반대했다. 제대 말년인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다. 71년 제명되었으나 군에 징집되지 않은 친구들이 다수 이 거사에 가담했다. 그 중 몇몇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시절 이른바 10월 유신으로 성립한 질서에 대해 사람들은 유신체제라고 불렀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은 단순히 정권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학생운동은 이런 반체제 운동을 혁명운동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간혹 변혁운동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 유신 군사파쇼 체제는 197910.26사건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9805.18쿠데타로 계승되었다. 박정희를 대신해서 박정희보다 더 악랄한 전두환 일당이 집권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이 민주회복또는 민주수호를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에 의해 대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노동운동의 일각에도 급진적인 부분이 생겨나고는 있었지만 이념적·실천적으로 대부분 보수야당의 부르주아 개혁주의 운동, 민주화운동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 반유신, 반체제 운동은 미 제국주의가 지지한 5.18 쿠데타에 의하여 처절하게 짓밟혔다. 필자는 이 좌절을 우리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쁘띠부르주아적인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성찰했다. 지하혁명운동을 하던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는 변혁과 혁명을 운동의 목표로 분명히 하지 못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지만 그러했다. 광주민중항쟁이 좌절된 이후 필자는 운동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기층노동계급 속에 들어가 더 철저하게 노동계급화 해야 한다는 것과 낭만적인 개혁주의를 버리고 혁명주의를 노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과 행동은 아니었다. 당시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과 더불어 글로 적어 두었다. 첫 문건이었다. 그리고 1985년 경 안산에서 지하 노동운동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면서 쓴 문건이 개혁이냐 혁명이냐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 당시에는 비슷한 제목의 글(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을 로자 룩셈부르크가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이 즈음 학생운동 안에서 급진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노동운동 안에서도 그런 급진화가 전파됐다. 운동성향이 70년대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학생운동가나 학생출신 운동가들은 대부분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경쟁을 벌였다. BDR NDR PDR NLPDR 등이 그것이었다. 이 노선경쟁은 혁명을 전제로 한 다음에 어떤 혁명을 당면목표로 해서 투쟁할 것이냐를 둘러싼 혁명 전략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민주주의 혁명을 하되 어떤 성격의 민주주의 혁명을 할 것이냐가 쟁점이었다. 물론 그 이념적 준거점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였다. 그리고 이런 급진적 이념과 실천 노선을 가진 운동이 학생운동 속에서 급격히 고양되었고 그 힘으로 전두환 군사파쇼 통치를 물러나게 했다. 그게 19876월항쟁이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의 민주화 이행전략에 따라 군사파쇼가 민간파쇼로 바뀌고 민주화운동의 상층부에게 출세의 기회가 열리자 혁명주의 흐름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조짐은, 85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청학련 사형수가 국회의원에 출마당선되는 등 6월항쟁 이전부터 있었으나, 1987년 대선 때부터 커다란 흐름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선거 후보를 놓고 학생운동과 재야 사회·정치운동은 어느 쪽은 후보단일화로, 어느 쪽은 김대중 비판적 지지로, 또 어느 쪽은 민중후보로 갈라졌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명시적으로 혁명노선을 포기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모두 선거로 혁명한다고 주장하는 선거혁명론을 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선거전에 뛰어든 모두가 혁명노선을 버리고 개혁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전민항쟁을 통한 혁명노선을 견지한 것은 소수였다.

이런 선거주의 움직임은 13김이 겨룬 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어 군사파쇼 통치가 계속됨으로써 호되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그 비판은 분열에 대한 책임추궁이었지 혁명주의의 폐기와 선거주의 노선으로의 전환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다. 이 지점은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한 부분(BDR NLPDR)에서나 백기완을 민중후보로 추대했던 부분(NDR PDR)에서나 차이가 없었다. 직선제를 요구한 876월항쟁과 직선제 대선을 거치면서 혁명주의 노선은 개혁주의 노선으로 대거 전환되어 갔다. 전환된 것이 7년 만에 다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학생운동의 쁘띠부르주아적 불철저성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혁명주의로부터 개혁주의로의 이 재전환은 1991년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가속화되었다. 이번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에 참여하여 한자리 하려는 운동권 상층 출세주의자들의 변신에 그치지 않았다. 변혁과 혁명을 표방하던 운동가들이, 노동운동에서나 학생운동에서나, 혁명적 민족주의에서나 혁명적 사회주의·민주주의에서나, 대거 지배체제에 투항했다. 밀물처럼 혁명운동에 투신했던 쁘띠부르주아 운동가들이 썰물처럼 운동에서 이탈했다. 이런 변절로는 민중당의 지도급 인물들이 1994년 군사파쇼 세력의 결집체인 민자당에 들어간 것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를 했던 쪽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거쳐 재야에서 일하던 활동가들이 1995년 민주당과 97년 대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갔다. 이들처럼 정치권에 한자리 차지할 만한 명망을 가지고 있지 않던 많은 활동가들은 운동에서 이탈하여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가 되거나 사법고시를 거쳐 변호사가 됐다. 그렇지도 못한 전 혁명가들은 기업가가 되거나 대기업의 중간관리자가 되었다. 그밖에 갖가지 형태로 전 혁명가들이 혁명운동을 떠났다. 소련이 무너진 후 5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혁명주의 노선은 포기했지만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을 떠나지는 못한 사람들은 개량·개혁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민주노총을 창립하면서 전노협의 노동해방 기치는 사회개혁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전환에 거의 모든 정파들이 찬성하고 동참했다. 혁명운동 정파들은 이제 경제주의·조합주의 민주노총 안의 계파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또 민주노총이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민주노동당 내의 파벌로 이어졌다. 그 파벌들이 벌인 이전투구의 역사를 이곳에서 세세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파벌, 정영태, 2011 참조) 한편 앞에서 말한 혁명운동에서 이탈한 교수나 변호사들 가운데는 노골적으로 지배계급의 대변인이 된 자도 있었지만 개량주의 운동에 일익이 된 자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의 파수꾼이다. 이런 모습은 일제시기에 3.1혁명으로 사회주의·민족주의 혁명운동이 고양되었으나 민족주의 운동의 많은 부분이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민족개량주의로 변질되었다가 마침내 그마저 청산하고 친일파가 된 우리민족의 흑역사를 다시 보는 듯하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지식인 혁명가들의 변절은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2. 개혁주의 노선은 수명을 다했다.

 

1) 개혁주의 운동 30년은 실패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 선의로 포장돼 있다”(자본론17)

 

혁명주의를 청산한 개혁주의 운동은 문민정부 수립 이후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지배했다. 첫 번째 10년 동안은 개혁주의가 성공할 듯한 환상이 지배했다. 96-97 노개투 총파업을 통해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다. 이로써 합법주의 노선이 현실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뒤이은 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 21’을 만들고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 권영길을 대선 후보로 내세워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일어서라 코리아라는 애국주의 슬로건으로 나선 이 대선운동은 참패했다. 이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2000년 민주노총이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구청장 2명을 비롯해 22명을 당선시키고 8% 정당지지를 얻은 데 이어 2004417대 총선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10여석을 획득했다. 지역구 2, 비례대표 8명이었다. 이로써 노동자 정치운동에서도 개혁주의는 현실성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합법 진보정당이 자리를 잡아 가자 그 동안 전민항쟁 노선을 유지하던 민족해방파에서도 노선을 전환하여 의회주의로 돌아섰다. 20019월 이른바 군자산의 약속이 그것이었다. 이후 이들도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개혁주의 노선은 성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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