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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 격변기 노동·민중운동의 세계관, 이념, 전략 (3) :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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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9-27 12:01 조회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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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 노동·민중운동의 세계관, 이념, 전략 (3) : 이념

 

김승호(헬조선변혁 전국추진위 지도위원)

(2024년 1월 28일 정세강연 원고)

 

4. 이념(이 글은 금년 1월 행한 ‘격변기 민중운동의 세계관, 이념, 전략’ 강연의 원고 중에서 ‘이념’에 관한 부분입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의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특히 자본주의 쇠퇴와 사멸 시대의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혁명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장착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세계관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21세가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

 

 사회주의면 사회주의지 무슨 21세기 사회주의인기? 21세기론의 유행을 따르는 상업적 이론이 아닌가? 필자도 21세기론을 부정했다. 그런데 21세기 사회주의론은 그런 상업적 이유에서 제출된 이념이 아니다. 세계 혁명가 체 게바라가 구 소련에서 흐루시초프의 환대를 받으면서 듣고 본 소련 현실을 비판하면서 내놓은 이념이다. 그는 소련은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므로 실패하고 있고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고 통찰했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는 참다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가들은 소련이 붕괴하자 ‘전망’을 상실하고 배신하고 도주했지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소련 사회주의의 실패를 확신하고 실패 이후에 성찰로 등장할 새로운 사회주의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게 먹물 사회주의자들과 목숨을 걸고 몸을 던진 혁명가 체 게바라의 차이이다. 그러하기에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묘사했다.

  

 21세기 사회주의론의 핵심은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정립했듯이 환경과 인간활동, 인간성의 변혁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동시변혁은 또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만 실현된다는 것이다. 박애주의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처럼 노동자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면 좋은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 그런 사회에서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는 누군가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즉 또 하나의 지배계급을 불러낸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환경의 변혁과 인간활동의 변혁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은 혁명적 실천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갈파했다. 체 게바라의 21세기 사회주의 사상은 이런 마르크스의 통찰과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체 게바라의 사상을 채용한 쿠바에서는 환경 즉 사회체제의 변혁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 인간의 변혁 즉 사회주의적 인간의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게 소련 붕괴 이후에도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과 달리 쿠바 사회주의가 붕괴하지 않은 핵심적 이유다.

 

 그러면 사회주의적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자본주의에서 형성된 인간을 계승하면서 부정하는 인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해방시켰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시대이다. 그러나 그 개인은 이기적이고 욕망추구적인 인간이다. 특히 물질적 욕망을! 사회주의적 인간은 전태일 동지가 역설했듯이 물질적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인간이며 동시에 사적 개인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이익 즉 사회적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은 매우 윤리적 도덕적인 동시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만인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능력의 내용과 사용은 자본주의의 그것과 180도 다르다. 자본주의 식이 아니라 사회주의 식이다. 쿠바의 의사와 한국의 의사를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다. 쿠바 의료는 예방이 중심이다. 한국 의료는 수술이 중심이다. 쿠바 의사는 인술을 편다. 한국 의사는 상술을 편다. (이 글을 쓴 것은 한국에서 의사들의 사보타주로 의료대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다.)

 

 이런 사회주의적 인간이 형성되려면 사회의 환경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구상하는 자와 명령하는 자가 따로 있고, 그것에 복종하는 자가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인간 사이에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군대식으로 보자면 계급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상품적 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교환되어서도 안 되고,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이 상품으로 교환되어서도 안 된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은 이상적인 사회이다. 그렇다. 21세기 사회주의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그러나 현실주의를 핑계로 사회개량주의에 머무르면 자본은 파시즘과 전쟁으로 치달을 것이다. 현실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다들 극우의 집권을 우려하고 있고 중동전쟁과 제3차 세계대전이 날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실주의자만 되어서는 안 된다. 체 게바라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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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글은 위의 글에 관련한  연구 노트입니다.

(2023년 8월말에 작성하고 2024년 8월말에 퇴고했습니다.)

 

엥겔스의 사회주의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반뒤링론에 대하여

 

반뒤링론(오이켄 뒤링 씨의 과학변혁) Ⅷ 변증법. 부정의 부정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1).

 

위에서 약술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16세기 이래로 이루어져 온 개인적 소유의 지양이 제1의 부정이다. 이에 뒤이은 제2의 부정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개인적 소유’의 부활이되 토지와 노동수단에 대한 공동보유에 기초한 보다 높은 형태의 부활로 특징지어진다. 맑스씨는 이 새로운 ‘개인적 소유’를 동시에 ‘사회적 소유’라고 불렀는데, 요컨대 바로 여기서 헤겔이 모순을 지양한다고 한, 즉 말장난에 따르면 극복하는 동시에 보존한다는 고차적 통일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맑스 씨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유라는 몽롱한 세계에 편안히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교의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이 심오한 변증법적 수수께끼를 풀도록 맡겨두고 있다. ... 이상은 뒤링 씨의 말이다.(145~146쪽)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것은 개인적 소유를 복원시키되,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를 기초로 하여, 즉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협업과 토지를 비롯한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 소유 등을 기초로 하여 복원시킨다. 자기 노동에 기초한 분산된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것은, 사실상 이미 사회적인 생산 경영에 기초하고 있는 사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험하고 더 어려운 과정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요컨대, 몰수자에 대한 몰수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는 토지에 대한 사회적 소유와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의 복원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독일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적 소유에 들어가는 것은 생산물, 따라서 소비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 살 먹은 어린이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맑스는 56면에서 “공동체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며 자신들의 많은 개인적 노동력들을 의식적으로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 따라서 사회주의적으로 조직된 연합체를 상정하고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한 부분은 다시 생산수단으로 쓰인다. 이 부분은 계속 사회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 부분은 연합체 성원들이 생활수단으로 소비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뒤링 씨의 헤겔화된 머리도 이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146~147쪽)

    

그러면 맑스에게 있어서 부정의 부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맑스는 791면과 그 이하에서 그 앞의 오십 면에 걸쳐 서술한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경제적이고 역사적인 연구의 결론을 총괄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는, 적어도 영국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소경영이 존재하였다.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요체는, 이 나라에서는 이 직접적 생산자들에 대한 수탈, 즉 자기 노동에 근거한 사적 소유의 해체에 있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상술한 소경영이 오로지 생산 및 사회의 협소하고 자연성장적인 한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그 자신을 파괴할 물질적 수단을 세상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 즉 개인적이고 분산된 생산수단의 사회적으로 집적된 생산 수단으로의 전화가 자본의 전사를 이룬다.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들로 전화하고 그들의 노동조건들이 자본으로 전화하자마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자기 발로 서자마자, 노동의 그 이상의 사회화와 토지 및 그 밖의 생산수단의 그 이상의 전환, 따라서 사적 소유자들에 대한 그 이상의 수탈은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이제 수탈당할 자는 더 이상 자영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에 내재하는 법칙들의 작용에 의해서, 즉 자본들의 집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들을 때려죽인다. 이러한 집적, 즉 소수 자본가들에 의한 다수 자본가들의 수탈에 병행하여 노동 과정의 협업적 형태가 더욱 대규모로 발전하며, 과학의 의식적인 기술적 응용, 토지의 계획적인 공동 경작,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노동수단으로서 사용함으로써 얻는 모든 생산 수단의 절약 등이 발전한다. 이 전화 과정의 모든 이익을 강탈하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듦과 동시에 빈곤, 억압, 예속, 타락, 착취의 양이 증대하지만, 또 이와 동시에 끊임없이 팽창하고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 자체의 기구에 의해 훈련되고 단결되고 조직되는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증대한다. 자본은, 이 자본과 함께 그리고 이 자본 밑에서 개화해 온 생산방식의 족쇄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적과 노동의 사회화는, 그것들의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2)(148~149쪽)

 

맑스는 자신의 역사적-경제학적 증명을 끝낸 다음에, 아제 비로소 다음과 같은 서술을 이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전유 방식,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인적인 사적 소유, 즉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첫 번째 부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정은 자연적 과정의 필연성을 갖고서 그 자신에 의해 생산된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등등 (이하는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다)

따라서 맑스는 이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부름으로써 이 과정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반대이다: 그는 이 과정이 일부는 이미 실제로 일어났고 일부는 이제 틀림없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다음, 여기에 덧붙여 이 과정을 일정한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뒤링 씨가 부정과 부정이 여기서 과거의 태내에서 미래를 분만시키는 산파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거나 맑스는 사람들이 부정의 부정을 신용하여 토지 및 자본 공유제(이것 자체가 뒤링 류의 형체를 갖춘 모순이다)의 필연성을 납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시 뒤링 씨의 순전한 날조이다.(150쪽)

 

역사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모든 문화 민족은 토지에 대한 공동 소유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정한 본원적 단계를 넘어선 모든 민족에게 있어서 토지에 대한 이러한 공동 소유는 농경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생산에 대한 족쇄로 변한다. 그것은 지양되고 부정되며, 짧거나 긴 중간 단계를 거친 후에 사적 소유로 전화한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에 의해 농경이 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반대로 사적 소유가 생산에 대한 족쇄로 된다. -- 오늘날, 소토지 보유나 대토지 보유를 막론하고 모두 이러한 사정에 있다. 이것 또한 부정하라는, 그것을 다시 공동재산으로 전화하라는 요구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 요구는 옛날의 본원적 공동 소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고차적이고 발전된 공동 보유의 형태의 확립을 의미하는바, 이러한 고차적 공동 보유 형태는 생산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비로소 생산을 그 족쇄로부터 해방시켜 현대의 화학적 발견들과 기계적 발명들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게 한다.(154쪽)

 

이상의 『반뒤링론』에서 인용한 문구들에서 엥겔스는 사회주의 생산양식 하에서의 소유형태에 대해 생산수단은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소비수단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라졌던 개인적 소유가 회복된다고 말한 것은 이 소비수단의 개인적 소유의 회복을 두고 한 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 또는 주장은 요령부득이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말은 소상품생산에 존재하던 개인적 소유가 자본주의 생산에서 부정되었다가 사회주의 생산에서 다시 복원된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사적 소유는 재건하지 않는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원되는 개인적 소유란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엥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생활수단/소비수단의 개인적 소유라고 한다면 그러한 생활수단의 개인적 소유는 소상품생산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도 부정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생활수단 가운데 일부는 사치적 소비를 위해 자본가계급이 소유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소상품생산에서의 생산자의 생활수단 소유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의 임금노동자의 생활수단 소유로의 이행을 개인적 소유의 부정이라고 규정하고 또 자본주의 생산에서의 임금노동자의 생활수단 소유에서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자의 생활수단 소유를 부정된 것의 부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겠는가? 어느 생산양식에서나 생활수단은 최종적으로는 직접 생산자들이 소유했다. 다만 생산된 생활수단의 일부를 지배계급에게 착취당했으며, 그 착취의 방식과 크기가 달랐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생산양식이 바뀜에 따라 부정되었다가 다시 부정되는 것은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생활수단의 소유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구별이다. 마르크스는 소생산자의 소유를 개인적 사적 소유라고 규정했다. 이로써 사적(private) 소유와 개인적(individual) 소유는 서로 다른 성격의 사물임이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또 소상품생산자의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또는 자본가적 사적 소유를 분명히 구별했다. 두 경우 모두 사적 소유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소생산자의 경우에는 개인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자본가적 소유에는 그것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본가적 소유에서는 사적 소유는 계승되지만 개인적 소유는 부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부정된 “개인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수수께끼의 열쇠다.

엥겔스의 위의 인용문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독립 소생산제 이전에는 부족이라든가 국가라든가 하는 집단체(collective)가 토지를 소유했다. 그런 생산양식 아래서는 개인(Individual)은 집단 또는 공동체에 매몰되어 부존재했고 발언권이 없었다. “개인”은 근대의 산물인 것이다. 근대가 시작될 당시 개인은 공동체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이 독립적 존재임을 주장할 수 없었고, 공동체를 해체하고 사적(private)인 생산자로 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독립적 존재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소생산자를 그 이전의 소생산자와 달리 “독립” 소생산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토지를 비롯하여 생산에 필요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었고(freeholder), 또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 생산물을 자기의소유물로 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려면 인격적으로 자유로워야 할 뿐 아니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 두 가지 지점에서 독립 소생자자들은 생산과정에서 타인에 예속되지 않은 주인된 존재였다.  

이런 상태는 수백 년에 걸친 지주·자본가계급의 원시축적(또는 본원적 축적)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로써 인격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출현했다. 지배계급은 이 프롤레타리아를 임금노동자로 고용하여 생산을 담당하도록 강제했다. 경제외적 강제가 아니라 경제적 강제! 이런 자본가적 소유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을 사적인 개인 즉 자본가가 소유하지만 그는 여러 명의 타인을 고용하여 생산하고 끊임없이 이러한 소유관계 즉 자본가의 생산수단 독점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이 자본가적 생산에서는 직접생산자들 개개인은 생산과정과 생산물에 대한 결정권과 처분권이 없다. 그는 생산물 가운데 일부인 임금재를 생활수단으로 분배받아 소유하고 소비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유로운 노예, 임금노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적 소유는 철저하게 부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된 개인적 소유는 사회주의 생산양식에서는 복원된다. 그러나 개인적 소유는 소생산제에서와 같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가 됨으로써 복원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자 또는 보유자가 되는 것을 통해서 개인적 소유자가 된다. 전근대 시대의 집단적 소유에서는 개인적 소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 이후 개인이 탄생했으나 이 개인은 자본주의하에서 사실상 부정되었다가 자본주의 하에서 발전한 집단적 생산방식을 기초로 공동소유를 창출함으로써 집단적 소유자인 동시에 개인적 소유자로 부활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적 소유는 바로 이 공동소유 즉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인 소유를 말한다. 이 소유형태에서는 전근대에서의 총유와 같이 개인의 독립적 존재성이 부정되지 않는다. 집단체 소유가 아니라 개인들의 연합이 소유한다. 이 연합은 또한 개인의 독립성만 인정하고 집단체는 부정하는 사적 개인들의 연합이 아니다. 그런 연합은 결국 해체된다. 그렇게 해체되지 않으려면 이 연합은 사회적 개인들의 공고한 연합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연합을 그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고만 파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며, 합의된 계획에 따라 자신들의 수많은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사회적 노동력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3)이라고 설명한 것을 이런 맥락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추가: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32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불어판에서 용어를 다소 다듬었다. 독어판에서 독립 소생산자의 사적 소유를 “사회적·집체(단)적 소유의 대립물”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집체(단)적 소유의 대립물”이라고 고쳤다. 독립 소생산자들이 일반화된 소상품생산 사회 이전에는 사회적 소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실상 사회적 성격을 띠는 생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사회주의적 소유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시간, 노력, 고통”에서 “사회적 성격을 띠는 생산”을 “집단적 생산방식”으로 바꾸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을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력의 측면에서 사회적 성격은 높아지지만 생산관계에서 노동자들 개인의 소유는 부정되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수정했을 것이다.

한편, 독어판 및 영어판에서는 “개인적 사적소유”(individual private property)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하고 있고 또 “개인들의 자기 노동에 토대를 둔 분산된 사적 소유”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한편 불어판에서는 “{생산수단/필자} 점유자 자신의 노동에 기반한 소유” “자주독립적이고 개인적인(indépendant et individuelle) 노동의 필연적 귀결인 그 사적 소유“ ”개인적 노동의 대상인 사적이고 분산된 소유“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개인적“이라 함은 노동이 타인에게 속하지 않고 노동자 자신의 것인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소유 문제는 생활수단의 소유문제가 아니라 생산수단 즉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의 소유 문제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노동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것이 되려면 당연히 그가 사용하는 생산수단(노동대상과 노동수단) 역시 노동자 자신의 소유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소상품생산에서는 분산된 사적 소유와 동시에 개인적 소유가 성립한다. 이 개인적 소유는 사회주의에서 노동이 집단적·개인적 노동이 되는 것과 나란히 생산수단의 사회적(집단적·개인적) 소유를 통해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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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근대(농노제)   ⇨  소생산(과도기)       ⇨    자본제              ⇨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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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    집중(주로 토지)       분산(주로 토지)         집중(주로 생산된 생산수단)       집중(좌와 동일)

 

노동            타인(예속)노동        개인적·독립적 노동       타인(예속)노동                          개인들의 공동 노동

소유            집체(단)적, 공적            사적·개인적               사적·자본가적                           사회적, 집체(단)적·개인적

 

 

2.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4)

 

서설[영어판 (1892년)]

 

“이 저술은 우리가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하고 있는데, 이 유물론이라는 단어는 영국의 꽤 많은 독자들의 귀에 몹시 거슬릴 것이다. ‘불가지론’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유물론은  --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칠 세기부터의 모든 현대 유물론의 고향은 바로 --영국이다.”(410쪽)

 

“그래서 나는 바란다. 내가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궁극적 원인과 결정적 추동력이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생산 및 교환 방식의 변화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의 서로 다른 계급들로의 분열과 이 계급들의 투쟁에 있다고 보는 세계사의 진행에 대한 특정한 파악을 지칭하기 위해, 다른 여러 언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어로도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독일어로는 속물들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덕망 있는 양반들“이라 해도 그렇게 놀라 자빠지지 않았으면 하고.”

 

“새로운 출발점은 대두하는 부르주아지와 과거의 봉건적 토지보유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이었다. ... 영국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옛날의 봉건 남작들은 장미 전쟁에서 서로를 때려 죽였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비록 그 대부분이 오래된 가문의 후손들이었지만, 훨씬 먼 방계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집단을 이루었다; 그들의 관습과 성향은 봉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적이었다; 그들은 화폐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곧바로 면양으로 수 많은 소작인들을 몰아냄으로써 지대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교회 영지를 그냥 나눠주거나 헐값에 판매함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지주들을 대규모로 창출했다; 십칠 세기 말까지 끊임없이 게속된 대규모 영지들의 몰수도, 그 후에 영지들이 졸부들 및 반 졸부들에게 분배됨으로써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헨리 7세 이래의 영국의 ‘귀족’은 공업 생산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그로부터 편익을 챙기려 들었다,”(421쪽)

 

“그리고 이제 대륙 부르주아의 자유사상과 종교적 무관심에 대한 영국의 덕망 있는 속물근성의 승리가 닥쳐왔다.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은 반역적이게 되었다. 그들은 완전히 사회주의에 전염되었고, 게다가 자기들이 지배권을 전취하는 수단의 합법성에는 매우 정당하게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그 튼튼한 자들은 여기서 실제로 나날이 점점 더 심술궂게 되어 갔다. 프랑스와 독일의 부르주아들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남아 있던 길은 ... 자기들의 자유사상을 암암리에 잠재워버리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종교를 비웃던 자들이 ...  겉으로는 믿음이 깊은 체 하면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과 의식을 존중하며 말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직접 그러한 것을 따르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유물론과 함께 궁지에 빠졌다. ”종교는 인민에게 유지되어야 한다“ -- 이것이 사회를 전반적 몰락에서 구할 마지막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들 자신에게 불행한 점은, 그들이 종교를 영원히 파멸시키려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뒤에야 비로소 이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영국의 부르주아가 냉소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외칠 차례가 된 순간이 닥쳐왔다: 이 바보들아, 난 그런 것쯤은 벌써 이백 년 전부터 너희들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단 말야!” “하지만 영국의 부르주아의 종교적 완고함도, 대륙의 부르주아의 징 치고 막 내린 다음의 개종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물결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전통은 하나의 거대한 제동력이며, 역사의 타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수동적일 뿐이므로 압도되어야 한다. 또한 종교는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방벽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법률적, 철학적 및 종교적 표상들이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경제적 관계들의 가까운 또는 먼 후예라면, 경제적 관계들이 근본적으로 변한 후에도 이러한 표상들이 오랫동안 그대로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믿든지, 그렇지 않으면 와해되고 있는 사회는 어떤 종교적 설교로도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할 것이다.”(431쪽)

 

“그리고 사실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온갖 종류의 전통에 속박되어 있다. 부르주아적 전통들 --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두 정당만 존재할 수 있다든지, 노동자계급은 위대한 자유당을 매개로 하여 속죄받아야 한다든지 하는 널리 퍼져 있는 미신들. 그리고 독자적 행동을 취하려는 최초의 실험적 시도들의 시대에서부터 물려받은 노동자적 전통들 -- 수많은 오랜 노동조합들에서는 정규적인 견습 기간을 마치지 않은 모든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것; 이것은 조합들 안에 자기 자신의 파업 파괴자들을 키우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전통들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전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브렌타노 교수 같은 양반까지도 자기의 강단 사회주의자 형제들에게 유감을 표시하며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에서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여기서는 망설이고 저기서는 별반 성과가 없을 수도 있는 실험적 시도를 행하면서 천천히 정연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때때로 사회주의라는 명칭을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불신하면서도 그 사태는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으며, 운동은 차례로 노동자층을 사로잡고 있다. 이제 운동은 런던 이스트엔드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죽음 같은 잠에서 깨우고 있는바, 이 새로운 세력이 어떤 값진 자극을 되돌려 주었는가 하는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이다.”(431~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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