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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금속노조 SJM지회 투쟁평가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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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속노조 경기지부 조건준 교… 작성일12-11-30 00:00 조회1,8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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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물리친 노동자 스타일

 

 

금속노조 경기지부 교선부장 조건준

 

긴급소식, 용역깡패 1,000여명 서울집결.

  

7월 26일, 서울에서 몇 사람들과 모임이 있어서 저녁 겸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윤욱동 수석이 전화를 했다. “1,000명의 용역깡패들이 모였다고 해요. 서울에서 빨리 확인 좀 해줘요” 이게 무슨 소린가.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니 용역깡패들이 서울에 모였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인천 한국지엠으로 몰려갈 거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만도로 갈 거라 했다. 경기안산의 SJM으로 가는 것은 분명할 것임을 예감했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국의 수많은 산업현장에 노동조합을 없애기 위해서 직장폐쇄와 함께 용역경비들이 등장해 왔었다. SJM도 오래 전부터 현장에 이상한 기운들이 돌고 있었다. 2010년에는 SJM홀딩스라는 지주회사를 만들어 생산설비 등을 제외한 자산을 갖다 바치고 한국공장은 하청생산공장이 되었다. 이익을 빼돌려 지주회사로 몰아주면서 회장아들에게 2세승계를 준비 하는 상황이었다. 노무관리이사가 바뀌었고 2012년 들어서는 노사합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아웃소싱과 중국산제품을 들여와 납품을 하였고 단체협약을 아예 없애자는 얘기와 다를바 없이 51개의 단체협약개악을 내기도 했다. 이런 조짐들을 주시하며 SJM이 여름휴가를 틈타 직장폐쇄와 용역깡패를 투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왜 용역들이 천명이나 모였다는 것일까. 조합원이 264명인 SJM에는 그렇게 많은 용역들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무슨 일일까? 다음날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평택, 강원도 문막, 전북 익산에 공장이 있는 만도에 갔다.

  

나는 정확하게 예상하지 못했다. 회사가 직장폐쇄를 하면 아마도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7월 28일 토요일 새벽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빨랐다. 용역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확인해 보자는 연락들을 주고받은 후 휴대폰 배터리 전원이 끊겼다.

 

공장을 지키자

 

26일 밤 8시경 서울에서 모인 용역깡패들이 SJM으로 올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금속노조 경기지부는 긴급하게 공장근처의 민주노총 안산지부 사무실에 간부들을 모았다. 밤 9시경 SJM지회간부들도 모였다. 직장폐쇄를 예측하고 있었던 지회간부들은 용역깡패들이 들어오면 현장에서 나와 안정된 공간인 안산 시청 앞에 천막을 치고 장기전을 하자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정든 일터를 쉽게 떠나면 안된다는 의견을 모았다.

  

11시 40분경 간부들은 공장에 들어갔다. 밤 11시 50분경 노조간부들과 선봉대들에게 공장으로 모이도록 긴급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료들과 술을 한잔씩 하는 날이었다. 술자리에서 문자를 받고 한잔하고 잠들었는데 아내가 깨워서 문자를 확인한 간부와 선봉대들은 ‘설마?’ ‘훈련인가?’하는 마음이었지만 통화를 하면서 실제상황이라는 사실을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미 야간조 작업이 끝나 작업복을 벗고 퇴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조합원들이 현장에 모였다. 과연 조합원들은 그냥 퇴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공장을 지키는 것을 선택할까, 공장을 비워두면 용역깡패들이 공장을 장악하고 노동자들은 공장 밖을 떠돌아야 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행여나 용역깡패들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수 있다.

  

차분하게 현장에 모인 조합원에게 김영호 지회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박선심 조합원이 일어서서 의견을 말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집에 가냐. 공장을 지키자”고 했다. 퇴근준비를 했던 조합원들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의견을 모았다.

  

금속노조 조합원이자 변호사인 육대웅이 직장폐쇄에 대한 간단한 법률적 설명을 마쳤다. 조합원들은 다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컵라면으로 야식도 하고 일부 조합원들은 순찰조가 되어 용역들이 모이거나 이동할 장소를 확인하기로 했다. 조별 토론을 하고 정문과 후문을 나누어 비무장으로 공장을 지키기로 했다. 용역깡패가 들어온다면 몸으로 막아서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조합원들은 섬뜩한 폭력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직 알 수 없었다.

  

 

야만의 2시간

 

새벽 3시 20분경, 안산의 화랑유원지에 용역깡패를 실은 버스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4시 20분경 용역깡패를 실은 버스가 후문에 도착했다. 40분이 좀 지나자 용역들은 회사로 진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맨몸이었다. 당장 용역들이 들이닥치자 주변의 소화기를 뿌리며 막아섰다. 좁은 후문으로 들어오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노무관리자인 민흥기 이사와 용역들은 정문으로 향했다. 조합원들은 투구와 방패, 곤봉으로 무장한 용역들을 막을 순 없었다. 5시 5분경 정문에서 밀려난 조합원들은 공장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용역깡패들은 회사 마당을 점령했다. 이어서 그들은 공장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기껏해야 소화기를 뿌리며 저항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찍히고 맞은 부상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5시 30분경 전투경찰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돌멩이 하나라도 던지면 끝까지 추적, 발본색원을 외치던 경찰은 그랬다. 노동자의 폭력은 ‘폭도의 범죄’지만 기업권력과 용역폭력은 ‘그냥 아무 일도 아니’었다. 어둠속에서 집단적으로 살인적 무기를 던지며 어떤 퇴로도 없이 죽일 듯 폭력이 가해지는 순간 공권력은 폭력을 방치하고 비호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다친다며 하소연하는 부인의 호소에도 침묵했다. 폭행당하던 조합원들이 창문을 열고 “살려 달라”고 외쳐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족과 조합원들이 긴급신고를 했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6시15분경 다시 용역깡패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장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그들은 곤봉과 방패로 내려치고 찍고 공장안에 놓인 묵중한 쇳덩이 제품들을 무차별적으로 던졌다. 여기저기서 머리가 터지고 찢기고 부러지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조합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엇이든 집어던졌다. “사람이 다친다. 던지지 말라”는 외침에도 어두컴컴한 공장안에 진입한 그들은 폭력의 야수처럼 거침없는 야만을 던졌다. 밀리는 조합원들은 공장안 2층 계단으로 도망치면서 날아오는 쇳덩이의 굉음과 맞은 조합원들의 비명과 핏속에서 죽음의 섬뜩한 공포를 안고 2층의 구석으로 몰렸다. ‘뛰어내려야 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2층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어둠속에서 생명을 위해 뛰어 내리다가 골반뼈가 부러지고 허리를 다친 중상자도 발생했다. ‘야만의 새벽’은 그렇게 우리를 거침없이 짓눌러 왔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분노의 새벽

 

야만의 2시간이 지난 6시 40분경, 조합원들은 공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난자당한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겨를도 없던 부상 조합원들의 핏자국은 아침햇살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조합원, 금속노조 경기지부 노동자, 인근지역 노동자들은 동료들이 짐승처럼 폭행당한 현장을 몸서리치는 분노로 목격하였다. 다급하게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와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공장밖에 서 있는 경찰을 향한 분노들이 쏟아졌다. 그들을 향해 “개새끼”라는 욕은 너무나 점잖은 인사였다.

  

‘아, 용산에서, 쌍용차에서, 경주의 발레오에서, 대구의 상신브레이크에서, 구미의 kec에서, 충청의 유성에서, 경기의 장기투쟁 노동자와 전국의 비정규직들이....그렇게 당해온 폭력에 또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 순간 만약 어떤 무기라도 있다면 망설임 없이 회사와 용역깡패를 향한 살의(殺意)를 휘두르고픈 충동이 솟아올랐다.

  

‘상황을 빨리 정리하자.’ 냉정해야 했다. 보도자료를 만들어 급한대로 뿌리고 조합원들이 채증한 영상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폭력이 무기였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는 우리의 눈과 귀가 경험한 그대로 세상이 똑 같은 감각으로 이 야만을 보게 하는 것이다. 사진기, 캠코더, 휴대폰 촬영으로 우리는 무장되어 있었다.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영상과 사진이 우리의 무기였다.

  

여기저기 언론들에서 문의와 취재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자발적으로 용역들의 지난 행적을 추적하면서 알려오기도 했다. 컨택터스라는 민간군사기업의 실체에 대한 신상털기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에스제이엠 노동자 손범국은 야만의 새벽이 지난 직후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15년 만에 알았다. 내가 생산한 제품이 자동차 말고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2층 높이 좁은 통로에 있는 노동자를 맞춰 쓰러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만든 제품이 내 머리에 내 동료의 가슴으로 날아 왔다. 내 동료의 노동의 댓가를 통해 발생된 이익은 용역깡패를 불러들이는데 사용되었다. 동주형은 내가 만든 제품에 맞아 관내 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 하여 인근 도청소재지 종합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내 동료는 왜 15년간 노동했던 이곳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가!”

‘야만의 새벽’을 만든 회사는 ‘공포의 새벽’을 기대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공포에 질려 회사에 매달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민주노조를 포기하고 고분고분 고개 숙이는 노예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그 새벽을 “분노의 새벽”으로 가슴에 새기기 시작했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우린 그 두 시간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태도와 자세

 

맘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기며 움직였다. ‘태세, 태세, 태도와 자세’ 그렇다. 이 사건을 접하는 나의 태도와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 것인가. 제일 먼저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끝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용산에서 앗아간 목숨들, 쌍용차에서 떨어진 생명들, 수많은 생산현장에서 벌어진 야만적 폭력들이 겹겹이 쌓아 놓은 상처와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 여기서 또 맥없이 당한다면 더 확장된 폭력들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전국에서 노동자가 정리해고에 반대하면 공권력의 이름으로 밟았다. 저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떻게든 해고되지 않으려 동료를 외면하고 일자리를 지키려는 ‘의자놀이’가 벌어졌다. 그 참담한 현실 그대로 ‘개 밥그릇 싸움’에 밀려온 세월들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라는 절박한 심정이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에스제이엠 노조간부들은 물론 전직 노조간부들의 상당수가 부상당했다. 예전의 간부라고 뒤로 빠져 있지 않았다. 맨 앞에 서서 야만에 온 몸으로 맞섰다. 조합원들 속에 신뢰와 단결을 가져온 힘이 되고 있었다. “아니지, 그래도 이건 아니야” 25년 근무 끝에 정년퇴직을 몇 달 앞둔 고참 노동자도 회사의 폭력을 경험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야 좀 있으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이런 회사를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면서 함께 했다.

  

“만약 여기서 또 굴복할거라면 차라리 이놈의 노조를 때려 치자. 무슨 낯짝으로 노조를 한단 말인가. 여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들이 무참히 짓밟히는 이 야만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시작하지도 말자”

SJM의 조합원과 간부들, 경기지부의 간부들은 바로 이 ‘태세’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 여기에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상을 바꾼 대응

 

27일 사건 직후, 수 년 동안 수없는 폭력에 시달려온 전국의 금속노조 간부들은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달려와 SJM에 모였다. 부산에서 경주에서 전라도에서 새벽같이 달려왔다. 노조에서는 손장갑과 마스크를 지참하라고 했다. 그것은 한판 전투를 한다는 뜻이었다.

  

금속노조 집회는 폭력에 대한 규탄과 분노, 결의를 담은 연설들로 이어졌다. 그리고 난 다음, 자연스런 것은 용역깡패를 공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다시 공장으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분노에 쌓인 노동자들이 저 야만스런 자들을 향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특히 용역폭력과 직장폐쇄로 당한 경험을 가진 노동자들은 “쳐들어 가자”면서 적극적 행동을 촉구했다.

  

하지만 준비한 손장갑과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약간의 술렁임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분노로 달려왔던 노동자들은 행동으로 그것을 표현하지 못했다. “야만적 폭력에 즉각 반격을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한 불만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산업현장 폭력들이 이어질 때, 노조의 지침에 따라 잠깐 왔다가 외치고 돌아가면 당사자들만 덩그렇게 남았다. 지금 당장 공장에 밀고 들어간들 저들은 노조폭력을 부풀리고 이제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진압작전을 펼치지 않겠는가. 공장은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일터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팔아 먹고사는 노동자들에게 직장을 폐쇄하는 순간 임금은 없다. 당장 생계에 문제가 생긴다. 이 때문에 직장폐쇄를 당하면 공장을 둘러싼 쟁탈전처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물리적 힘으로 용역깡패를 몰아내고 공장을 빼앗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혹 노동자들이 공장을 힘으로 뺏는다고 해도 그 다음은 불법침입이라는 이유로 경찰들이 진압한다.

  

2009년 쌍차에서는 노동자들은 77일간이나 버텼지만 경찰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진압작전을 폈다. 저들은 농성하는 노동자를 고립시켰다. 해고자와 비해고자를 ‘죽은자’와 ‘산자’로 갈라 쳤다. 관리자들과 산자들은 “파업농성자들 때문에 회사가 진짜로 망한다”는 주장에 빠져 적이 되었다. 언론에서는 파업농성자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면서 공격했다. 싸우는 노동자들은 폭력진압과 분열과 고립감에 시달려야 했다.

  

SJM의 상황은 달랐다. 저들은 불법과 폭력으로 노동자의 일터를 강탈해 갔다. 조합원들은 분노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저들의 야만을 고발하면서 사회적으로 그들을 고립시켜야 했다. 폭력을 사주한 경영진과 관리자, 용역깡패에 의해서만 공장을 지킬 수 있는 저들은 실패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국가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권력’이라 부른다. 하지만 에스제이엠에서 경찰은 폭력을 비호하고 방조했다. ‘공권력’이 아니라 ‘기업을 위한 권력’일 뿐이었다. 경찰은 사회적으로 비판받았고 단원경찰서장은 잘렸다. 그들은 명분을 잃었고 무력화 되었다.

  

기업권력이 설치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단지 공장이라는 공간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폭력, 불법, 용역과 경찰의 무력, 여론 등 이 사건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하나씩 노동자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저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장탈환을 둘러싼 전투가 아니라 광폭(廣幅)행보였다. 분노로 뭉친 조합원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키우는 것, 명분과 정당성을 잃지 않는 것, 법적으로 이기는 것, 여론과 정치적으로도 승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금속노조 경기지부는 이러한 대응을 “역(逆)포위 전략”이라고 표현했다.

  

 

승리는 내 손에 있다.

 

“잘 싸웠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7월 28일 현장 소식지의 제목이다. 비무장으로 단호하게 맞선 우리는 저들의 야만성을 드러낸 것에서부터 자부심을 갖추기 시작했다. 40명이 넘는 부상자들의 아픔이 있었지만 그 분노와 함께 자부심을 공유하고자 했다.

  

에스제이엠 노동자들은 폭력에 굴하지 않는 준비된 투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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