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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 격변기 노동·민중운동의 세계관, 이념, 전략 (2) :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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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2-15 12:47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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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 노동·민중운동의 세계관, 이념, 전략 (2) 

 

김승호(헬조선변혁 전국추진위 지도위원)

(2024년 1월 28일 정세강연 원고)

 

 

3. 세계관

 

 지금의 격변기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차원에서 격변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면, 이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동자·민중은, 그리고 노동자·민중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노동·민중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자·민중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노동·민중운동에 대해서 총체적이고 근본적으로 되짚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지난 30여 년 동안 지구촌 사람들의 대다수는, 특히 선진자본주의 권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회운동가들은 “역사는 끝났다”는 일본계 미국인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말을 신조로 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식자들과 운동가들에게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소련이 붕괴했다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렇게 태도를 돌변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들 대다수는 사회운동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의 일상이나 출세를 추구했다. 사회운동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좌파든 우파든, 조합주의자든 정치주의자든, 대부분 혁명과 변혁을 포기하고 개량과 개혁을 추구하며 체제내화 되었다. 그들은 ‘민주·진보개혁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개량·개혁주의가 사회운동의 철학이 되고 세계관이 되고 사상이 되었다. 체제내화 한 이 개량·개혁주의 세계관을 극복하지 않는 한 노동·민중운동은 현 시대의 요구에 복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관이라고 하면 사회주의냐 사회민주주의냐 하는 구별법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구별은 실은 세계관 차원의 구별은 아니고 그것의 하위에 있는 이념 차원의 구별이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세계관 차원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우주의 발생과 변화에 대한 관점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인간과 사회와 역사 대한 관점, 인간·사회·역사관이다! 이 짧은 강연에서 그것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없으므로 알맹이만 말하면 이렇다. 인간의 역사는 신이 만드는가, 인간 자신이 만드는가? 전자는 관념론의 관점이고 후자는 ‘참다운 유물론’의 관점이다. 역사는 신이 만들지는 않지만 인간이 아닌 물질의 자기운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기계적·관조적 유물론이다. 또는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것 같지만 실은 역사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와 같은 어떤 구조의 결정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참다운 유물론을 왜곡한 구조주의적 유물론이다. 또 인간의 역사는 인간 자신이 만들지만 점진적 변화를 통해서 만드는가 아니면 혁명적 변화를 통해서 만드는가? 전자는 개량주의 세계관이며 후자는 혁명주의 인간·사회·역사관이다. 사회주의자 안에도 개량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있으며 민주주의자 안에도 혁명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있다. 우리는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다만 백지 상태에서 그림 그리는 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전 세대들로부터 물려받은 상황 속에서 만든다; 그때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객관적 조건을 변혁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모습도 변혁하며, 그런 두 가지 변혁의 동시발생은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마르크스의 ‘혁명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수용한다. 지금과 같은 역사적 격변기에는 참다운 노동·민중운동이라면 이런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격변하는 상황을 맞이해야 할 것이며, 이런 기준으로 각종 비과학적 세계관들을 비판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첫째 종교적 세계관이다.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 가운데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그 말에 진리가 포함되어 있음도 엄연한 사실이다. 어쨌건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신이 만든다고 믿느냐 인간 자신이 만든다고 믿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라면 회피할 수 없는 근본적 질문이다. 전자는 봉건영주가 지배하던 전근대 시대의 세계관이다. 후자는 노동계급이 역사무대에 등장하는 현대의 세계관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1668~1744)는 18세기 전반 인본주의가 고양되던 시대에 사회는 유기체적인 존재이고 사회의 변화·발전인 역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다고 갈파했다. 이것은 어쩌면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코페르니쿠스적인 세계관에서의 변혁이다. 지배계급은 신을 믿는 종교를 무기로 삼아 피지배 민중의 각성과 해방에 장애물을 놓아 왔다. 종교는 국가와 함께 계급사회인 사회구성체의 상부구조, 토대인 계급사회에 조응하는 상부구조가 된다. 따라서 해당 사회가 계급사회인 한 종교는 지배계급의 도구로 작용한다. (단, 사회구성체의 이행기에는 때로 혁명과 변혁에 복무하는 사상적 무기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영국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은 농노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가까운 예로 바티칸 가톨릭 교황청은 1980년대에 중남미에 활발했던 해방신학을 탄핵했다. 중남미 출신 프란치스코 로마 교황도 마르크스주의 정치적, 경제적 철학에 반대한다.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해서 평화주의적·양비론적 태도를 취한다. 그는 “전쟁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죽음과 파괴를 낳고 증오와 복수를 배가시켜 미래를 없앤다.”고 하면서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두 국가 해법’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결국 미·이스라엘의 침략전쟁을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미-이스라엘의 범죄를 덮어주면서, 비현실적이고 정당성 없는 해법을 근본적 해법으로 호도한다. 한국의 가톨릭 정의구현사제단의 입장은 무엇인가? 개신교는 어떤가? 그들은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주의를 넘어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간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세계관에 찬동하는가? 인류가 계급지배로부터 해방되면 종교가 점차 사라질 터이며, 따라서 그 이전에 굳이 종교 자체를 반대하고 나설 이유는 없지만, 종교세력이 벌이는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선의의 발로로만 바라보지 말고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종교세력의 사회운동은, 비록 유물론은 아닐지라도, 인간이 혁명과 변혁을 통해 스스로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만든다는 혁명적 세계관에 동의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긍정성 여부가 평가되어야 한다. 반혁명 세력의 온상인 보수적 종교집단에 대해서 뿐 아니라 진보를 자임하는 종교계의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종교와 같은 관념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유물론적 세계관이지만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닌 유물론의 세계관이다. 이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세계관에서는 인간과 사회는 기계와 같이 한번 만들어지면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동일한 모습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만물은 유전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적 관점과 확연하게 대비된다.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이 대체로 이에 해당한다. (물론, 한국의 자본가들 안에는 신을 믿는 사람이 많다! 또 유대교를 믿는 유대 금융자본을 보라!) 그들의 세계관은 유물론적일지라도 비변증법적, 형이상학적이다. 이들은 현존 자본주의 사회질서가 초역사적으로 영원한 것이라고 믿으며, 이 거짓 믿음을 퍼뜨린다. 그런데 한국 노동·민중운동 안에는 이런 자본가계급의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지닌 자유주의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현 단계에서 자유주의 가치와 질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자유가 인류의,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보편적 가치이며 자유주의 질서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보편적 질서라고 주장한다. 이 세계관은 신이 인간의 역사를 만든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결국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아니 이들에게는 아예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포이에르바하가 유물론자인 한 그에게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 마르크스의 말을 연상시킨다. 
 

 한국 노동자·민중 속에, 그리고 노동·민중운동 안에 이런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은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식민지적·파쇼적 질서 아래 있어 온 데 따른 결과이기는 하다. 반파쇼 민주화 운동은 굳이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아니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할 때 대중성을 확보하기 쉬웠다. 반미자주화·통일운동 역시 한국의 현실에서 노동계급의 이념인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하기보다 초계급적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할 때 더 큰 대중성을 가질 수 있었다. 즉 대학생, 농민, 화이트칼라 등 중간층의 지지를 받기 쉬웠다. 그리하여 대중성이라는 이유 하에 민족민주운동은 자본가계급의 정치를 수용하고, 그들의 이념을 수용하고, 그들의 세계관을 수용하게 되었다. 또 그런 자본가계급 세계관의 수용이, 자본가계급 이념 수용을 낳고, 나아가 자본가계급 정치의 수용을 낳았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급속히 자본주의화 하여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에서 노동자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한국의 노동·민중운동은 생각도 행동도 여전히 낡은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의 노동·민중운동은 한국 자본주의가 개발도상국 단계를 넘어 선진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고도로 발전한 지금도 여전히 남한 지배계급의 정치적 대리인인 자유민주주의 정당(얼마 전 북한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를 표방하는”)의 주요 지지기반이다. 현 노동·민중운동과 자본가계급 정치의 그런 친근성은 노동·민중운동이 기층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기득권 노동자(이들을 선진자본주의 노동운동에서는 ‘노동귀족’이라 불렀다!)와 민중을 대변하는 데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세계관과 이념 차원에서 공통성이 굳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민중운동 안의 이른바 국민파 흐름이 전형적으로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이들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지닌 노동·민중운동은 또 종교세력의 사회운동과도 친화적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가진 노동·민중운동이 종교세력의 사회운동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혁명과 변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세계관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셋째, ‘개량주의 유물론’의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참다운 유물론에 속한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정지되어 있다, 반복하기만 한다고 보지 않고 변화하고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세계관과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진보가 노동자·민중의 실천과 투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는 점에서 실천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얼핏 보면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한 ‘실천적 유물론’의 세계관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이들은 뒤에서 살펴볼 이른바 좌파의 구조주의적 유물론과 구별된다. 구조주의에서는 사회구조 스스로의 작용에 의해 사회·역사가 변혁된다고 보는 반면, 이 개량주의 유물론은 노동자·민중의 실천·투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역사가 혁명과 변혁을 통해 만들어지며,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사회체제도 변혁되고 인간 자신도 변혁된다는 ‘혁명적 유물론’의 세계관은 부정한다. 이들은 사회역사가 진보하지만 사회개량·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질적으로가 아니라 양적으로, 진보할 뿐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가진 운동은 급진적 변화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과는 반대로 혁명과 변혁이라는 급진적 변화과정이 없이는 의미 있는 진보, 획기적인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니 점진적, 양적 진보의 성과조차 지켜내지 못한다. 이 점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오늘날의 노동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 “나 다니엘 브레이크” 등을 보라. 복지국가의 원조 영국에 복지국가는 없다! 이 세계관은 선진 자본주의 권역의 노동운동이 이들 나라의 자본가계급이 제국주의 착취·수탈로 얻은 이윤의 일부를 노동자들에게 던져주는 데 포섭됨으로써 생겨났다. 이 세계관의 이론적 원조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 제국주의 단계에 이른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베른슈타인이다. 그리고 카우츠키를 비롯한 제국주의 나라 마르크스주의자의 많은 부분이 베른슈타인 쪽으로 넘어갔다. 이 실천적이지만 개량적인 유물론의 세계관은 현실에서 근대적 세계관(형이상학적 유물론)을 계승·혁신한 마르크스의 ‘실천적·혁명적 유물론’의 세계관과 날카롭게 대립해 왔다. 
 

 넷째, 구조주의적 유물론의 세계관이다. 노동·민중운동 가운데 이른바 좌파라고 자칭하는 부분들 안에서 인간이 역사를 만들지 않고 ‘구조’와 같은 어떤 신비한 힘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세계관을 가진 조류가 있다. 그런 세계관이 이른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들은 복잡하고 그럴듯한 이론으로 이런 세계관을 만들고 전파한다. 그런 사상·이론을 만들고 퍼뜨린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사람 루이 알튀세이다. 이 세계관은 “역사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역사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인간해방을 향해 전진하는 진보적 과정이라는 관점을 근대적인 세계관이라고 폄하한다. 이런 관점은 근대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조류와 친화적이다. 이 구조주의 세계관은 노동자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개조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전진시키려는 혁명적·변혁적 실천에 대한 허무주의를 주장한다. 이렇게 인간의 실천에 대한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유물론과 친화적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칭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이행은 노동자·민중이 주체가 된 계급투쟁과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구조 스스로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즉 우주에 자연법칙이 관철되듯이 사회의 역사에서에서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인간의 주체적 실천과는 독립적으로, 생산양식의 교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세계관을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충실한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현학적 교의는 물질적 실천(노동과 계급투쟁)에서 독립한 채 강단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행세하는 지식인들, 자칭 ‘이론적 실천가’들의 입맛에 아주 맞아떨어진다. 이 세계관의 창시자인 알튀세의 고안물인 ‘이론적 실천’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을 암시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이론적 실천’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한 말을 환기시키고 싶다.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유도하는 모든 신비는 인간적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파악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이 구조주의적 교의는 비계급적·비혁명적 활동에 매몰되어 있는 경제주의·조합주의 활동가들에게도 호소력이 있다. 이 교의에 따르면 조합주의 경제투쟁만으로도, 노동계급의 혁명적 정치투쟁 없이도, 변혁적일 수 있다고 합리화된다. 이 두 부분은 현실에서는 하나의 조류로 결합되어 있다. 이 이론적 실천가들은 한동안 자신을 “좌파 중의 좌파”라고 내세우며 사회개량주의와 구별했지만 주요 인사들이 정의당에 입당함으로써 결국 스스로가 본질적으로 사회개량·개혁주의 조류임을 입증했다. 이들과 결합한 좌파 활동가, 실은 강성 경제주의 노동운동가들 또한 결국 사회개량주의 정당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이들 또한 본질적으로 개량주의자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다섯째,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레닌주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인 개량주의자들과 치열하게 사상투쟁을 했고,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권력을 창출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로 변혁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처럼 그는 실천적으로는 분명히 혁명적이다. 그러나 그는 이론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혼란스러운 세계관을 만들고 확산시켰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변증법』과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같은 저작에 실린 엥겔스의 ‘유물 변증법’의 관점을 계승했으며,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철학노트』 등의 저작으로 이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이 이론은 1938년 스탈린이 저술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으로 총괄되고 소련의 국가 교의로 되었다. 
 

 이 변증법적·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세계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은 변증법적으로 운동한다. 그 변증법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보편적 연관,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 양질 전화, 부정의 부정과 같은. 그리고 세계의 일부인 사회와 역사는 세계일반과 마찬가지의 원리가 관철된다. 사회의 역사는 세계일반, 더 정확하게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으로 변화·발전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와 역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하나의 생산양식으로부터 다른 생산양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이행한다. 변증법적·사적 유물론은 이렇게 사회가 변증법적으로 움직인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사회가 혁명적으로 변혁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의식적·의지적 활동을 통해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인정한다. 이런 이유로 레닌주의는 구조주의를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혁명적 유물론과 근접한다. 하지만 사회의 변화·발전은 세계일반, 더 정확하게는 자연계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자연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연계의 변증법이 사회·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렇게 자연필연적인 법칙이 관철되므로 자본가든 노동자든 인간은 이 법칙에 규정되어 움직이는 행위자일 뿐 진정한 주체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구조주의적 유물론에 근접한다. 앞에서 말한 알튀세의 구조주의 역시 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고 있다. 이렇게 변증법적 유물론의 실천적 함의는 이중적이다. 이런 이중적 성격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 시기 이 세계관을 수용한 조류 가운데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혁명적 실천으로 나아갔으나 다른 부분은 자본주의 구조의 자동붕괴와 그에 따른 자동적 이행을 전망하며 대기했다.  
 

이런 자기분열은 마르크스가 인간과 세계의 관계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으면서 형이상학적 유물론으로부터 실천적 유물론으로 나아갔던 것과 달리, 여전히 물질과 의식(관념) 가운데 무엇이 1차적이냐 하는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으면서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물질’과 헤겔의 ‘변증법’을 기계적으로 결합하고 또 이것을 사회·역사에 그대로 ‘적용’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인간사회의 역사는 자연필연적인 과정이 된다. 이 변증법적·역사적 유물론은 훗날 소련·동구권 안팎에서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특히 경제구조적 모순의 결정적 역할에 비해서 노동계급 투쟁의 역할을 경시하고 계급투쟁 안에서 계급의식이 갖는 역할을 경시하는 데 대한 비판이 많았다. 그러다가 소련·동구권이 붕괴하면서 이 세계관의 영향력은 소멸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계관을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조류가 세계적으로도 한국 안에도 남아 있다. 한마디로 이 세계관은 낡았다.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철학의 근본문제는 더 이상 물질과 의식의 이러저런 관계(무엇이 1차적인가,  물질과 인식의 관계는 무엇인가와 같은)가 아니라 인간 주체와 대상세계 사이의 실천적 관계이다!(이에 관해서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가운데 첫 번째 테제를 참조.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단지 객체 또는 직관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 일이다.”) 전자는 신흥 부르주아지가 봉건계급(봉건영주와 종교세력)과 투쟁하던 단계인 근대에 근본적이었다. 
 

 한편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수용하고 있다. 스탈린은 부정하지만 레닌은 긍정한다. 스탈린주의자든 트로츠키주의자든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세계관으로 가진 조류에서는 사회변혁에서 경제적·구조적 요인을 결정적이라고 보면서 노동자·민중의 주체적·혁명적 열정·의식·의지를 부차화한다. 그리고 대중 스스로의 계급적 각성과 혁명적 실천보다 지도자(그는 대 이론가이다)와 이론가들 - 이들은 필연의 법칙을 통찰한 사람들이다. - 의 역할을 과대평가한다. 이같이 이들은 모두 엘리트주의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권력을 잡으면 관료화한다. 
 

여섯째 주체의 철학적 세계관 즉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은 한 때 학생운동 안에서 폭넓게 수용된 바 있고, 현재 한국 노동·민중운동에서 일정하게 수용되고 있다. 주체사상은 역사발전 과정에서 사회구조의 규정보다 인민대중이 수행하는 역할을 높이 내세우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 점에서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지배적이었던 레닌주의 세계관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이 세계관에서는 “사람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세계 발전의 특출한 산물이기 때문에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민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다.” “사회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다.” “혁명 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다”라고 규정하며, 역사 과정에서 인간(인민대중) 활동의 능동성과 이 능동성을 높이는 의식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현 단계 철학의 근본문제를 “사람과 주위 세계의 문제”로 바르게 설정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주체사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계급관계,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지형 등 사람을 둘러싼 객관적 제 조건이 인간의 의식과 실천에 미치는 제 작용에 대해 충분히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객관적 조건과 그것의 변화에 대해 둔감하다. 예컨대 주체의 세계관을 가진 조류에서는 한국사회가 전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후진자본주의, 중진자본주의, 선진자본주로, 나아가 제국주의로 급속하게 이행해온 사실이 적시에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따라 한국은 현재 개발독재 시대와 달리 미 제국주의의 규정 속에서 과두 독점재벌이 헤게모니 세력으로 지배하며, 이들을 대변하는 거대 양당은 모두 사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보수·반동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정치는 여전히 낡은 과거 군사독재 대 민주의 구도에 머무른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고찰한 세계관들의 성격은 결국 노동자·민중이 사회·역사 변혁·창조의 주체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이상의 여러 세계관은 대체로, 주체의 철학적 세계관을 제외하고, 이것을 부정하거나 이것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하는 점에서 공통된다. 역사 속에서 더 이상 혁명적 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역사는 끝났다!) 그런 것이 일어나더라도 인간(구체적으로는 노동자·민중)의 주체적 실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신비한 물질적 힘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혁명적 유물론의 세계관은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달리 인간 스스로의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며 인간은 혁명적 실천을 통해 환경(자연과 사회)을 변혁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변혁한다고 파악한다. 다만 매 시기의 역사는 백지 위에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토대와 상부구조를 망라한) 속에서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만들어진다고 파악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발전 속에서 주체적 조건의 측면과 객관적 조건의 측면이 행하는 역할을 고르게 중시하면서(주·객관적 조건!) 실천과 혁명을 두루 중시하는, 마르크스의 세계관을 계승하는 “주체적·객관적 실천적(‘관조적’에 대하여)·혁명적(‘개량적’에 대하여) 유물론”의 세계관이 가장 과학적인 세계관이라 할 것이다. 
 

* 마르크스는 주저 『자본론』 제32장에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것을 ‘철의 법칙’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철의 법칙’으로 파악하는 순간 인간의 주체성은 허구가 된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하는 경향성은 가지지만 사전에 그 과정과 목적지가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실천이 그것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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