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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투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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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세 | ‘3.1혁명’이 ‘3.1운동’이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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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3-02 09:48 조회2,6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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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이 ‘3.1운동’이 된 사연

출처 : http://blog.daum.net/happydocs/7480867, 해피닥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지금 자주독립의 조국을 재건함에 있어서...”
 

제헌의회 본회의에 보고된 헌법기초안의 전문(前文) 도입부입니다. 보신 바와 같이 초안에 ‘3.1혁명’으로 기재돼있으나, 이후 토의를 거쳐 제헌헌법에는 ‘3.1운동’으로 변경이 돼서 기재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슨 반민족적인 의도로 변경된 것은 아닐까? 이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3.1혁명’이라는 말은 이 초안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3.1혁명’보다 ‘3.1운동’이라는 표현이 친숙합니다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계획으로 1941년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밝힌 1919년 3.1독립선언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경계하여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이 3·1헌전(憲典)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 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강조 필자)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것은 군주제와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제도를 향한 혁명이고, 그 기원에 3.1독립선언이 있다고 <건국강령>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독립선언’을 ‘헌전(憲典)’이라고 표현했다고 봅니다. 이는 3.1독립선언 이후 건국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라는 제1조를 포함해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규정한 임시헌법을 선포하고, 이를 수호하며 독립운동을 진행했음을 볼 때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1919년 3.1 독립선언을 한 차례의 사건(물론 3.1만세운동은 국내외적으로 1년여에 걸쳐 일어났다는 사실도 간과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이 아니라 이후 한민족이 독립, 자유, 평등을 쟁취하는 ‘혁명’의 시작으로 여기는 것은 임정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것입니다.

 


이는 1943년 당시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가 3월1일을 맞이해 발표한 글의 제목이 <석(釋) 3.1혁명정신>인 것을 봐도 확인이 됩니다. 백범은 “마땅히 분발하고 가일층 노력하여 3.1운동을 완성함으로써 미완의 혁명대업을 완수해야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3.1독립선언의 의미를 더욱 확대시킵니다.

 

“3.1대혁명은 한국민족 부흥을 위한 재생적 운동이다. 달리 말해 이 운동은 단순히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이 5천년 이래로 갈고 닦아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을 드높이자는 것이다”

 


백범은 ‘3.1독립선언’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의 차원을 넘은, 한민족 안에 있던 ‘정기’와 ‘의식’을 새롭게 살리는 운동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1대혁명’이라고 명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얘기하는 ‘3.1대혁명’의 기본정신은 즉 5천년 이래로 갈고닦은 민족정신 네 가지는 ‘자존(自存)과 공존(共存)정신’, ‘민주와 단결정신’, ‘기개와 절의(節義) 및 도의(道義) 정신’, ‘자신감과 자존(自尊)정신’입니다. 이 같은 민족정신이 ‘3.1대혁명 중에 최고조로 발양되었다’라고 백범은 3.1절 24주년이 되는 해에 동포들에게 고하며, 이를 계승, 발양(發揚)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3.1독립선언과 그 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군주제와 제국주의를 지양한 독립민주국가를 향한 출발’이라는 <건국강령>식의 ‘혁명’으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5천년 이래 갈고 닦아온 민족정기와 의식을 드높이는’ 의미의 ‘대혁명’으로 파악할 것인지는 또 다른 논의거리가 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그냥 ‘3.1운동’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뭔가 명실상부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헌의회 본회의에 보고된 헌법기초안은 대한민국임시헌법을 참고로 해서 만들어진 헌법이기도 하고, 기초안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이미 당시 주도적인 정치세력의 입김이 작용한 안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미 ‘3.1혁명’으로 기술이 돼있었는데, 왜 ‘3.1운동’으로 바뀌었을까? 궁금증을 갖고 속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친일파 세력이 뭔가 구려서 뒤틀었나?’,


‘반공세력이 ’혁명‘이라는 말에 두드러기 반응을 보여서 바꾼 것일까?’

 


관련된 논의는 제2독회에서 처음 나옵니다. 제1조에 대한 논의를 하려하자 당시 국회의장 이승만이 전문(前文)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며, ‘3.1혁명’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고, 심지어 바른말을 했더군요.

 


“지금 미국사람들이 구라파나 아세아에 자기네의 민주주의라는 것을 펴자고 하는 것이 오늘의 정세입니다. (중략) 조선에 와서도 미국은 민주주의원칙에 의하여 자기네가 세워 주겠다고 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우리 헌법에 작정할 생각이 있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라면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3.1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재건을 하기로 함」이라는 문구를 헌법 전문에 넣자고 제의합니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3.1혁명의 사실을 발포하여 역사상에 남기도록 하면 민주주의라는 오늘에 있어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싸워가지고 입때 진력해 오던 것이라 하는 것을 우리와 이후의 우리 동포들이 알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341쪽) 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승만의 이 발언을, 자신이 과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바도 있고, 곧 재건될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 되고자하기에, 자신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못박아두고자 한 계산된 발언이라고 폄하할 분도 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근원을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투쟁에서 찾고자 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자 하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미국이 갖다 준 것이다’ 운운 하는 분들은 이승만의 위의 발언을 가슴깊이 새겼으면 하는 바람도 듭니다.

 


여하튼 이승만의 발언은,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윤치영(일제시대부터 전두환 정권 때까지 권력을 누리며, 게다가 98세까지 잘 드시고 잘 사셨던 인물)이 이승만의 발언대로 수정안을 냅니다. 그런데 조국현 의원이 이의를 제기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혁명’자를 빼자고 합니다. (조국현은 광복 후 호남에서 결성된 유림단체인 대성회 소속으로 전남 화순에서 당선된 인물로 다른 이력은 잘 모르겠습니다)

 


“3.1민족운동이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유인(裕仁,히로히토)정권 밑에서 제도를 고치자는 혁명이 아닙니다. 대한이 일본에게 뺏겼던 그 놈을 광구(匡救)하자는 운동인 만큼 혁명은 아닙니다. ‘항쟁’이라고 할지언정 혁명은 아니요. 혁명은 국내적 일이라는 게 혁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태조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것이 혁명이고, 갑오의 운동이 혁명운동이고 우리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기다가 ‘혁명’을 쓴다면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 ‘혁명’글자를 변경해서 ‘항쟁’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650쪽)

 


이에 윤치영은 좋겠다고 하고 더 좋은 게 있으면 수정해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로 이승만이 발언을 합니다.

 


“혁명이라는 것이 옳은 문구가 아니라는 말씀을 내가 절대로 찬성합니다. 혁명이라면 우리나라 정부를 번복(飜覆)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에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은 혁명이라는 게 그릇된 말인데 ‘항쟁’이라는 말은 좋으나 거기다 좀더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이라고 그러면 어떱니까?” (651쪽)

 


그러자 윤치영은 ‘광복’으로 고치면 어떻겠냐고 하고, 이어서 조헌영 의원은 ‘그냥 3.1운동’으로 하자고 합니다. (조헌영은 일제강점기 신간회 활동을 했고, 우리나라 한의학 기초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 민족주의자이자 한의학자로 한민당 소속으로 제헌의원에 당선됐고, 반민특위 위원이 된 후는 한민당을 떠났고, 한국전쟁 중 납북돼 북한의 한의학을 발전시키고 김일성의 한방주치의로도 활동했다고 합니다. 시인 조지훈이 그의 아들이라는군요)

 


결국 백관수, 김준연, 조국현, 이종린, 윤치영 5인을 선정해 전문을 손보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3.1운동’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실리게 되고, 현재의 헌법까지 그 표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때부터 ‘3.1혁명’이라는 표현도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낯선 표현이 되었고...

 


제헌의회에서 ‘3.1혁명’이 ‘항쟁’,‘광복’ 과 ‘독립운동’을 거쳐 그냥 ‘3.1운동’으로 바뀐 것이 어떤 시나리오에 의해서 또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과민반응을 보여 그렇게 된 것으로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건국강령>을 기초했던 조소앙이나 <석(釋) 3.1혁명정신>을 썼던 김구가 제헌의원으로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무래도 제헌의회에서 ‘3.1혁명’을 ‘3.1운동’으로 바뀐 것은 ‘3.1운동’의 의미를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으로만 파악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1919년 3월1일 이후 만들어진 한성, 상해, 러시아령의 임시정부에서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헌법 제1조로 정했던 사실. 해방 후 그 혼란 속에서도 군주파-공화파의 갈등도 없고, 왕정복고의 주장은 더더욱 없고, 좌우파를 막론하고 ‘민주공화제’말고 다른 정체를 얘기한 정치집단이 없었던 그 역사적 사실은 한민족이 수천년동안 왕 밑에서 살았고, 수십년간 천황 밑에서 살았던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그냥 쉽게 생각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서희경은 <대한민국 건국헌법의 역사적 기원(1898-1919)>(2005)에서 「‘민주공화국’,‘국민주권’과 ‘권력분립’이라는 근대 입헌주의의 핵심원리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된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이루어졌던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장기간에 걸친 한국의 헌법혁명의 역사적 진화로부터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답을 합니다. 이는 박명림 교수가 <한국의 초기 헌정체제와 민주주의 : ‘혼합정부’와 ‘사회적 시장경제’를 중심으로>(2003)라는 논문에서 1948년 건국헌법이 “근대헌정체제를 등장시키기 위한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헌법혁명의 귀결의 의미를 갖는다”고한 연구결과에 기댄 결론입니다.

 


서희경은 같은 논문에서 “건국헌법이 소수의 권력자와 권력집단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점이 너무 과도하게 인식되어, 건국헌법 제정이 장기간에 걸친 집단적 의사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라고 도전적이면서도 선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훨씬 앞서, 1910년대에 발표된 총 61개의 독립선언서를 분석한 김소진은 <한국독립선언서연구>(1998)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민주공화정체 지향이 “갑오개혁 이후 독립협회를 거쳐 신민회에 이르는 동안 발전하여온 내재적인 이념의 변화”라고 연구 발표한 바 있습니다.

 


동학과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그리고 신민회에 참여했거나 그 영향을 받았던 애국계몽운동세력이 훗날 3.1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의 주도세력이고, 그 이후 독립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한다면 위 연구자들의 결론은 진실에 가깝다고 저는 생각하고, 그렇기에 ‘3.1운동’이어서는 안되고 당연히 ‘3.1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헌헌법에 새겨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주권재민의 조항 그리고 각종 국민의 권리 조항들, 권력분립의 정신은 결코 ‘공짜’로 또는 ‘미국이 갖다 준 것’이 아니라 한민족 인민들이 수십년에 걸쳐 수많은 피와 땀을 흘린 끝에 쟁취한 ‘헌법혁명’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1950년 5월30일 제2대 총선에서 제헌의원 84.5%를 갈아치우면서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을 참패시키며 남북협상과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세력을 대거 당선시켰던 민심, 비록 임정에서 활동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시절 권력을 휘두르며 친일파를 비호하고 반민주적 행태를 보였던 조병옥과 남한 단독정부를 거부해 1대 총선에 참여 안했던 ‘3.1혁명’의 적자(嫡子) 조소앙과의 대결에서 조소앙을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시켰던 그 민심(조소앙 34,035 : 조봉암 13,498) 그리고 결국 1960년 4.19혁명으로 독재자들에게 ‘주권재민’을 확인시켰던 그 민심, 그리고 그 이후 ‘민주공화국’ 정신을 드높인 그 숱한 민주화 투쟁은 1948년 제헌헌법이 결코 ‘공짜’ 또는 ‘수입’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확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헌의회에서 잃어버렸던 ‘3.1혁명’ 표현. 그 승리한 혁명의 자랑스런 표현을 이제는 되찾아 일제강점기 시절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하다 이름 없이, 무덤 없이 돌아가신 수많은 분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해드리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다음 편은 <‘인민’이냐, ‘국민’이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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